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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02 16:35:10 | 수정시간 : 2003.10.02 16:35:10
  • [석학에게 듣는다] 최근덕 유교학술원원장
    "호주제 폐지는 곧 가족파괴"





    “교각살우의 소행”이라며 노학은 언성을 약간 높였다. 노하거나 흥분하기 보다는 안타깝기 그지 없다는 듯, 최근덕(71ㆍ유교학술원 원장) 선생의 말투에는 서권기가 스며 들어 있지 않은 곳이 없다.



    요즘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교각살우라는 사자성구의 뜻을 모른다. ‘결점이나 흠을 고치려다 수단이 지나쳐 도리어 일 자체를 그르친다’는 뜻이다. 하물며 한문(矯角殺牛)은 아예 관심 밖이리라. 시험에 자주 나오는 단어도 아님에랴.



    ‘아??’ 같은 유행어에 비겨 보자. 쓰임새는 물론 효용도 훨씬 덜한 폐어에 가깝다. 그러나 선생에게는 일상어다. 최근 일반 사회와 선생 사이의 간극은 교각살우라는 단어를 사이에 두고 충분히 벌어질 수 있을 언어 불통 양상이 효과적으로 비유해 주리라.



    선생은 마지막 정통 유학 세대다. 서당에서 훈장에게 엄격한 훈도를 받으며 선현들이 남긴 경전을 속속들이 외고 또 외는 것으로 학문의 시작과 끝을 매듭지었던 서당 유학(儒學)자다. 서울 종로구 운니동 65의 1 월드 오피스텔의 방 한칸에 들어 선 사단법인 유교학술원 원장으로 꼿꼿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럼 과연 무엇이 교각살우의 어리석음인가?



    호주제 철폐의 고삐를 더욱 단단히 옥죄자는 일련의 움직임이 그것이다. 5월 16일 여성부 안상현 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호주제 폐지 특별기획단이 본격 업무를 시작하는 등 호주제는 이제 그 목숨이 경각에 처해 있다. 성균관 유림과 종친회 등은 ‘정통 가족 제도 수호 범국민 연합’을 만들고 1,000만 서명 운동에 들어 갔다. 그게 왜 교각살우인가?






    “호주제 폐지가 무슨 이벤트 사업인가”





    선생은 “우리 가족 제도의 근간인 호주제에 대한 근본 시각부터가 문제”라며 “개선해 본다는 생각은 아예 않고 당장 폐지 기획이라니 너무 경솔한 처사 아니냐”며 되묻는다. 적어도 몇 년 동안 관련 학자들을 중심으로 연구한 후에 가능한 일을 총괄기획분과, 법제정분과, 홍보분과, 국민참여분과 등 이벤트 사업 기획하듯 뚝딱 처리해 버리려는 접근 방식부터가 잘못 됐다는 것이다.



    또 호주제가 마치 일제 시대의 잔재인 양 매도하는 것은 사실을 몰라서 하는 소치라는 지적이다. “호주제란 고려 시대 이래 쭉 존속해 온 겁니다. 자, 봅시다.” 들기름내 나는 서책들이 쌓여 있었다.



    그 중 하나인 ‘경남 단성(丹城) 호적 대장 상ㆍ하’에는 여성이 호주가 될 수도 있었음을 증명하는 자료다. 조선 중기에 편찬된 책이다.



    “호주가 없으면 가족 성원이 뿔뿔이 흩어 집니다. 결국 한 사람당 하나씩 가족부를 만들자는 거니.” 그것은 여성 해방이 아니라 가족 파괴로 직결된다는 지적이다. 선생의 우려는 그칠 줄 모른다. 그는 “요즘은 여자 주장만 따라가면 진보주의자가 되는 세상”이라며 “정부에 여성부가 생기면 남성부도 둬야 형평에 맞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선생은 현실적 개선안으로 절충안을 내놓았다. “호주 제도는 두되, 집안 사정을 고려해서 시행하자는 거지요. 단, 성씨는 절대적으로 보존해야 합니다.” 이제 호주제 폐지가 기정사실화해 버렸지만, 선생은 그 과정상 벌어졌던 비민주성에 대해 짚고 넘어 갔다.



    “자기네들과 코드가 안 맞는 사람한테 왜 연락했겠어요?” 이 정부의 ‘코드’란 구별짓기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는 볼멘소리인가.



    그는 “우리한테는 일언반구도 없었다”며 “민족 정체성에 관한 문젠데, 참 경솔하게 다루고 있다”고 지적했다. 선생은 절차상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절차란 민주주의적 의사 결정의 핵심 아닌가. 선생은 “공청회나 깊이 있는 연구도 거치지 않은 이번 사안이 국회를 통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교란 원래 변화의 철학







    이쯤서 선생은 유교와 전통 습속을 구분해 줄 것을 요청했다. “원시 유교에서는 여성이 남성처럼 존중됐다”고 선생은 강조했다. 그는 종손과 함께 종부도 참가하는 원시 유교의 예법을 예로 들었다. 유교란 원래 변화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그런 유교를 고정 불변의 제도로 만들어 버린 게 조선이고, 변화를 거부한 대가로 조선이 망했다는 것이다.



    그 폐습 중 하나가 바로 호주제라는 지적이다. 호逞?때문에 옥석이 함께 훼손되는 어리석음을 선생은 가장 경계하고 있었다. 바로 그런 것이 기세등등한 페미니즘의 오류라는 논지다.



    선생은 가끔 소주를 즐기지만, 노래는 잘 부르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서당에서 성독(聲讀ㆍ일정한 음률로 소리내 읽음)만 하다 보니 정작 높낮이가 필요한 노래에서는 거의 음치 수준이 돼 버린 것이다. 선생은 정통 유학 교육으로 잔뼈가 굵은 마지막 세대다. 그러므로 이하의 기록은 육성으로 듣는 마지막 전통 한학자의 인생인 셈이다.



    거유(巨儒) 남명 조식 선생의 고향이기도 한 경남 합천땅에서 유학자 춘헌 최종선(春軒 崔鐘璇) 선생의 손자로 태어나 다섯살부터 천자문을 배웠다. 조부모, 친부모, 네 삼촌 등 모두 12식구가 모여 살던 집이었다. 근엄하기 짝이 없는 할아버지였지만, 그는 글을 배우면서 한번도 맞은 적이 없었다고 선생은 모처럼 어린 시절로 돌아 가고 있었다. 종손에 독자였으니 귀하게 자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논에 들어가 일 해보고 싶었는데, 할아버지 때문에 꿈도 못 꿨지요.”



    소학을 떼고는 1㎞ 정도 떨어진 서당에 가서 사서오경을 배우고 이후 국민학교에서 고등학교 과정까지 13년간 공부했다. 말이 공부지 전부 다 외우는 것이었다. 외워야만 그 다음 진도를 나갔기 때문에 어떻게든 외우지 않을 수 없었다. 해방 무렵 서당의 학생수는 15명. 글공부가 좋아 대학이나 주역처럼 어려운 서책까지 외웠던 그에게 커다란 계기가 찾아 왔다.



    상좌(上佐) 한명을 데리고 전쟁을 피해 합천 산골까지 와 서당에 몸을 맡긴 스님이 서당 선생과 밤새 뭔가를 토론하던 것이었다.



    “유심론이니 유물론이니 하는 말이 들려왔죠.” 그 대화에 빠져 숨죽여 귀 기울이던 그는 스님이 선생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는 데 놀랐다. 또 그 스님이 전쟁을 피해 산골까지 왔다는 말을 듣고 더 놀랐다. 그의 고향은 그만큼 첩첩산중이었던 것이다.



    이후 경남향교재단의 추천으로 성균관대에 입학한 선생은 엄청난 분량의 한학 공부 덕을 톡톡히 봤다. 고교시절에 이미 ‘학생계’에 시가 당선된 터, 대학시절에는 현대문학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 잡지ㆍ언론사 주최의 작품 공모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 소시적 쌓은 선연(善緣)이 청년기에 다시 살아 났다. 대학 입학후 금강경을 배우러 종로 대각사에 가보니 바로 그 스님, 소천거사(韶天居士)와 맞닥뜨린 것이 아닌가. 스님은 한때 출가했던 시인 고은의 친구라는 사실도 그때 알게 됐다.



    훗날 고은 시인과 안국동에서 만난 선생은 시인으로부터 소천거사가 세상을 떴다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된다. “이거 옛날 이야기 하다 보니 생각지도 못 했던 일이 자꾸 떠오르네. 허허.” 선생은 그렇게 옛 이야기를 전했다.




    대학졸업후 민완기자로 필명 날리기도





    대학졸업후 ‘신태양’, ‘명랑’ 등 인기 잡지에서 기자로 활약한 선생은 연예인은 물론, 조병옥 김도연 민관식 등 당대 거물 정치인들과 인터뷰를 따낸 민완 기자로 필명을 날렸다. 잡지 기자와 한양대 국문과 강사 일을 겸해 오다, 48세때 당시 막 문을 연 정신문화연구원과 연이 닿았다. 한문 실력이 월등했던 선생에게 맡겨진 일은 당연히 고전 번역 연구실 업무였다.



    교수의 길은 56세때 열렸다. 당시 동양철학과를 삼분해 동양철학과ㆍ한국철학과ㆍ유학과로 막 나누었던 성대측은 박람 강기한 성리학자로 이름을 얻고 있던 그를 유학과 부교수로 모셔 온 것이다. 그는 성균관대에서 사서삼경 등 유교경전을 가르치는 데 주력했다.



    당시 유교의 현대화란 참신한 테마로 펼쳤던 강의가 소문 나자, 주간한국은 ‘명강의 명교수’라는 난에 그를 집중취재하기도 했다. 이밖에 ‘김한길과 사람들’, ‘강석경과의 대담’ 등 인기 토크쇼에서도 그를 어른으로 모셨다. 마지막 서당 세대라는 정통성에다, 당대의 요청과 이슈에 대해 진중하게 언급해 온 선생에 대한 온당한 대우라 할 것이다. 대학은 선생을 유학대학원장, 성균관장 등의 자리에 모셨다.



    종아리에 굵은 줄이 생기도록 회초리를 맞아 가며 공부하고도 책을 다 떼고 나면 시루떡을 해 와 나눠 먹던 공동체적 관습은 사라진 지 오래다. 선생이 학생에게 손 한 번 댔다 해서 폭행 혐의로 고소하느니 마느니 난리를 쳐 대는 요즘 아닌가.



    이 강퍅한 시대, 과연 유교적 가치관은 시효만료의, 곰팡내 나는 유산일 뿐인가 하는 문제를 곱씹어 볼 것을 선생은 요청하고 있었다. 정명(正名), 즉 사회 성원이 자신의 소임을 다 해야 한다는 유교적 사상은 우리 시대가 더욱 귀 기울여야 할 가르침이라는 지적이다.




    유교적 가르침은 미래의 도덕





    선생은 요즘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더 많다고 본다. 바로 유교의 현대화다. 너와 나의 관계에 최대의 주안점을 두는 유교적 가르침은 미래의 도덕이라는 믿음이다.



    특히 최근 종교ㆍ지식인들의 공통 화두가 된 생태문제도 전통 사상에서 이미 그 해법이 제시돼 있다는 지적이다. 1993년 한국불교사회교육원에서 펴낸 ‘한국의 전통속에 나타난 환경 윤리’ 같은 선생의 저작은 우리 시대에 무척 많은 말을 하고 있다.



    선생은 딸만 다섯을 두었다. 그 중 북경대에서 주자를 연구해 박사 학위를 따 낸 뒤, 서강대에서 강사로 재임중인 복희(32)씨는 아들보다 귀한 존재다.



    인터뷰 말미, 선생으로부터 귀한 상식 하나를 얻었다. 민족의 전통적 생활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청학동의 생활 방식은 정통 유교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 아니라, 경정유도(更正儒道)라는 일종의 신흥 종교라는 사실이었다. 이래저래 정통 성리학이 설 땅은 좁아져 가고 있다.



    우리 시대가 유학으로부터 취해 마땅한 가르침 하나를 청했다. 잠시 생각하던 선생은 추기급인(推己及人)이라 일필휘지했다. “내 마음을 미뤄 남을 헤아린다는 뜻이지요.” 그것은 곧 서(恕)의 정신이라고 선생은 덧붙였다. 용서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선생의 지적대로 파괴와 증오의 우리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추기급인’ 할 수만 있다면… .



    ‘논어’의 자로(子路)편에 나오는 말이다.



    장병욱 차장 aje@hk.co.kr


    입력시간 : 2003-10-02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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