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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02 11:37:53 | 수정시간 : 2003.10.02 11:37:53
  • 국민소주 '두꺼비' 어디로 가나
    진로 주채권자 골드만삭스 법정관리 신청, 자력회생 무산





    백화점, 맥주 사업 등 무분별한 사업 확장으로 1997년 말 그룹은 부도났다. 이듬해 3월에는 국내 첫 화의 인가 기업이라는 오명을 남겼다. 1924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처음 술을 생산하며 국민주(酒)로 자리 잡으며 근 70여년간 서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해 온 진로의 험난한 행보는 그렇게 시작됐다. 설상가상이었을까.



    당시 ㈜진로의 주력 제품이었던 프리미엄 소주 ‘참나무통 맑은 소주’의 판매율은 뚝 떨어진 반면, 경쟁 업체인 두산의 그린 소주는 탄력을 받았다. 진로의 소주 시장 점유율은 사상 처음 40% 아래로 추락했다.



    희망의 불씨를 살린 것은 ‘참眞이슬露(참이슬)’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54년 두꺼비 상표를 달고 등장했던 진로 소주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참이슬은 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출시 6개월 만에 1억병, 9개월 만에 2억병, 11개월 만에 3억병…. 국내 소주 최단 기간 최다 판매량을 연일 경신해 나갔다.



    참이슬 신화는 계속됐다. 2003년 5월, 참이슬은 50억병 판매를 돌파하며 단일 제품으로는 세계 최고의 판매라는 기록을 세웠다. 소주 병을 눕혀 서울과 부산을 무려 1,210회 왕복할 수 있는 거리였고, 서울 삼성동 코엑스몰의 수족관 아쿠아리움을 782개나 만들 수 있는 분량이었다.



    우리나라 국민 1명당 적어도 100병 이상씩은 마셨다는 얘기였다. 국내 소주 시장 점유율 54%. 특히 전국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수도권에서 90% 이상의 점유율을 기록하는 등 누구도 넘 볼 수 없는 아성을 구축했다.



    하지만 브레이크가 걸렸다. 참이슬로 승승 장구하고 있던 진로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총 채권의 18% 가량을 보유한 주채권자 골드만삭스측이 채권 확보를 이유로 돌연 진로에 대해 법정관리를 신청했고, 법원측이 이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최근 1조원대의 외자 유치가 성사 단계에 이르면서 자력 회생의 꿈을 키우고 있는 터였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가 강인한 의지로 투병을 하며 완쾌를 꿈꾸고 있는데 어느 날 의사가 찾아와서 인공호흡기를 뽑아버린 격이었다. 도대체 골드만삭스는 왜 인공호흡기를 떼 내 버린 것일까. 또 진로는, 아니 국민 소주 참이슬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진로와 골드만삭스의 질긴 악연





    3월31일 진로는 미국 보스턴 소재 투자은행인 CSFB를 통해 1조600억원의 경영정상화 자금을 들여오기로 하고 본계약 체결을 위해 채권단 협의에 들어갔다고 발표했다. 2000년 영국 얼라이드 도멕사에 위스키 브랜드를 매각하고 받은 1,400억원의 내부 유보금을 합칠 경우 외자 유치로 1조2,000억원의 자금을 보유하게 된다는 설명이었다.



    이는 진로의 전체 부채액(1조8,000여억원)의 67%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 주류 업계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참이슬을 간판으로 하는 진로 소주 브랜드의 시장 지배력과 한해 1,000억원대의 영업 이익 등을 고려할 때 외자 유치만 성사되면 회사 경영이 빠르게 정상화할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하지만 기대감은 불과 3일만에 좌절로 바뀌었다. 4월3일 주채권자인 골드만삭스는 계열사 세나인베스트먼트를 통해 “진로의 지급 불능 사태를 막기 위해 법정관리를 개시해 달라”며 서울지법 파산부에 회사정리절차(법정관리) 개시 신청을 냈다. 그리고 1개월 가량 지난 5월14일 법원은 골드만삭스측의 신청을 받아들여 진로에 대해 법정관리 개시 결정을 내렸다. 사실상 독자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내린 것이었다.



    진로와 골드만삭스는 오랜 악연을 맺어 왔다. 질긴 악연의 시작은 97년 진로의 부도 직후였다. 골드만삭스가 경영 자문과 구조조정 컨설팅을 맡았지만 비용 문제 등으로 계약이 무산됐다. 98년 화의가 개시되면서부터 골드만삭스의 ‘딴죽 걸기’가 본격화했다.



    자산관리공사 등을 통해 진로 채권을 헐값에 사들여 최대 단일 채권자로 올라선 골드만삭스는 2000년8월 진로건설과 진로종합식품에 대해 법원에 파산 신청을 냈다. 2002년3월에는 진로 홍콩법인에 대해서도 파산을 신청했고 현재까지 재판이 진행 중이다.



    또 지난해 5월에는 일본 상표권에 대해 가압류 조치를 취해 일본 내 소주사업 매각을 무산시키기도 했다.



    재계는 골드만삭스의 이 같은 행보에는 이익만을 추구하는 투기자본의 냉엄한 논리와 진로에 대한 원초적 불신이 깔려 있다고 분석했다. 골드만饔봤坪?“진로는 한국 유수의 주류회사이기는 하지만 지배주주 만이 이익을 보는 낙후된 기업지배구조를 갖추고 있다”며 노골적인 불신을 감추지 않았다.




    시들지 않는 음모론





    진로측은 “악의적인 구조조정 방해 행위”라며 ‘음모론’을 제기했다. 국내 채권기관과 노조도 회사측과 한 편에 섰다. 삼성증권 우리은행 등 국내 53개 채권기관들은 골드만삭스측의 회사정리절차 개시 신청 직후 회합을 갖고 “법정관리 신청에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채권 회수 여건이 훨씬 악화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였다. 비록 하루 만에 생산 라인에 복귀하기는 했지만, 노조도 법원의 법정관리 결정에 반발하며 하루 20만 상자의 참이슬을 생산하는 청원공장과 이천공장의 가동을 중단하는 등 강경 투쟁을 선언하기도 했다.







    음모론의 핵심은 적대적 인수ㆍ합병(M&A)이었다. 법정관리를 통해 대주주의 영향력을 배제한 뒤에 골드만삭스측이 헐값에 진로를 사들이기 위한 전략이라는 것이었다.



    골드만삭스가 법원에 제출한 회사정리절차 개시 신청서에서 진로의 제3자 인수를 요구했다는 사실도 이 같은 음모론을 뒷받침했다. 서울지법 파산부 변동걸 수석부장판사 역시 “진로는 청산가치보다 기업계속 가치가 높아 보이므로 청산되기보다 제3자에게 M&A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진로 관계자는 “그 동안 화의 조건을 100% 이행해 왔으며 연평균 6.3%의 매출액 성장을 보여왔다”며 “1조원대의 외자 유치로 정상화가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법정관리를 신청한 것은 골드만삭스가 경영권을 헐값에 인수해 제3자에게 매각하려는 속셈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반발했다.



    진로에 대한 채권 가격을 높이기 위한 전술이라는 분석도 적지 않게 흘러 나왔다. 국내 채권자와 달리 무담보 채권 위주인 골드만삭스가 법정 관리 이후 채무를 우선 상환받거나 유리한 입장에 서기 위한 전략이라는 것이다.




    골드만삭스 판정승





    골드만삭스측은 음모론을 일축했다. “경영권을 뺏으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 진로의 재무 상태가 불확실해 법정관리를 통해 안정적으로 채권을 확보하려는 것 뿐이다.”(4월7일 공식 보도자료)



    진로의 재무 상태나 외자유치 가능성에 대해서도 회사 경영진이나 국내 채권단과는 정 반대의 견해를 폈다. 골드만삭스 관계자는 “진로는 총자산 1조8,202억원에 부채가 1조8,529억원으로 부채가 자산을 초과해 재무상태가 불확실한 상황”이라며 “지난 5년간 원금 상환 유예를 해왔지만 진로는 채권자들에게 적절한 상환 계획을 제시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최근 제시한 15년간의 구조조정 제안도 현실성과 신뢰성이 결여돼 있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외자 유치와 관련해서도 “부실의 책임을 져야 할 현 경영진이 추진해 온 비밀 협상으로는 진로의 기업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을 수 없다”며 “법정관리인이 주도하는 국제 입찰을 통한 자산 매각이나 M&A 등이 회생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평가했다.



    숱한 의혹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골드만삭스의 손을 들어 줬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향후 화의 조건 대로 채무 변제가 불가능하다는 점은 진로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다”며 “진로가 주장하는 외자 유치의 규모, 방식, 시기 등에 대한 근거 있는 자료가 없다”고 밝혔다.



    “진로는 채권자 64%가 법정관리 개시에 반대하고 있어 골드만삭스측의 신청이 불성실한 신청이라고 주장하나 채권자들의 뜻은 진로가 추진 중인 외자 유치 작업을 수개월간 지켜본 뒤 법정관리를 개시해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정도여서 불성실한 신청으로 받아들이기도 어렵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전통 소주, 외국인 손에 넘어갈까





    법정관리 결정으로 10.10%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장진호 회장 일가와 진로의 결별은 시간 문제가 됐다. 법정관리 체제에서는 통상 대주주 지분이 전부 무상 소각되는 탓이다. 98년 부도 당시에도 경영권 박탈 위기에 몰렸던 장씨 일가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기존 사주의 권리를 인정해 주는 화의 절차가 개시된 덕에 경영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결국 진로는 창업주인 고 장학엽 회장이 1924년 평강군에서 설립한 지 79년만에, 창립 80주년을 불과 1년 앞두고 장씨 일가의 손을 떠나게 됐다.



    이제 주류 업계의 관심은 누가 진로 인수에 나설 것인지에 쏠리고 있다. 진로가 기사 회생의 카드로 내놓았던 외자 유치 건은 법정관리 개시 결정으로 사실상 더 이상 추진이 불가능해졌다. 법원의 관리 하에 투명한 실사와 기업가치 평가를 거쳐 ‘제3자 매각’을 하는 쪽으로 자연스럽?공론이 모아지는 분위기다.



    진로는 국내 단일 브랜드로는 최고의 브랜드 파워를 인정받고 있다. 아직 구체적으로 인수 의사를 밝히고 나선 업체는 없지만 본격적인 매각 작업이 시작되면 군침을 흘릴 곳이 적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업계에서는 소주 사업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고 현금 보유력이 풍부한 롯데그룹과 주류 업체 경쟁사인 두산 등을 ㈜진로 인수의 유력 후보자로 꼽고 있다.



    외국 주류 회사들도 적극 나설 공산이 크다. 한국 위스키 시장에 외국 주류 회사들이 너도나도 뛰어들었던 전례를 볼 때 ‘매출 1조원, 영업이익 1,000억원, 시장점유율 54%’ 등 매력이 철철 넘치는 진로를 그냥 지나칠 리 없다. 무엇보다 법정관리를 신청한 골드만삭스의 행보는 여전히 큰 관심 거리다.



    경영권 인수에 관심이 없다고 적극 부인해 왔지만 갑작스러운 법정관리 신청에 여전히 의구심이 가시지 않는 탓이다. 위스키, 맥주에 이어 국내 전통 주류인 소주마저도 외국 기업에 의해 장악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어쩌면 머지 않은 미래에 포장마차에서 애주가들이 외국 브랜드 소주를 마시며 이렇게 중얼댈 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맛이 좋은 것이여!”

    입력시간 : 2003-10-02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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