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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02 14:57:21 | 수정시간 : 2003.10.02 14:57:21
  • [석학에게 듣는다] 김철수 헌법학자·명지대 석좌교수
    아무도 범접 못한 학문 외길





    “공부만 좋아 하고 정치 능력은 없어 그렇게 된 게 아닌가 해요.”



    금랑 김철수(琴浪 金哲洙ㆍ70) 선생의 말이 초여름의 명지대 석좌 교수실에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법을 학문으로서, 평생의 반려로서, 한결 같은 태도로 학자의 길을 걷고 있는 노교수에게 초반에 던지는 질문치고는 예를 벗어나지나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정계 등으로부터 같이 일하자는 제의 등이 적지 않았을 것인데?”라며 던진 물음을 그는 그렇게 받았다.



    그는 헌법학자 가운데 관직으로 나가지 않은 유일의 인물이다. 또 서울대 소속 공법학자 가운데 정년을 처음으로 맞은 사람이기도 하다. 1998년 서울대 퇴임 기념 강연으로 ‘헌법과 대학의 자치’라는 주제를 들고 나와 진정한 대학 자치를 위해서는 교수들도 적극 투쟁해야 한다는 주제로 좌중을 숙연케 했던 주인공이기도 하다.




    “관직보다 학문으로 나라에 기여”





    서두의 말은 겸사에 가깝다. 그의 말을 더 들어 보자. “관직이나 정계에 나가 활동한다 해봤자 내가 원하는 바를 실현할 가능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학문으로서 나라에 기여하는 게 훨씬 낫다고 믿어요.” 그 믿음 때문에 그는 한번도 관직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사실 그 동안 사회ㆍ정치적 변혁에는 늘 서울대 법대생이 있었다. 박철언, 정대철, 최기선 등이 좋은 예다. 그에게도 정권의 권유는 끈질겼다. 5ㆍ18 민주화항쟁 직후 전두환 사령관이 청와대에서 각계 주요 인사들을 불러 만찬을 베풀기 전 그에게도 참석해줄 것을 종용했으나 그는 청을 거절했다.



    중학 1년 선배라는 점을 내세워 정계에 나와 달라고 한 노태우 전대통령, 왜 자신을 도와 주지 않느냐고 오히려 역정까지 냈던 YS 도 그 뜻을 꺾을 수 없었다.



    그렇듯 그의 행보는 당대 정권과 얼마든지 불편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서울대 법대에서 정년을 맞았고 국내 헌법학의 태두라 불린다. 그것은 그의 인간됨을 익히 잘 아는 제자들이 역대 정권에서 바람막이 역할을 해 주었던 덕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안다.



    학자는 저작으로 기억된다. 그렇다면 그는 학자로서 참 행복한 편이다. 1973년 ‘헌법학개론(제 4공화국)’ 이래 정체(政體)가 바뀔 때 마다 증보판 발행을 계속해 온 ‘헌법학 개론’은 최고의 업적으로 평가 받는다. 현재 이 책은 15판. 1962년 ‘헌법질서론’을 기점으로 해 ‘분단국의 문제’, ‘법과 사회정의’ 등 그의 저서는 모두 25권을 헤아린다. 제자들과의 공저만 20여권에 이른다.



    그러나 그는 저술 작업에 몰두한 자신을 “불행하다”고 말했다. 그것은 나쁜 헌법을 두고 강의해야 했던 과거의 시간에 대한 평가와 맞물린다. “그래서 유신 헌법 등 나쁜 헌법에 대해 강의를 펼칠 때는 타국가의 헌법과 비교해서 강의하는 방식을 택했지요.” 좋은 헌법을 만들고 지지하도록 교육해야 하는 것이 헌법학자의 소임이라 믿는 까닭이다.



    그는 강력한 비판과 그에 걸맞는 행동이야말로 헌법학자가 갖춰야 할 최대의 미덕이라 믿는다. 그가 요즘의 후배 헌법학자에게 “내면적 갈등이 없는 헌법을 갖고 연구하는 만큼, 좋은 업적을 내도록 분발해 줄 것”을 당부하는 데에도 그러한 아픔이 깔려 있다.



    가깝게는 5ㆍ18 항쟁직전, ‘서울의 봄’ 당시 헌법 논의가 시작됐을 때 그는 새 헌법안을 만들어 공청회ㆍ잡지 기고ㆍ좌담회 등을 통해 군부와 마찰을 키워 오고 있었다.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나왔던 이른바 ‘6인 교수안’의 중심에 그가 있었다.



    전두환 소장이 중앙정보 부장과 보안사령관을 겸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요지의 주장은 사실 눈엣가시였다. 급기야 비상계엄령이 떨어졌고, 그는 설악산과 경주 등지의 여관을 전전해야 했다.



    그해 7월 서울대로부터 “교수들의 소집에 불응하면 교수직을 파면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래서 학교에 가 보니 기다리고 있던 것은 ‘문제 교수 A급’ 판정과 남산(중앙정보부)행이었다. 중앙정보부에서는 군인들의 감시 아래 책을 교정해야 했다.



    김대중 내란 음모설 당시에는 거기에 연루됐다 해서 학교서 파면되기도 했다. 그가 경험한 역경은 헌법학이란 학문이 왜 가치 추구의 학문이어야만 하는가를 웅변한다.




    몸으로 부대낀 숱한 역사의 질곡







    72년 10월 유신 당시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당시 정권은 그가 쓴 헌법 관련 서적을 모두 압수해 문제 부분을 삭제하고 재출판하도록 하는 등 현대판 분서갱유를 자행했다. 6개월 해외 추방령을 받은 그는 식구들과 떨어져 자신이 젊은 시절 유학했던 미국과 독일을 전전했다.



    “한창 일해야 하는 나이인 40~50대에 받은 군부의 박해가 제일 힘들었어요.” 당시 활동 금지는 아직까지 한으로 남아 있다. 그나마 제자들이 김철수 교수를 돌려내라며 데모를 벌여, 그 서슬 퍼런 군사정권도 퇴직으로까지 몰 수는 없었던 것이다. 30대의 화려한 활동에 비춘다면 더욱 암흑의 시기였다.



    서울대 법대 학생과장 시절 그는 6ㆍ3 데모에 참여한 학생과 정부간의 중재역을 자임, 학생 보호에 힘을 쏟았다. 제적 대상이 정학으로 낮아졌고, 당시 총학생회장이었던 정정길(법대 62학번) 등 아예 그가 신원보증을 써서 빼낸 학생들도 여럿 된다. 이들은 후에 6ㆍ3 동지회를 결성, 4ㆍ19혁명과 ‘386’세대에 낀 세대로서의 정당한 임무와 지분을 수행하고 있다.



    법학자로서 그는 인생의 분량이 많다. 1966~67년 하버드대 교환 교수로서 미국의 법학 교육은 물론 국회와 법정까지 두루 경험하고 온 것이 대표적이다. 그가 “현 정부는 우물안 개구리”라고 해도 누가 선뜻 토를 달겠는가. 그 같은 볼멘소리라면 1966~73년 중앙일보의 논설위원으로서 논설의 3할을 그가 쓴 사실 앞에서는 무력해질 것이다.



    세계 환경의 날을 기념하는 논설에서 썼던 ‘하나뿐인 지구’라는 말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으며, 민방위법을 두고 이중병역이라며 위헌의 딱지를 붙였던 것은 헌법학자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1980년 어느 신문에 실었던 칼럼 ‘야간통행 금지의 기원’은 야간 통행 금지 폐지의 불을 당겼다.



    그는 항상 독선을 경계한다. 그는 합리주의자다. 합의 없는 일방적 지배-복종 관계는 인정하지 않는다 1986년 그가 펴낸 ‘헌법이 지배하는 사회를 위하여’(고시계刊)는 대중을 위한 최초의 한글 전용 법률 서적이다.



    그는 5권까지 내는 동안, 최대한 쉽고 재미 있게 쓰려고 애썼다. 좋은 헌법 아래 함께 가는 세상을 이룰 첫 걸음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의 타성은 문제였다. 누가 법서를 빼내 들겠는가? 1,000부도 못 나가기 일쑤였다. 결과적으로 법서전문출판사와 일반서적출판사 간의 계륵(鷄肋) 신세만 자초한 꼴이었다.



    3년 전부터 그는 일반인을 위한 헌법 교양 서적을 구상해 오고 있다. 가제로는 ‘헌법 개정과 정치 혁신’을 구상해 두었다. 의원내각제의 장단점, 지방분권, 국회 제도, 정부ㆍ대통령ㆍ국무총리 등 국가 근간의 핵심에 대해 헌법적으로 명쾌한 해석을 내려 줄 책은 오는 8~9월께 선보이게 된다. 진지하면서도 재미 있는 헌법 서적이 한국에서도 한 권 나올 때가 됐다는 징표다.






    일반인 위한 헌법교양서적 구상중





    중학시절부터 안경을 써 온 그는 현재 10디옵터의 고도 근시다. 안경 두께는 그가 학문적 부피와 정확히 대응할 것이다. 현재 공식적으로 그에게 달려 있는 직함들은 그것을 웅변한다. 국제 헌법학회(본부 스위스) 부회장, 세계 국제법 및 사회철학회(본부 독일) 집행 이사, 일본 헌법학회 고문, 한국 공법 학회 고문, 한국 교육법 학회 명예 회장 등이 전공과 관련해 현재 하고 있는 업무다.



    또 96년부터는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추대돼 최고령 법학자 최태영(102)씨를 비롯해 이항녕 서돈각 문홍주 등 선배 법학자들과 종종 만나기도 한다. 그는 아직 최연소다. “거기 가면 내가 청년”이라는 그의 말에서 푸른 기운마저 느껴진다.



    앞으로 시간을 아껴 헌법 개정과 정치 혁신, 사법 개혁, 인권 보장 등에 관한 저서를 쓰고 싶다고 노학자는 다짐했다. 그는 젊은이들의 천지가 돼 버린 우리 사회에 대해 “옛날 같으면 출판사가 (나를) 서로 당겼을텐데, 발언 기회가 자꾸 줄어 든다”며 못내 섭섭함을 표했다.



    발빠른 정론 덕택에 언론의 인기 집필진이기도 한 그는 “지금까지 기고했던 9~10매 짜리의 글만 모은다면 4권 정도의 분량이 된다”며 “취합해 전집을 발행하고 싶다”고 말했다. 논설위원 시절 썼던 사설만 모아도 두 권은 나온다.



    그러나 “출판계가 워낙 불황인 데다 제자 중 출판인도 없다”며 말꼬리를 흐린다. 최근 학생들은 인터넷과 게임에 몰두, 현실도피적으로 되고 말아 빈익빈부익부라는 심각한 사회 병리가 방치, 세습될 것이 가장 큰 걱정이다.



    20여년 전부터 그는 금랑이란 호를 붙였다. 안 그래도 강한 이미지의 이름인데, 법학 연구까지 하니 뭔가 낭만적인 이름을 지으라는 동료 교수들의 말을 모른체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교사 출신인 부인 서옥경(64)씨 사이에 窪ㅘ?42ㆍ사회학자), 수진(33ㆍ강사), 상진(27ㆍ회사원) 등 1남2녀를 두고 있다.



    장병욱 차장 aje@hk.co.kr


    입력시간 : 2003-10-02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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