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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02 13:33:43 | 수정시간 : 2003.10.02 13:33:43
  • [추억의 LP여행] 심수봉(下)






    1975년 초여름 밤 남산 도큐 호텔 스카이라운지. 노래를 하던 심수봉은 최고의 가수 나훈아가 찾아온 것을 보고 멋들어지게 그의 히트곡을 불렀다. 이때 그녀의 노래에 감탄한 나훈아의 주선으로 1976년 신세기 레코드와 50만원에 음반취입 계약을 맺고 녹음에 들어 갔다. 당시 작업했던 노래는 후에 대히트를 터트린 '나는 여자이니까'.



    하지만 흥행 여부에 자신감을 가지지 못했던 신세기 레코드가 음반 발매를 지연하자 오아시스로 옮겨 재 취입을 시도했다. 하지만 흙 속의 진주를 알아보지 못하는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데뷔음반 발표시도는 이렇듯 불발에 그쳤다.



    1976년 대학교육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던 그녀는 뒤늦게 대입준비를 해 숙명여대 작곡과에 응시했지만 낙방의 고배를 들었다. 그래서 후기였던 명지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2학년 때 생긴 대학가요제는 그녀에게 자극을 주었다.



    밤무대의 한정된 손님이 아닌 전 국민을 대상으로 노래를 하고 픈 마음이 피어났다. 1978년 27세의 대학 3학년 심수봉은 2회 MBC대학가요제에 창작 트로트 곡 '그때 그 사람'으로 본선에 진출, 심사 위원들과 대중을 경악시키며 선풍적인 반응을 몰고 왔다.



    하지만 '가창력은 돋보였지만 곡의 리듬이 대학가요제의 성격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상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대학가요제의 이단아'로 떠올랐다. 내심 대상을 기대했던 그녀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좌절감을 느꼈다.



    하지만 다음날 지구레코드 사장이 음반 취입을 제안해 와 200만원에 전속계약을 맺었다. 함께 출전해 입상하지 못한 곡 중 마음에 들었던 '젊은 태양'을 '그 때 그 사람' 함께 녹음해 데뷔음반 <78년 대학가요제 입상 곡 심수봉. 최현군-지구>을 발표했다.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1979년 심수봉 열풍은 전국을 강타했다. TV,라디오의 가요프로그램에는 매일 같이 그녀의 노래가 흘러 나왔다. 평론가들은 뒤늦게 '트롯만이 갖는 멋과 맛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가수', '천부적으로 한국적인 한이 담겨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심수봉은 ‘이전의 트롯과는 차별되는 심수봉류의 트롯이라는 장르를 열었다’는 평가를 얻어 냈다. 그녀는 1979년 MBC 10대 가수상, KBS신인가수상을 수상하는 정상의 가수로 떠올랐다. 이에 지구레코드는 신인가수 심수봉에게 제미니 승용차를 보너스로 선물했다.



    '그때 그 사람'이 대박을 터트리자 무관심했던 신세기와 오아시스는 '대어를 놓쳤다'며 녹음해두고는 묵혀두었던 '여자이니까'등을 꺼내 동시에 발매하는 얄팍한 상혼을 보였다. 심수봉의 대표 곡 '그때 그 사람' 은 친구의 병실을 찾아갔다가 그 친구의 남자 친구가 기타를 쳐주는 것을 보고 스케치하여 만든 곡이었다.



    정상의 가수로 떠오른 심수봉은 1979년 10월 26일 세상을 뒤흔들었던 '10ㆍ26 궁정동 사건'의 현장에 있던 두 여인 중 한 명으로 밝혀졌다. 감당키 힘든 좌절의 계절이 다가왔다. 무기력과 허무의 늪에 빠진 그녀는 정신적으로 심하게 흔들렸다. 심령술 도사인 한 도사와의 결혼과 이혼, 정신 병원 감금 등 힘겨운 삶이 이어졌다.



    또한 신 군부가 들어선 1980년 8월 30일 3개 TV사와 5개 라디오사는 방송 윤리위를 열어 심수봉을 위시해 남진, 옥희, 나훈아, 태진아, 정훈희, 이수미 등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거나 시청자에게 혐오감을 주어왔다'는 연예인 20여명에게 방송출연금지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시야에서 사라진 심수봉에 대한 궁금증은 오히려 관심을 증폭시켰다. 방송출연금지조치 이후 그녀는 지방의 밤무대에서 더욱 큰 인기를 과시했다. 1982년엔 영화 '아낌없이 바쳤는데' 출연하며 재기를 꿈꿨지만 79년도에 만든 드라마 주제곡 '순자의 가을' 때문에 또 다시 활동 제약을 당했다. 노래 제목에 당시 '영부인의 이름이 나온다'는 이유였다.



    이 노래는 '올 가을엔 사랑 할꺼야'로 제목을 변경되어 방미가 노래했다. 1984년이 돼서야 그녀의 방송 출연 금지 조치는 해지되었다. 이미 지방 밤업소 사장과 결혼으로 또 한번 인생의 쓴맛을 보았던 그녀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발표했다. 부활의 노래였다. 이후 애국가요인 '무궁화','사랑밖에 난 몰라','미워요'등 인기퍼레이드가 이어지며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1993년 그녀는 MBC 라디오 '심수봉의 트롯가요 앨범'의 DJ를 2년 간 맡았다. 당시 프로그램의 PD 김호경씨와 그녀는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 심리적 안정을 되찾은 그녀는 SBS TV '주병진 쇼'에 출연, 처음으로 10.26 사태에 관한 말문을 열었다.



    이어 1994년 자서전 '사랑밖엔 난 몰라'를 출판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97년 발표한 '백만 송이 장미'는 그녀의 건재함을 과시했던 빅 히트곡. 이후 대학로 라이브 극장 콘서트를 시작으로 그녀는 1999년 힐튼호텔의 데뷔 20주년 기념콘서트 등으로 팬들과의 교감을 이어갔다.



    이후 2001년 그녀의 곡 '사랑밖에 난 몰라'가 영화 백상예술대상 작품상을 수상한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엔딩 곡으로 쓰이며 뭉클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과연 심수봉'이었다.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듯 한의 정서를 사랑으로 승화시킨 그녀의 창작 트로트 곡들은 '심수봉류 트롯'이라는 독창성을 부여 받았다. 대학 가요제의 이단아 심수봉은 온갖 좌절을 딛고 이제 국민 가수로 우뚝 솟아 있다. 그녀는 100년 만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트로트 아티스트라 평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hoi@hk.co.kr


    입력시간 : 2003-10-02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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