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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02 10:46:06 | 수정시간 : 2003.10.02 10:46:06
  • [김동식 문화읽기] 유쾌한 반란


    한달 전쯤이었을 것이다. 대형 음반매장에 LP 한 장이 출현했다. 디지털 시대에 왠 LP 판이란 말인가. 혹시 잘못 가져다 놓은 것 아닌가. 아날로그적인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디스플레이의 일종인가. 아무튼 황학동 벼룩시장이나 길가의 판매대에서나 가끔 볼 수 있는 LP를 대형 음반매장에서 바라보고 있자니 기분이 참으로 묘했다.

    LP의 정체는 곧 밝혀졌는데, 델리스파이스 5집 ‘Espresso’를 CD와 함께 LP로도 제작한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입가에 웃음이 번졌던 기억이다. 적어도 델리스파이스라면 이 유쾌한 도발의 연출자로서는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집에 있는 턴테이블이 부실한 관계로 CD만 사 가지고 들어왔지만, 그 때 LP를 사지 않은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델리스파이스는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인디 밴드이다. 외견상으로는 음악을 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세 명의 청년 윤준호(base) 김민규(guitar) 최재혁 (drum)이 라인업을 구성하고 있다. 1997년에 출시된 첫 음반을 들으며 마이너(minor)한 감수성에 근거한 모던 록 밴드가 나타났다고 좋아했던 기억인데, 그 사이에 벌써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어느덧 멤버들도 서른을 넘겼다.

    개인적으로는 ‘허클베리 핀’의 ‘18일의 수요일’ 앨범과 함께 델리스파이스의 1집 앨범을 1990년대 인디 음악이 배출한 최고의 명반으로 꼽는다. 5집 ‘Espresso’를 들으면서 들었던 막연한 생각은 그런 것이었다.

    이들이 다시 여행을 떠나는구나. 지난 4집 앨범 ‘Drrrr!’이 다양한 메뉴가 제공되는 퓨전 스타일의 깔끔한 음식을 떠올리게 했다면, 이번 신작 앨범에서는 짙은 향과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계산된 감각이 아니라, 그들의 몸으로부터 전달되는 그 어떤 울림과 떨림이 느껴지는 앨범이기도 했다.

    델리스파이스의 진정한 매력을 느끼고 싶다면 라이브 공연장으로 달려 가야 한다. 당연히 텔레비전 출연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인데, 최근에 모 방송사의 가요순위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이 인디 팬들 사이에서는 적지 않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작년 겨울에도 이들의 공연이 있었다. 200명 남짓한 인원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클럽에서의 공연이었는데,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사운드를 구사하는 델리스파이스의 정제된 힘이 돋보이는 무대였다.

    델리스파이스의 공연에서 언제나 기억에 남는 것은 그들의 음악을 즐기기 위해 만반의 자세를 갖추고 나타나는 팬들의 모습이다. 자신들이 아끼는 그룹을 향한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 자리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생겨나는 우애와 교감이 그들 사이에서 요동치는 것 같았다. 수준 놓은 음악을 선보이는 밴드와 그 음악을 최대한으로 즐기고 있는 관객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건강한 즐거움 그 자체이다.

    4월 12일에 있었던 서울 공연(성균관대 새천년 홀)은 역시 기대 이상이었다. 처음으로 시도하는 대규모 콘서트인데도 불구하고 예매가 시작되자마자 매진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공연 당일에는 서너 시간 전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는데, 인상적이었던 것은 30대 중반의 팬들의 모습이었다. 젊은 시절에 자신이 좋아했던 밴드와 함께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처럼 낭만적인 일이 또 있을까.

    특히 필자와 같은 지긋한 연배의 관객들을 이상한 눈으로 흘끔거리는 사람들이 없어서 정말로 좋았다. 다양한 연령층이 공유할 수 있는 라이브 공연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우리 대중 음악의 앞날은 밝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가져보았다.

    이날 공연의 압권은 세 명의 멤버가 악기를 바꿔가며 연주와 노래를 들려준 부분이었다. 공연을 위해 그들이 들인 노력이 전달되었기 때문일까. 관객들은 환호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공연 중간중간에 제시된 애니메이션 ‘반디불의 묘(墓)’와 영화 ‘한니발’의 장면들 또한 묘한 여운을 남겼다. 열정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김민규는 담배를 물고 앵콜 무대에 올랐고, 팬들은 ‘앵콜’ 대신에 ‘대~한민국’을 연호함으로써 멤버들을 무대 위로 다시 불러냈다. 그리고 그렇게 델리스파이스의 공연은 막을 내렸다.

    공연이 끝나고서야 깨달았다, 조금 무리했다는 것을. 하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싶다. 기분이 너무 상쾌했다. 아마도 함께 늙어갈 수 있는 밴드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김동식 문화평론가 tympan@empal.com


    입력시간 : 2003-10-02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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