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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02 18:15:38 | 수정시간 : 2003.10.02 18:15:38
  • [추억의 LP여행] 박찬응(下)










    1973년 봄, 연세대 교정 잔디밭에서 열린 박찬응, 박두호의 콘서트 무대. 우연하게 신촌에 갔던 김의철은 공연 소식을 듣고 그곳을 찾았다. 레오나드 코헨의 '조노박'을 허스키 보컬로 이야기하듯 토해내는 여대생 포크 가수가 있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허스키였다.



    1971년 고2 여름 방학 때 강원도 북평의 추암 바닷가에서 작곡했던 '섬아이'의 주인공과 딱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바로 내가 찾던 목소리를 찾았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꼈다“고 그는 기억한다. 공연 후 명동 내쉬빌 음악감상실로 가는 박찬응의 뒤를 무작정 따라오는 부리부리한 눈의 소년같은 남자가 있었다.



    박찬응은 “서울서 내려 온 도시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해 물끄러미 바라만 보다가 잠이 든 외로운 섬소년의 꿈을 이뤄주고 싶어 만들었다’는 자작곡 '섬 아이'를 들려 주던 김의철로부터 '섬소년이 돼 달라'는 청을 받았다"며 당시 그녀는 “외국 곡을 능가하는 우리 곡이 있다면 부르겠다”며 포크송 작곡가들에게 늘 쓴 소리를 늘어 놓던 차였다.



    그녀는 음악밖에 모르던 김의철과 그가 작곡한 '섬아이'에 홀딱 빠져 버렸다. 이후 매일 그의 집을 찾아가 노래 연습을 하며 어울렸다. 김의철은 박찬응을 위해 '평화로운 강물'을 하나 더 지어 주었다.



    김의철의 음악성을 진작에 알아 본 성음 나사장은 '최연소 작곡가의 음반이 될 것'이라며 “녹음 해 두자”는 제의를 해왔다. 이에 가슴이 두근거렸던 김의철은 박찬응, 이정선, 김영배 등 음악 동료들에게 코러스와 세션을 부탁했다. 마장동 스튜디오에서 녹음에 들어가는 날 박찬응은 감기가 심하게 걸려 노래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에 녹음 날짜 변경을 요구했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간신히 '섬아이' 녹음을 마치고 '평화로운 강물' 녹음에 들어갔다. 결국 2절 후렴 '강물을 벗삼아' 대목에서 '강을 새'로 잘못 불러 재빨리 바꿨지만 '생물을 벗삼아'로 녹음이 되었다. 이에 재녹음을 청했지만 더 이상의 기회는 없었다. 녹음은 단 한번에 끝났다.



    이에 김의철은 실망감을 보이는 박찬응에게 “감기가 걸려 오히려 느낌이 더 좋았다”고 위로했지만 그녀는 “더 잘할 수 있었다”는 아쉬움이 가시질 않았다.



    1년 뒤 기독교 방송 김진성 PD로부터 “음반이 나왔는데 두 곡이 모두 창법 미숙으로 금지가 되었다”는 말을 듣자 기가 막히고 자존심이 상했다. '노래가 뭐 이러냐. 고약한 목소리는 갖다 버려라'는 말을 들은 그녀는 "당시 정치적인 탄압에 이력이 나 있었기 때문에 “감기가 들어서 그랬나 보다” 하고 무시해 버렸다"고 덤덤하게 말한다.



    하지만 박찬응의 재질을 뒤늦게 깨달은 성음 나사장은 "”양병집과 함께 조인트 음반을 내보자”고 제의해 왔다. 하지만 금지 조치로 자존심이 상했고 연예인 가수가 될 생각이 없던 그녀는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다. "암울했던 70년대는 에너지가 강했던 사람들에겐 괴로운 시절이었다. “여자로서 엉뚱한 손가락질까지 받았던 내겐 더욱 힘들었다. 정치적으로 민감했다기 보다는 인생과 예술, 특히 음악과 연극에 취해 내 멋대로 살았다”.



    1974년 여름, 친구 박경애가 '함께 국악을 배우자'고 해 창덕궁 앞 '김소희 학원'에가 김경희씨로부터 소리를 한달 간 공부했다. 이때부터 소리의 싹이 트며 자신의 목소리가 한국의 '소리 목'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반년 후인 75년 1월 하와이대로 유학을 떠났지만 소리에 대한 갈증은 증폭되었다. 결국 76년 정권진 선생에게 소리 강습을 받기 시작하면서 방학 때마다 귀국을 했다.



    그러다 소리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79년 완전 귀국을 했다. 그녀는 “금지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프로 포크 가수로 나섰을 지도 모른다. 사실 그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판소리로 빠졌을 수도 있다”고 털어 놓았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결혼해 아이 둘을 낳았지만 84년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남편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京?85년부터 서울 아카데미 외국인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중 지금의 남편을 만나 재혼했다. 89년 미국으로 다시 건너 가 하와이대에서 한국 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이후 95년부터 지금까지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한국학 교수로 재직하며 판소리를 통해 한국의 얼을 세계에 알려오고 있다.



    2003년 1월 '미국 이?100주년 기념 행사'에서 이주민들의 애환과 문화, 역사를 다룬 '1903년 박흥보는 하와이로 갔다'라는 그녀의 창작 판소리는 행사에 참석한 세계 저명 인사들의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최근 인터넷 포크 사이트 바람새 공연에 초청되어 30년만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를 포크 팬들은 열광적인 박수로 환영했다. 오랜 기간을 판소리 연구에 헌신해 온 그녀는 단 2곡뿐인 자신의 노래를 기억해 주는 팬들의 정성에 감동, 창을 섞어 한층 업 그레이드된 노래 솜씨를 뽐냈다.



    포크 가수에서 판소리 대가로 변신한 박찬응은 '앞으로 김의철과 함께 기타 소리극을 만들고 싶다. 판소리가 요모양 요소리여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고 싶다. 포크건 판소리건 장르에 구애 받지 않고 늘 새로운 소리를 찾아 공부할 것”이라며 자신의 자유분방한 예술관을 드러냈다.



    미국에서 건너 온 히피 한대수조차도 외계인으로 취급당하던 70년대 초반, 자유로운 영혼과 예술혼의 날갯짓에 목말랐던 박찬응은 한대수를 능가하는 숨겨진 토종 여성 히피였다. 단 2곡을 세상에 남겼을 뿐이건만, 이제 그녀의 노래는 30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뒤늦게 포크 팬들에 의해 재평가되고 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입력시간 : 2003-10-02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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