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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02 16:57:56 | 수정시간 : 2003.10.02 16:57:56
  • [추억의 LP여행] 현인(下)
    해방 후 국민가수로 우뚝 한 시대 풍미한 무대의 삶



    1947년 고려영화협회는 해방 후 최초의 영화 '자유만세'를 명동 시공관에 올렸다. 현인이 소속된 악단을 초청한 것은 관객 끌기 수법이었다. 바로 여기서 불후의 '신라의 달밤'이 발표됐던 것이다. 민족 해방을 감동적으로 그렸던 영화가 끝나자 현인의 노래 순서가 왔다.



    시원한 마스크와 독특한 바이브레이션 창법을 접한 관객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내 관객들의 기립 박수가 터지며 시공관은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이날 현인은 무려 아홉 번의 앵콜을 받았다. 공연은 열흘 이상 계속되었고 시공관은 '자유만세'를 보고 '신라의 달밤'을 들으려는 인파로 대성황을 이뤘다.



    이전의 가요와는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멜로디와 독특한 창법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그는 하루 아침에 대 스타로 떠올랐다.



    감격한 작곡가 박시춘은 명동 럭키레코드의 녹음실에서 '신라의 달밤' SP음반의 취입을 서둘렀다. 당시엔 가수뿐 아니라 세션맨 누구라도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동시 녹음 시대였다. 음반을 찍어낼 프레스가 없어 기름 짜는 기계를 개조해 사용했고 고물상들이 가져오는 고물 레코드를 녹여 하루 50장 정도의 레코드를 겨우 만들던 시기였다.



    판도 쉽게 닳아 몇 십 번 듣다 보면 거덜날 지경이었고, 난데없이 일본 노래가 튀어 나오기도 했다. '신라의 달밤' SP는 대단한 반응을 보였다. 충무로 입구의 본정 악기점에 몰려 든 시민들은 노래를 따라 부르고 배우느라 북적거렸다. 이에 럭키레코드 강운용사장은 또 다른 신곡 취입을 재촉했다.



    두 번째 곡은 '고향만리'. 일제시대 학병이나 징용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의 고향 그리는 마음을 노래한 이 노래 역시 대히트를 터뜨렸다. 첫 트롯 취입곡인 '비 내리는 고모령'은 부르기가 쉬워 '신라의 달밤'을 능가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 이름도 없던 작은 고개 고모령을 명소로 탈바꿈 시켰다.



    1991년 10월 대구 수성구의회 개원기념으로 노래비까지 건립된 명곡이다. 당시 노래비 건립 사실을 현장 취재하던 한국일보 사진부 김문호기자가 열차에 치어 순직하는 안타까움이 간직된 노래 비이기도 하다. 이후 '서울야곡', '꿈속의 사랑' 등 그의 노래는 발표하는대로 히트 퍼레이드를 벌였다.



    혜성과 같이 나타나 최고 인기 가수로 떠오른 현인은 1948년 해방 후 최초의 음악영화 '푸른 언덕'에 주연 배우로 발탁되었다. 상대역이었던 신인여가수 김은희와 사랑에 빠져 동거에 들어갔던 현인은 전쟁 와중에 헤어졌다.



    1949년 부친이 세상을 떴다. 귀국해서도 한번도 뵙지 못했던 부친에 대한 불효에 오열했던 그는 장례식 후 한동안 노래를 접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KPK 악단장 김해송씨의 제의로 무대에 다시 섰다.



    1950년 6월 27일 아침. 한국전이 터진 후 그는 경기도 광주의 산골과 집안 다락방에서 숨어 지내며 인민군의 눈을 피했다. 9ㆍ28서울 수복 후 잠시 박춘석 악단과 함께 부평 미 제 1해병사단의 무대에 올랐지만, 1.4후퇴 때 또다시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당시 오리엔트 레코드사의 이병주 사장은 현인에게 박시춘 작곡ㆍ강사랑 작사의 '굳세어라 금순아' 취입을 제의해왔다. 한쪽 벽이 무너진 대구 KBS에서 가마니로 방음장치를 해 녹음을 했다. 부산에 온 수많은 피난민은 물론, 전쟁의 아픔을 겪고 있던 국민들은 그의 노래에 큰 위안을 얻었다.



    피난 시절에도 현인은 자유극장, 대구극장 무대와 군부대 위문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가끔 부산으로 원정 공연을 가 '굳세어라 금순아'를 부르면 객석은 매번 눈물 바다를 이루곤 했다. 악극단 '호화선'은 동명의 악극으로 거듭나기도 했다.



    1953년 대구에서 현인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을 재건하자는 노래 '럭키 서울'을 취입해 한줄기 희망의 빛을 선사했다. 서울로 돌아와서는 한국은행 뒤에 '다리봉' 다방을 열며 노래를 잠시 접었지만 실패하고 박시춘의 '은방울쇼단'에 합류했다. 당시 '남인수 대 현인-가요 대합전 15회전' 무대는 장안의 최고 인기 무대로, 현인은 남인수의 인기에 버금가는 라이벌로 재등장했다.



    1957년 명창 박녹주의 질녀인 박정혜와 두 번째 결혼 후 삼남매를 두었지만 5년을 넘기지 못했다. 이후 1959년 봉봉쇼단을 만들어 전국 극장들을 돌았지만 사업수완이 신통치 않았던 그는 6개월만에 파산했다.



    그는 1960년 한국일보주최로 시민회관에서 열린 프랑스 샹송가수 이베트 지로의 내한공Э?게스트로 출연해 여전한 노래실력을 과시했지만 1962년 경쟁자였던 남인수의 사망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40대 중반이 된 그는 퇴역 가수 취급을 받았다. 의기소침해 있던 현인은 1968년 15년 연하의 팬이었던 임소연과의 동거에 실패, 1974년엔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떠났다.



    1978년 3대 미스코리아 출신 김미정과 세 번째 결혼 후 클럽 가스라이트 등의 사업 부진을 거듭하다 81년 귀국을 했다. 귀국 후 배삼룡, 남진등과 함께 98년부터 악극 '그때 그 쑈를 아십니까'에 참여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던 현인은 2002년 4월 13일 지병인 당뇨병으로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국민 가요가 된 '신라의 달밤'은 최근 동명의 영화에서 리메이크 되어 젊은 사람들에게 크게 어필했다. 클래식을 전공하고도 대중가수가 된 그의 음악 여정은 시대를 앞서 간 개방적 사고 방식 덕분이었다. 풍류객 현인은 격동의 한국 현대사와 더불어 민족의 애환을 어루만지는 대중가요는 물론 각 국의 월드 뮤직을 최초로 이 땅에 수혈했던 국민가수로 기억될 것이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입력시간 : 2003-10-02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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