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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02 16:56:17 | 수정시간 : 2003.10.02 16:56:17
  • [재즈 프레소] 환갑에야 이룰 유영수의 꿈






    지금으로부터 30년도 더 지난 22살 무렵, 한국 록의 태동기였던 당시 그는 미 8군내 클럽 전속 밴드(하우스 밴드)의 드러머로서 스틱을 휘두르고 있었다. 미국의 인기 그룹 템테이션즈를 모방하던 데서 출발한 그의 드러밍은 이후 더 갈고 닦아져 일류 가수들의 부름을 받게 됐다. 그것은 생활의 방편으로 택한 길이었다.



    그러나 그는 꿈을 잊지 않고 있었다. 언젠가는 재즈 드러머라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더 늦기 전에 후대에 남길 작품 하나 정도는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이었다. 유영수(58)씨가 꿈에 도전하고 있다.



    “한국 드러머만 7~8명 모아, 드럼만으로 된 앨범을 하나 낼 계획입니다.” 드럼통의 장력을 조절하면 마치 팀파니처럼 드럼도 멜로디를 구사하는 악기가 될 수 있다는 데 착안했다. 보통 흔히 보는 멜로디 악기에서는 접할 수 없는 새로운 매력이다.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가까운 선후배 드럼 주자한테 이야기 해 보니 모두들 좋다고 하더군요.” 쳇바퀴 돌 듯 하는 일상에 쫓겨 선뜻 말을 못 했을 뿐이었다.



    아쟁, 트럼펫, 색소폰 등을 넣어 합주로 해보자는 의견도 나왔다. 그러나 드럼이 선율을 따라가는 음악이 될 것 같아,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신, 재즈적 스캣이나 국악적 구음(口音) 등 가사 없는 인성(人聲)을 넣어 볼 생각이다. 그는 이를테면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입으로 뭔가를 소리 지르며 쭉 둘러서서 북을 합주하는 광경을 재즈적으로 재현해 내고 싶은 것이다.



    “60살 돼서 회갑 기념으로 발표하고 싶어요.” 지금껏 해 온 것들 가운데, 끝까지 가지고 가고 싶은 것은 재즈라는 말이다. 그 말 속에는 원로급이자 현역 재즈 드러머로 자리 잡기까지 감내해야 했던 ‘이중 생활’이 담겨져 있다. 생계용 음악과 예술 음악 사이에서 그는 줄타기를 계속해 왔던 것이다. 그는 “트로트나 디스코도 다 쳐내야 했다”며 “바로 이것이 프로의 세계”라고 말했다.



    국내의 대표적 가요 녹음실인 서울 스튜디오의 전속 드러머로, 마장동이나 이촌동 녹음실 등지의 드럼 세트를 달궜던 그다. 특히 그룹 해바라기의 히트곡에서 드럼은 거의 그가 담당했다. 그러나 항상 미진함이 남아 있었다. “뒤에서만 있어야 한다는 아쉬움말예요.” 색소폰이나 트럼펫 같은 화려한 솔로 악기 뒤만 받쳐 주다 세월을 보내고 마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그를 흔들어 깨웠다.



    세션 활동 틈틈이 국악쪽을 넘봤던 것은 자기 변신에의 탐색이었다. 먼저 1990년 사물놀이의 김덕수씨가 그를 불렀다. 사물놀이와 서양 드럼의 협연이라는 음악적 실험이 이뤄진 것이다. 이후 박범훈씨의 요청으로 국악관현악단과도 협연했다.



    국악적 재즈를 추구하는 세계적 프리 뮤직 연주자 강태환씨와 예술의 전당에서 가졌던 콘서트는 어쩌면 당연한 순서였다. 베이시스트 장응규도 가세한 트리오 협연을 통해 그는 재즈의 세계로 점점 빨려가고 있었다. 사실 오래 전 일이었다.



    그가 재즈에 마음을 뺐긴 것은 22살때 군산의 음반사에서 우연히 흘러 나오던 존 콜트레인의 재즈를 듣고 나서 였다. 그는 충격을 받았다. “저렇게 섬세한 리듬도 있구나 하는 사실에 가슴이 막 뛰더라구요.” 당시 서울은 물론, 군산의 미군 비행장에 달린 클럽에서도 연주하던 그는 남미 출신의 콩가 연주자 ‘미스터 수’에게 3년을 배웠다. 빠듯한 살림이었지만, 한달에 조니워커 블랙 1~2병씩을 수업료로 냈다.



    28세에 서울로 올라 온 그는 한국 재즈 뮤지션의 1세대인 고 이정식씨로부터 재즈의 모든 것에 대해 배워 나갔다. 월남서 군복무를 마치고 갓 돌아 온 색소폰 주자 김수열 등과 재즈 밴드를 만들어 무교동 스타더스트 호텔 나이트 클럽 등지에서 연주하며 기량을 쌓아 갔다.



    35~45살은 재즈와 가요, 양쪽의 수요를 감당하느라 바쁘게만 살았다. “연습에도 열심이었죠.” 당시 하루에 7~8시간씩 하던 연습량이 지금은 3~4시간. 태권도 4단 실력이 말해주는 체력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빗줄기가 흩나리는 6월 24일 저녁 7시, 그가 이끄는 트리오가 발라드 ‘Body & Soul’을 연주하고 있었다. 섬세하고 장식적인 피아노 선율에 맞춰 그의 드럼은 평소답지 않게 완전히 일신해 있었다. 스틱 대신 브러시를 잡은 그의 손끝에서는 공격적 드럼(하드 밥) 연주는 오간데 없고, 새털처럼 상큼한 리듬이 클럽의 공기를 들뜨게 하고 있었다. 기(氣)에 감춰져 있던 세(細)의 아름다움이었다.



    현재 그가 갖고 있는 최대의 관심사는 드럼 앙상블이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시도라, 참고할 만한 선례도 없다. 그는 “드럼만으로 대화를 나누려면, 적어도 6개월은 함께 기거하다시피 해야 가능한 일”이라며 굳은 각오를 내비쳤다. 스틱을 쥔 손에 힘이 들어 간다.



    장병욱 차장 aje@hk.co.kr


    입력시간 : 2003-10-02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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