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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02 17:16:24 | 수정시간 : 2003.10.02 17:16:24
  • [역사 속 여성이야기] 신사임당
    스스로의 삶에서 참다운 모범 보인 '홈스쿨의 대모'



    신사임당의 '수박과 들쥐'





    서울 강남의 집값이 천정부지로 뛰어 오르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상승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맹모삼천지교를 가슴에 아로새긴 한국의 많은 어머니들의 교육열도 한몫을 당당히 한다고 한다.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 라면 땡빚을 내서라도 좁아 터진 강남의 아파트로 이사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너무도 당연히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 라면 모든 희생을 감수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자기 개발 마저 포기해버린 어머니가 과연 현명한 어머니일까? 성장한 자식이 그런 어머니를 볼 때 과연 좋은 어머니였다고 생각해줄까?




    실생활에서 모범을 보인 어머니





    신사임당(1504~1551)을 모르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신사임당은 16세기 사람으로 사임당(師任堂)이라는 칭호는 고대 중국의 현모양처로 알려진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을 계승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한국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그녀는 오랫동안 군림 해왔다.



    특히 조선 최고의 학자이자 관료로 역사에 뚜렷한 획을 그은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고 보니 그녀의 자녀 교육법은 더욱 주목이 되기도 한다.



    율곡 이이쯤 되는 아들을 두었으면 그녀의 교육열이나 자기희생은 진정 강렬하였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가 그다지 뚜렷한 족적을 남긴 사람이 아니고 보니 아들 율곡 이이에게 매달려 죽자 사자 ‘너만이라도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하느니라’ 강요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율곡 이이에게 좋은 스승을 만나게 해주기 위해서 한양의 교육 요지에 집을 구해서 독선생을 모셔놓고 공부를 시켰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신사임당은 4남 3녀의 자식을 모두 강릉의 친정에서 낳았고 친정에 더부살이하며 자식들을 길렀다. 남편 이원수는 과거 응시생으로 아내와 자식을 처가에 맡겨둔 채 서울에서 기거하였다. 아버지도 부재중인 상태에서, 외가의 눈치를 보며, 한양에 비해 현격히 떨어졌을 것이 분명한 강릉의 교육 환경 속에서도 사임당의 일곱 자녀는 무럭무럭 자라 모두 조선 최고의 선비, 당대 최고의 현숙한 부인이 되었다.



    비결이 무엇일까? 강릉의 바다와 자연이 사임당의 일곱 자녀들을 키운 것일까? 그런 것도 있을 것이다. 격식과 체면을 차리는 한양의 양반생활에 비해 비교적 자유로운 강릉의 생활이 어린아이들에게 정서적인 토양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와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현명한 어머니, 신사임당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사임당은 자식과 남편을 자연스럽게 방목하면서도 스스로의 삶에서 참다운 모범을 보였다. 그녀 스스로가 부모에게 더할 나위 없는 효녀였고, 언제나 올바른 행동을 보여주었으며 여성이라는 굴레에 속박 당하지 않고 책을 곁에서 놓지 않았다. 실제 생활에서 학문을 닦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녀의 일곱 자녀들에게는 배움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치지 않은 자기 개발









    현모양처라는 이름의 그늘에 가리워져 신사임당이 뛰어난 화가였다는 사실은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그녀는 조선 중기 화단에 뚜렷한 자기의 이름을 남긴 당당한 화가이자 조선 제일의 여류 화가였다.



    7세부터 시작했던 그림 공부를 그녀는 결혼과 출산, 육아의 기간동안에도 멈추지 않았다. 현재까지도 전해 오는 신사임당의 그림을 보면 여성스러운 섬세함과 더불어 사물을 객관적이고 치밀하게 관찰하고 표현하는 점이 뛰어나다. 그림을 그리는 어머니 곁에서 창작열과 사물을 관찰하는 정확한 눈을 배우면서 그녀의 일곱 자녀들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정진하는 성피?삶의 태도를 鱇튼Ю?것이다.



    더불어 신사임당은 당시 여성들은 거의 가까이 하지 않던 한문 경전을 공부하여 남편 이원수와 시시때때로 학문적 토론을 일삼았다고 한다. 문헌에 전해오는 신사임당과 남편 이원수와의 토론 장면 중에는 신사임당이 온갖 경전들을 두루 섭렵하여 남편과 토론할 때 조금도 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들 율곡 이이가 말하는 어머니 신사임당에 대한 회고에도 아버지가 실수를 하면 어머니가 이를 긴히 간하여 바른길로 인도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부부가 당당하게 토론하며 학문을 함께 닦아 가는 가정 속에서 어떻게 자녀들이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신사임당과 남편 이원수의 모습은 다정하면서도 학문적으로 서로 경쟁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자녀들에게도 은근한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다.




    자녀를 위해 희생하기보다는 함께 성장한 여인





    신사임당은 나이 46세에 세상을 등진다. 율곡 이이가 아직 청소년 시기였을 때였다. 율곡 이이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충격을 이기지 못해 한때는 머리를 깎고 절로 들어가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어머니와 자식의 끈이 그토록 끈끈하고 강렬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신사임당이 자녀들을 위해서 무조건적인 희생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신사임당과 그녀의 자녀들은 어머니와의 정서적 학문적 교감을 통해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 이전에 인생의 스승이자 친구로서 서로를 거울삼아 성장했던 것이다.



    율곡 이이가 수운 판관이 된 아버지를 따라 평안도에 가 있을 때 신사임당은 병중에도 아들 이이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아들의 성장을 독려하고 정서적으로 학문적으로 공감하였다. 두 사람의 편지 글 속에는 모자간의 애정을 넘어서 학문적 동지로서 서로 성장해 가는 모습이 담겨있다.



    자식을 위해서 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고 ‘남이 잘못 되도 내 자식만은 잘 먹고 잘 살아야 돼’ 라고 생각하며 부정이라도 저지르고 마는 것이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모성애라는 것은 그렇게도 강렬하고 대단한 것이로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적지 않을터이다.



    그러나 신사임당을 삶을 보자. 그녀처럼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정말 참다운 자녀교육이 아닐까? 혹시라도 자식을 위해서라며 한번쯤 눈감았을지도 모를 옳지 못한 행동과 엄청난 자기 희생이 어쩌면 자식을 더 망치는 일일지도 모른다.



    강남으로, 어디로,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환경을 마련해주려고 혈안이 되기보다는 진정으로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기를 바란다면 어머니 스스로가 바르게 살면서 자기 개발에 힘쓰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limpid7@msn.com


    입력시간 : 2003-10-02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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