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 플러스 네이버 북마크 싸이월드 공감 기사 구입 프린트 기사메일
입력시간 : 2003.10.02 15:21:47 | 수정시간 : 2003.10.02 15:21:47
  • [석학에게 듣는다] 김수행 서울대 교수
    "우리시대 좌파적운동은 현대 자본주의에 맞설 힘"





    놀랍게도, 김수행(61ㆍ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의 말투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객지 생활을 그렇게 오래 했건만, 그의 사투리나 억양은 때로 토박이보다 더 심하다. “허허, 대구 사람이 영국가서 한 10년 있다 보니 사투리가 화석화된 거지요.” 나름의 해석이다. 그는 그렇게 화석화된 사투리로, 마르크스 학을 우리 시대에 활성화시키는 작업에 진력해 오고 있다.



    풍경은 언어보다 더 솔직하다. 김 교수의 연구실이 그렇다. 남녀가 망치와 낫을 들고 외치는 모습의 사진, 유대인에 대한 홀로코스트가 자행됐던 수용소의 사진 등으로 연구실의 벽은 장식돼 있다. 1990년 모스크바의 ‘소비예트 경제 성과 전시관’과 폴란드 등지를 찾아 가 동구권의 붕괴를 발로 확인하고 찍어 온 사진들이다.



    높다란 서가를 빽빽이 메운 책들 가운데 눈에 먼저 띄는 것은 영국서 구해 온 ‘마르크스-엥겔스 전집’ ‘레닌 전집’ 등 공산주의를 배태한 역사적 서적들이다. 하드 커버로 장식된 90여권의 원전이 발하는 두터운 서권기에 여름의 교수 연구실은 서늘하다.



    함께 꽂혀 있는 근간 각종 사회과학 도서와 사회 분석 무크지 등은 현재 상황을 말해 준다. 국내 마르크스학의 태두라는 사실까지 육화돼 묵직한 울림을 가져다 준다.



    경제학에서 칼럼까지, 그는 경제학이라는 과학을 토대로 현실을 분석하고 전망을 제시하는 작업에서 항상 최전방에 서 왔다. 1977~82년 런던대 경제학과에서 ‘마르크스의 공황 이론’을 테마로 잡고 박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그에게는 진정한 한글판 ‘자본론’의 꿈이 싹텄다. 마르크스가 영국에서 자본주의적 운동 논리를 꿰?돗?봤다면, 그는 그곳에서 진짜 마르크스를 만난 것이다.



    그가 89년 비봉출판사에서 마르크스 최고의 저작 ‘자본론’의 완역본을 펴낸 일은 한국 사회과학사에서 혁명적 계기로 기록되고 있다.



    그 무렵 대학가를 풍미했던 원전 독해 붐의 상징이자 결정체였다. 가장 중요한 1~3권의 경우, 각각 10여회는 통독했을 정도의 정치한 작업 방식에서 나온 저작물에 어느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었다.






    “마르크스는 21세기에 더 유용한 것”





    이제 마르크스는 폐기되지 않았는가?



    “동구권의 몰락을 보면서 사실 고민 많았죠.” 그는 소련식의 도식화된 계획 경제가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 등 중하층을 해방하는 장기적 변혁론에 도달했다. 바로 그 1989~90년, 김 교수는 자신이 손바닥 보듯 꿰고 있던 ‘자본론’ 번역 작업에 몰두 했던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마르크스는 하나의 실재하는 현상이다. 5월 23~25일 이화여대에서 열렸던 ‘제 1회 맑스 코뮤날레(communale.jinbo.net)’는 한국 자본주의 사이를 배회하던 칼 마르크스라는 ‘유령’을 태양 아래 드러 낸 최초의 사건이었다. 2002년 5월 김 교수를 상임대표로, 서울대 김세균(정치학), 서울시립대 이성백(철학) 교수 등 뜻을 함께 하는 진보적 지식인 230명이 결의한 격년제(비엔날레) 행사다.



    “좌파적 지식인과 문화인이 다 모인 자리였죠.” 그의 말마따나 그 행사는 정통 마르크시스트, 공동체주의자, 공장별 노동 운동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환경론자, 여성운동가 등 현재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고 있는 한국내 좌파적 운동의 역량을 결집했다는 데 큰 의의를 갖는 행사였다.







    현재의 북한을 동포로 볼 것인지 또는 비난할 것인지 등 좌파내에 엄존하는 상이한 입장은 노래와 춤 속에 일단 묻어 두고 서로의 힘과 뜻을 확인한 자리였다. 행사 기간 중 발표된 논문 55편은 2권의 책으로 묶여 나와 기록적 의의를 더 했다.



    철학적, 방법론적 입장 차이를 두고 대립해 오던 한국의 좌파적 운동이 한데 결집한 것이다. 김 교수는 이제 “우리 시대의 좌파는 생명ㆍ환경ㆍ여성 등 새로운 시민 운동을 수용한다”며 “가장 조직화된 노조의 적극 참여가 성공의 관건”이라고 말했다. 가진 자들만을 위하는 이기적 체제로 가속화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에 맞설 힘이라는 논리이다. 그는 “마르크스는 21세기에 더 유효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태생적으로 비자본주의적이다. 집이 너무 가난해 실업계(대구상고)를 택해야 했던 그는 적빈은 혼자 일이 아님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나보다 공부 잘 하는 친구들이 못 산다는 이유만으로 공장에 가야만 했어요.” 그러나 사범대를 나온 큰 누님, 그의 재능을 아끼던 대구상고에서 서울대 상대에 입학하면 학비를 보조해 주겠다고 해, 대학행을 택했다.



    이후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폐를 끼쳐 왔고 도움도 많이 받았다. 아직도 매우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그는 말한다. 더욱이 “나보다 공부 잘하던 놈들이 공장행에 내몰릴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은 그로 하여금 사회의 모순에 대해 일찍 눈뜨게 했다.








    반 자본주의 여정의 시작





    서울대 경제학과 재학시절 ‘경우회(經友會)’라는 비주류 경제학 서클의 6기 회원으로 활동한 것은 껍질을 깨고 나온 자의 자기 선언이었다. 자본주의의 본질적 모순을 규명한 석사논문 ‘힐퍼딩의 금융자본론’은 그 증표였다. 반자본주의에로의 여정은 외환은행에서 근무 중이던 72년 런던 발령을 받으면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 동안 맛만 봤던 ‘자본론’이 풀 텍스트로 깔려 있는 것 아닌가. 마침 석유 파동으로 세계 경제가 침체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때, 그 같은 불황을 제대로 설명해 주는 이론은 마르크스뿐이었다. 75년 5월 귀국한 그는 사표를 던지고 런던대 경제학과 석ㆍ박사 과정을 밟아 갔다.



    82년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 온 그는 한신대에 들어 가 정운영, 박영호 등 유럽서 좌파 공부를 하고 온 사람들과 함께 경제학부를 만들었다. 그러나 신학부가 장학금을 독식하는 등 비리가 거듭되자 그와 정운영 교수는 주동이 돼 학장 불신임안을 통과시켰고 그 결과, 87년 해임으로 드러났다. 반전의 계기는 87년 6월 항쟁이었다.



    당시 서울대 대학원생들이 농성을 벌여 정치경제학 교수를 요구했고, 그가 신청한 것이다. “고도로 추상적인 수량 경제학자, 공장으로 위장 취업해 마르크스를 공부하던 학생, 이들은 도저히 화해할 수 없던 때였죠.” 기존 경제학의 수업 보이코트 농성까지 벌어지자 서울대측은 정치경제학자 채용 공고를 내야 했다. 1945년 이후 처음 있던 일이었다. “학생 데모가 없었다면 교수 임용은 불가능했을 거예요,.”



    당시 ‘마르크스 경제학’이란 제목으로 정통 마르크스 이론을 강의한다는 소식에 수강생이 무려 1,000여명을 헤아렸다. 일부 국가보안법상의 규제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개방된 지금으로선 상상도 하기 힘든 풍경이다.



    당국으로서는 그가 행여나 학생들을 부추길까봐 전전긍긍했지만, 강단에서의 그는 주류와 비주류를 모두 강조하는 교수다.




    “죽은 마르크스가 나를 살렸다”







    장부가 뜻을 이루는 데에는 부인의 소리 없는 도움이 없을 수 없다. 그 역시 마찬가지. 김인자(59)씨의 소리 없는 도움이 없었던들 현재의 그는 존재하지 못했을 지 모른다. 외국인에게는 장학금도 없던 런던대 유학 시절, 장기 분할상환(mortgage) 주택에서 허리띠 졸라 매고 자식 셋을 혼자 도맡으며 살림을 꾸려 준 아내는 생활의 내조자 이상이었다.



    삼성건설 런던 지사에서 근무했던 아내는 남편이 열나게 토로하는 별난 경제학 이야기를 모두 다 들어 주었다. “여타 경제학자와는 달리 내가 경제 이야기를 소설처럼 쉽게 쓰는 것은 바로 아내 덕분이지요.” 시사 칼럼을 방불케 하는 문장력으로 이 시대 한국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서술한 ‘정치경제학 특강’(새날 刊) 같은 책이 좋은 예다.



    지금 그는 영국ㆍ독일ㆍ프랑스 학자들과 공동 작업으로 ‘제 3의 길과 신자유주의’라는 테마로 연구중이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 슈뢰더 독일 총리가 말한 제 3의 길이란 결국 신자유주의를 답습할 것이라는 경고다.



    비록 탈색되긴 했지만 북유럽의 복지 국가를 유효한 모델로 탐색해 나가야 한다는 의견이다. 그 결과는 오는 7월 서울대 출판부에서 출간될 이 책으로 나올 예정인데, 갈수록 미국의 입김이 드세져 가는 요즈음, 초강대국에 휘둘리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법을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



    3년째, 그는 돈을 내는 총장이기도 하다. 8년 후배인 노동운동가 김승호와 함께 세운 사이버 야학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 노동 대학’의 총장으로 매달 50만원씩을 부어 오고 있다. 비주류 경제학자 300여명이 100만원씩 낸 기금으로 서울, 대구, 제주 등지의 8개 공부방도 운영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연대감”이라고 그는 말했다.



    5월에 대구로 내려 가 교대 강의실을 빌려 펼쳤던 강의가 좋은 예다. 인터넷을 통해 강의했던 2학년 교양 과목 ‘영국의 노사 관계’의 오프 라인 특강도 펼쳤다. 강의를 끝낸 저녁에는 학생들과 술자리를 갖고 여관방에서의 하룻밤을 마다하지 않았다.



    정치경제학은 춥고 배고프지 않은가, 라는 다소 위악적 질문을 던져 본다. 그는 발끈했다. ‘자본론’만 20만부 팔렸고, 인세는 9,000만원이라며. 한 마디 더 보태는데, “죽은 마르크스가 나를 살렸다”고. 사실 그랬다.



    영국에서 공부하고 부인과 돌아 와 보니 당장 살 집도 없어, 처가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당시 9회째까지 붓고 있던 산본 신도시의 주택 부금마저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였는데, ‘자본론1~3’의 대박이 단번에 해결한 셈이다. 한국 자본주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번 재임용에 탈락된 서울대 미대 김모 교수의 복직을 요구하는 대학본부앞 교수-학생 2인 시위 현장에도 5월2일부터 거의 매일 들러 독려하고 있다. 직속 선배 교수의 친일 행각을 파헤친 논문을 발표했다는 괘씸죄에 걸려 재임용에 탈락된 김 교수다.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시선은 학생들의 정서적 분노를 넘어선다. 사용자(학교)가 계약제를 자의적으로 해석, 악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눈앞에서 현실화된 데 대한 학자적 신념과 맞물리는 행동이다. IMF 사태 이후 한국 사회를 더욱 암울하게 몰아가는 비정규직 문제를 더 이상 수수방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학문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영일(寧日)과는 도저히 인연이 없던 그의 정치경제학 아닌가.



    장병욱 차장 aje@hk.co.kr


    입력시간 : 2003-10-02 15:23

  • HOME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