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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02 18:11:59 | 수정시간 : 2003.10.02 18:11:59
  • [스타탐구] 배종옥

    깊이 더해가는 열정의 원숙미
    맛깔스런 내면 연기, 세월이 만든 쿨한 자신감














    결코 말랑말랑한 인상은 아니다. 말 한번 잘못했다가는 ‘박살 나겠구나’ 싶을 만큼 당돌한 눈빛, 똑 부러지는 말투는 분명 강한 여자일 거라는 냄새를 풍긴다. 방송작가 노희경의 ‘페르소나’이자 도회적인 커리어 우먼의 대표 이미지인 배종옥. 실제의 그도 그렇게 고집스런 완벽주의자 일까?



    여자들이 좋아하는 여배우는 대략 비슷한 공통점이 있다. 내숭이나 연막으로 자신을 과잉포장하지 않지만 갈망하고 동일시하고 싶어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배종옥 역시 여자들이 좋아하는 여배우 중의 한 사람이다. 빠른 속도의 하이톤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뱉는 그의 말투에는 가식적인 따뜻함, 의도적인 예의바름, 배타적인 차가움도 없다. 딱 배종옥만큼 솔직하고 진솔하다.



    중앙대 대학원 연극영화과 석사논문 주제도 ‘배우들의 화술(말하는 법)에 관한 연구’라니 할말 다 했다.



    1985년 KBS 특채로 데뷔해 연기자의 길로 접어들었는데 비음 섞인 그의 목소리는 당시만 해도 적잖이 거슬리는 콤플렉스였다. 주위에서는 “그런 목소리로 어떻게 배우를 하느냐. 일찌감치 딴 길을 알아보라”며 진지하게 충고해주는 선배 연기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웬걸? 보란 듯이 드라마 ‘노다지’에 주연급으로 캐스팅돼 주목을 받더니 쇼 프로그램 ‘젊음의 행진’ MC, 라디오 ‘가위바위보’의 DJ까지 척척 맡아 맛깔스런 진행 솜씨를 뽐냈다. 여 배우라고 꼭 간드러지는 부드러운 미성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걸 인기로 증명했다.




    벗는게 싫어 영화 멀리했던 그녀





    “벗는 게 싫어서요.” 한동안 스크린에서의 활동이 뜸했던 이유를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다. 1992년 작 ‘걸어서 하늘까지’이후 최근작 ‘질투는 나의 힘’이 개봉되기 까지는 딱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그는 1997년 작 <깊은 슬픔>은 ‘본격적인 영화’ 이력에서 제쳐 놓는다) 몇 편의 드라마를 끝내고 간간히 쉬는 동안에도 시나리오는 계속 들어왔는데 죄다 벗는 연기 투성이었고, 그렇게 구미가 당기는 작품도 없었다.



    ‘질투는 나의 힘’에서도 애초 가슴 노출 장면이 있었는데 박찬옥 감독과 상의해 없애는 걸로 했다. 대단한 고집이다.



    “진정으로 자유롭지 않아서겠죠. 매일같이 헬스클럽에 가서 땀을 흘리는 것도 건강을 위해서지 벗기 위해서는 결코 아니에요.” 이처럼 보수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실제의 배종옥과 달리 ‘질투는 나의 힘’에서의 성연은 못 말리는 보헤미안적 인물이다. 화장기 없는 얼굴을 하고 훌러덩 훌러덩 옷을 벗어던지는 골초 아가씨.



    감독은 3~4일 세수도 하지 말고 능숙한 속담배를 피워줄 것을 요구했다. 덕분에 담배도 배우고 술도 원없이 많이 마셨다. 사랑의 열병에 사로잡혀 있을 때 조차 무심한 시선을 가진 그만의 건조한 연기는 대단한 호평을 받았고 ‘2002년 한국 영화 최고의 발견’ 이라는 칭찬까지 들었다.







    영화도 영화지만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배종옥은 사랑을 잘 이해하는 연기자 같다. 그것도 슬픈 사랑을. 그래서 그의 연기에는 언제나 뒷맛이 씁쓸한 사랑의 여운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거짓말’, ‘바보같은 사랑’에서 보여준 중심에 서 있지 못하는 사랑, 그래서 계산되지 않은 사랑, 끝이 보이는 사랑인줄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사랑은 ‘불륜’이라는 치명적인 위험 코드를 지녔음에도 그 설득력을 유지했다.



    사랑의 진정한 가치를 누구보다 소중하게 보듬는 그의 솜씨에 누구하나 분명한 외면과 비난을 퍼붓지 못했다. 배우로서의 ‘안정감’과 ‘섬세함’을 장점으로 인정받는 그의 연기가 제대로 발휘된 작품들이었다.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





    슬픈 연기만 잘하는 것도 아니다. 영화 ‘걸어서 하늘까지’의 무채색 냉소, 드라마 ‘왕룽일가’의 서민적 생명력,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의 망가지는 코믹함까지 배종옥의 연기 스펙트럼은 한가지 색으로 규정지을 수 없다. 천상 배우다. ‘분석적 배우’라는 말이 듣기 싫을 때도 있다. 때로는 가슴이 시키는 대로 연기하고 싶지만 그의 자연스러운 연기는 모두 다 치밀한 노력 끝에 나오는 산물이다.



    “넌 왜 스스로를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니?” 주위에서 자주 듣는 말이다. 일단 작품을 맡으면 극도로 예민해진다. 완벽을 추구하고자 하는 지나친 자의식도 문제다. 그래도 시간이 흐를수록 연기와 실생활이 여유로워지는 것 같아 다행이다.



    ‘왕룽일가’를 찍을 때 이종한 PD한테 연기의 실체를 배우면서 많은 자신감을 얻었다. “당시만해도 선배 연기자나 연출가한테 연기를 배우는 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근데 요즘 연기자들은 매니저와 코디를 대동하느라 어디 얼굴 볼 시간도 없어요. 아쉬운 일이죠.”



    내년이면 그도 마흔이다. 불혹. 세상을 돌아보면서 살게 되는 나이다. “여배우로서 나이 먹는다는 것? 장점은 깊이가 생긴다는 것, 단점은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것이겠죠. 나이 먹는다고 무조건 연기가 좋아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배우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보는 시각이죠.”



    예전이 돌멩이 하나에도 큰 물결을 만드는 작은 연못이었다면 이제는 드넓은 가슴으로 스크린을, 브라운관을 품는 푸른 바다다. 최근 아침 드라마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에서 보여주고 있는 이혼녀이자 미혼모인 차문경 역할만 봐도 세월과 함께 깊숙해진 그만의 내면 연기를 엿볼 수 있다.



    실제로 혼자 딸을 키우고 최근 모친상까지 당하는 등 결코 녹록치 않은 삶을 살고 있지만 배종옥은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씩씩하다. 속이 빤히 보이는 엄살이, 이유없는 유약함이 없어 좋다. 시간이 흘러도 오늘날의 이 쿨한 자신감을 잃지 않는 진짜 멋진 여배우로 우리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의 10년 후가 문득 기대된다.



    김미영 자유기고가 minju@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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