• 주간한국 : '일그러진 운명'이라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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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09.19 18:45:11 | 수정시간 : 2003.09.19 18:45:11
  • '일그러진 운명'이라 하지 말라

    동성애자 서동진의 삶
    편견과 왜곡이 가장 큰 고통, 삶 자체가 폄하되는 것 참을수 없어






    “동성애와 동성애 포르노그라피조차 혼동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1995년 동성애자임을 밝히고 국내 최초의 대학 동성애자 모임인 ‘컴 투게더(연세대)’를 이끌었던 문화평론가 서동진(36) 씨. 그가 9월 2일 법정에 섰다.

    청소년 유해매체물로 지정된 ‘동성애 사이트’를 옹호하기 위해 법정에 출석해 “당신은 동성애자냐”는 변호인 질문에 “예”라고 당당히 말한 뒤 “동성애자들이 겪고 있는 편견과 차별, 이로 인한 고통과 어려움을 토로하고 건전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신문 가십(gossip)난에 오른 이 같은 그의 행동에 대해 “용기 있는 결단이다”에서 “교만한 치기에 불과하다”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 하여간 동성애자가 법정에서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밝힌 사실만으로도 여론은 들끓었다.

    국내 동성애자의 ‘대표’로 법정에 선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는 가능한 한 자신에 대한 말을 아끼며 동성애자들의 공통된 고통과 어려움만 전해주려 했다.

    “우습죠.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변한 게 없어요. 동성애자 축제나 집회에 가면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떳떳하게 드러내고 나와 있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동성애자가 법정에 섰다는 사실만으로 ‘일그러진 영웅’을 만들려 하죠. 마치 현대 문명 사회에 들어온 겁 없는 원주민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요.”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 모색해야



    문화평론가이자 서울 퀴어영화제 조직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그는 연세대 강사로 ‘청년문화론’에 대해 강의를 하고 있기도 하다. 억압 받고 차별 당하기 쉬운 동성애자이면서 우리 시대 지식인으로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냉철한 ‘성 정체성 인식’과 소신 덕분이다.

    “대중이 말하는 동성애는 보통 이성애자들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해요. (이성애의) 낭만적 사랑과 결혼에 대한 환상이 무너지는 데 대한 혼란과 성적 측면에 대한 관심이 뒤엉킨 가공물일 뿐이죠. 중요한 건 우리 사회가 동성애자들을 이제 의식하기 시작했고,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언제 처음 동성애자라는 걸 깨달았냐”는 우문(愚問)을 던지자, 그 답변은 화살이 되어 돌아온다. “그럼, 이성애자들은 언제 처음 자신이 이성애를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되나요? 첫 키스를 한 때 혹은 첫 관계를 한 때를 처음 동성애(또는 이성애)를 느꼈던 때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겠죠?” 그는 중ㆍ고교 시절 여느 학생들처럼 동급 남학생들에게 친밀감을 느끼며 교우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당시 또래 남학생들에게 느꼈던 친밀감’이 딱히 ‘동성애’의 시초였다고는 단언할 수는 없다. “그때 친했던 친구들 대부분은 결혼해서 잘 살고 있죠.”

    분명한 것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죽음과 같은 고통에 맞닥뜨리게 된다는 것이라고 한다. 서씨는 “모든 동성애자들이 처음에는 자신의 성적 취향을 인정하지 않거나 부인하려고 한다”면서 “특히 가족으로부터 보호 받아야 할 시기에 가족을 해체한다는 비난 속에 직면한 동성애 청소년들은 심한 고민 끝에 자살을 택하는 경우도 있다”고 밝혔다.

    “동성애라는 것을 느낀 순간은 가사(假死) 상태에 빠진 것과 같아요. 이성애만을 당연시하게 배웠으니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 이성애자 중심의 사회가 빚어낸 편견과 왜곡된 인식 때문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하루하루가 깊은 고민의 연속이에요.”

    서씨가 동성애자의 목소리를 내기에 팔을 걷어붙인 것은 이러한 고민에 대한 한 해결 방법을 함께 찾기 위함이다. 그는 “또래나 다른 집단 내에서 당당하게 활동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동성애자들에게는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인터넷은 고독에서 벗어날수 있는 공간



    정보를 교류하고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가기 위해 그가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방법 중 하나가 인터넷이다.

    “주말이면 서울 이태원이나 종로를 비롯해 대도시 곳곳에서 수십만의 동성애자들이 모임을 갖습니다. 하지만 유흥업소가 중심이 된다는 게 한계에요. 동성애자 청소년들이 교류하며 정보를 습득하기에는 부적당하니까요. 그런 점에서 확실히 인터넷은 연령에 구분 없이 편리하고 효율적인 공간이 됩니다.”

    동성애 사이트(엑스존) 유해 논란은 이성애자와 동성애자의 시각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 한 사건이다. 게시판에 “(동성) 애인과 성 관계를 했는데 그 경우에도 에이즈에 걸리느냐”는 내용의 글을 놓고 상이한 해석의 차이를 보였던 것이다.

    원고(동성애자)측은 이에 대해 “동성애자가 에이즈에 관해 묻는 글”이라고 본 반면 피고(이성애자)측은 “성 관계 묘사가 담긴, 청소년에 유해한 글”이라고 지적했다.

    “이성애자 일반인들은 동성애란 말만 나오면 무조건 외설로 치부하는 경향이 짙어요. 쉽게 말해 동성애=변태죠. 하지만 동성애자들이 성 정체성을 인식한다는 건 섹스에 특별히 관심이 높다거나 성애적인 충동이 강하다는 뜻이 아니에요. 동성애자들에게 ‘성’은 삶의 관습과 가치, 문화를 함께 익히는 매개이죠. 이성애자들과 마찬가지로.”


    '청소년에 악영향' 동의할 수 없어



    서씨는 성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는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선 그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동성애를 열망한다고 동성애자가 될까요?” 그는 고개를 가로 젓는다. “동성애자들끼리 하는 농담이 있어요. 만일 성적 취향을 바꿀 수 있는 약이 개발된다면 동성애자의 99%는 그 약을 먹을 것이라고요. 그 만큼 힘든 게 동성애자로서의 삶이지요.”

    인터뷰 말미에 사진 촬영을 위해 팔짱을 낀 포즈를 요구하자 서씨는 뼈 있는 농담을 던진다. “왜 사진을 찍을 때면 항상 저한테 팔짱을 끼라고 할까요? 건방져 보일텐데. 저 사실 겸손해요.”



    배현정기자 hjb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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