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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05 14:28:44 | 수정시간 : 2003.10.05 14:28:44
  • [갈매기 아빠의 여름나기] 잠 못드는 밤, 잠시 일탈을 꿈 꾼다
    해외연수 캠프에 가족 보낸 뒤 짜릿한 해방감







    가족만을 생각하고 일에 쫓기며 앞 만보고 달려온 40대 남성들.



    ‘고개 숙인 남자’로, 때론 ‘가시고기’의 애틋한 부정애로, 때론 황혼기를 준비해야 하는 ‘위기의 남성’ 등으로 내몰리지만 그들의 스케줄엔 잠시의 쉼표도 없다. 직장과 가정, 쳇바퀴 도는 일상에서 벗어나 푹푹 찌는 한 여름, 이들에게 1개월간의 ‘나 홀로’시간이 주어진다면 과연 가장 찾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최근 여름 방학 철을 맞아 자녀를 해외 어학연수 캠프에 보내고 뒷바라지를 위해 부인까지 함께 해외로 떠나 보내는 ‘기러기’가 아닌 여름 한 철 ‘갈매기 아빠’들이 늘고 있다.



    서울 강남 압구정동 G초등학교의 경우 이미 방학전인 7월초부터 한 반에 평균 10여명이 학부모와 함께 해외어학 캠프 참가를 위해 미국 등으로 출국했다. 또 EF국제언어학원 등 각종 어학원들의 초ㆍ중ㆍ고생을 대상으로 한 해외영어캠프 프로그램엔 부모들까지 참여하는 신청자들이 장사진을 이룰 정도다.



    한 1년 이상 장기간 자녀교육을 위해 해외에 부인마저 남겨놓고 국내에서 가족의 생활비 마련에 매달려 홀로 살아가는 ‘기러기 아빠’는 이제 남 얘기가 아닌 일곱 집 걸러 한 집인 이웃 얘기다. ‘기러기 아빠’의 전 단계로 ‘갈매기’정도로 불릴 여름 한 철 40대 독신 아빠들은 자녀의 어학 캠프가 끝날 3~8주 동안 싫으나 좋으나 ‘나 홀로’의 리듬에 맞춰 독수공방(?)의 시간을 채워가고 있다.




    넘실대는 유혹, 설레는 밤





    한 제조업체에 근무하는 이모(44)차장은 최근 중학교 1학년인 딸을 미국 LA 오렌지 카운티 한 지역대학에서 운영하는 영어학습 캠프에 보냈다. 3주코스의 초단기 어학프로그램이지만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점 때문에 혼자 보낸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마침 아이 이모가 LA에 살아 아내 역시 그곳에 머무르기로 해 1개월 여를 혼자 보낼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이 차장은 “솔직히 결혼 15년 만에 처음으로 맞는 독신생활이라는 점이 미묘한 기대감을 갖게 만들더라”며 “첫 2주일은 오히려 혼자라는 것이 홀가분했다”고 머쓱해 했다.



    그 동안 소홀했던 친구와 회사 동료들과의 잇따른 술자리 약속 등으로 오랜만에 늦게 귀가해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마음 편했다. 영화 ‘쉘 위 댄스’에서 40대 중년 남자 주인공이 댄서 여 강사에게 연정을 느끼고 가슴을 졸이듯 한 여름 밤 남모를 로맨스를 꿈꿔보는 것은 억제할 수 없는 본능.



    이 차장 역시 그 동안 갇혀있던 감성이 꿈틀 대는 것을 발견하고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밤에는 또 누굴 만날까” 약속잡기에 지칠 수도 있지만 긴 여름 밤 40대의 수다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 마다 한층 현란해지고 총기(?)를 더해갔다. 약간 벗겨진 머리지만 생전 처음 무스를 발랐다. 유혹도 넘실거린다. 여운만 남기고 뿌리치기란 어려운 유혹들이다.



    그 동안 잊혀졌던 자신의 젊은 감성이 새록새록 살아나는 느낌, 그대로 였다. “부라보~ 부라보~ 마이 라이프(my life) 인생아~” 어울려간 가라오케에선 세월 지난 옛 레퍼토리의 곡을 부른다는 것이 창피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신곡 하나쯤은 익히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들뜬 기분은 3주를 채 넘기기 힘든 법. 쓸 데 없이 흥청망청 시간과 돈을 낭비하며 인생에 한 번 찾아오기도 힘든 40대의 ‘나 홀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



    하지만 3주간의 ‘광란의 밤’을 지내고 나자 지친 몸을 이끌고 불 꺼진 아파트에 홀로 들어가기란 싫었다. 늦은 밤, 대낮일 미국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심정이 굴뚝 같았다. 아내와 딸의 사진을 보면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이 차장은 겨우 참았다. 이 차장은 장기간 가족과 떨어져 사는 ‘기러기아빠’의 고충을 십분 이해할 것 같았다. 잠깐의 로맨스가 자기관리 없이는 탈선으로 이어지는 이유까지도.




    "인생 후반기 설계할 소중한 시간"





    “나~ 돌아갈래.” 영화 ‘박하사탕’에서 마지막 외침의 여운은 아직도 386세대인 40대 남성들의 가슴을 저민다. 한 증권회사에서 조사담당 임원인 김모(43)이사는 지난해?이어 올해 여름에도 중ㆍ초등 학생인 자녀 2명을 아내와 함께 미 샌프란시스코로 보내고 52평 아파트에서 여름을 홀로 지내고 있다.



    증권업계가 다 그렇듯 40대 즈음이면 심각하게 자신의 다음 진로를 준비해야 하는 조로화에 휩쓸려 김 이사도 남다른 고민에 쌓여있다. 빠르게 변하는 시황에 맞춰 바쁘게 생활하며 소진할 대로 소진해 버린 자신의 생활에 염증을 느낀지는 이미 오래다. 같이 살면서도 저녁시간 아이들과 제대로 대화 나누기도 급급하게 쫓기는 생활에서 자신을 잃고 살았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



    김 이사는 지난해 여름 ‘나 홀로’ 시간을 회사 일에 매달리고 주말엔 친구들과 술 마시고 골프를 치며 어영부영 보냈지만 올해 여름은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기회로 삼고 있다. 인생에서 한번 숨을 고르는 기회로 다지겠다는 결연한 각오다. 일을 마치면 영락없이 헬스클럽을 찾아 열심히 땀을 흘리며 잡념을 떨쳐버린다. 그는 40대 중반을 앞둔 증권전문인으로 향후 진로는 물론 펀드매니저로 앞으로 자신의 금융 부티크 개업을 구상중이다.



    결혼생활 15년에 서먹서먹해진 아내와의 해후, 조기유학을 준비중인 자녀들과의 관계 개선, 유학비를 충당할 장기 재무계획 등 남편으로, 아빠로 홀로 곰곰이 생각할 일이 너무 많다. 잠이 오지않아 이리저리 뒤척이다 보면 손에 든 황석영의 소설 ‘삼국지’가 이미 절반을 넘어섰다.



    김 이사는 “이젠 불혹(不惑)을 넘긴 나이에 내 자신을 돌아보고 인생 후반기를 본격적으로 설계할 시기”라며 긴 여름 밤 상념에 빠져든다.



    서울 강남 청담동에서 치과를 운영중인 최모(45)박사는 요즘 “일에 미쳤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최 박사는 여름방학을 맞아 캐나다로 연수를 떠난 부인과 아들에 대한 향수를 잊기 위해 영어회화 학원을 등록했다. 새벽에는 영어공부에, 밤에는 치과의학 학술관련 프로젝트에 매달리고 있다.



    “집에 가야 아무도 없어 쓸쓸함만 더하잖아요. 술을 마시면 폭음을 하게 돼 이대론 안 될 것 같아 2주전부터 바쁘게 살아갑니다. 새벽에 학원에서 영어회화를 배우고, 밤 늦게까지 치과에 남아 책을 봅니다. 정신없이 공부하고, 일하다 보면 나만 혼자 남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최 박사는 아들이 참가하고 있는 8주코스의 어학연수과정이 끝날 때쯤 캐나다 토론토를 방문해 가족들과 여행을 함께 하고 귀국할 계획이다.




    가족의 소중함 깨달아





    아스팔트도 녹아 내리는 여름의 도심에서 ‘나 홀로’ 지내야 하는 40대 ‘갈매기’들의 밤은 남달리 길다. ‘나 홀로’의 외로움은 단지 일순간의 감정일 뿐 가족의 소중함을 가슴에 부둥켜 안고 있는 이상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갈매기 아빠’들에게도 탈출구는 필요하다. 어떤 이는 골프, 인라인 스케이트, 산악 자전거(MTB) 동호회 등에 참여, 활기찬 취미 활동을 통해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며 외로움을 잊는다. 또 어떤 이는 인생의 황혼기를 대비해 새로운 목표를 설정, 그 발판을 다지기 위해 홀로의 시간에 최선을 다한다.



    약간의 로맨스와 잠깐의 실수가 있더라도 가족을 항상 가슴속에 파묻어 두고 사는 그들에게 일탈이란 극히 순간이다. 돌아 갈 곳을 아는 여름철 갈매기는 외롭지 않다.



    장학만기자 local@hk.co.kr


    입력시간 : 2003-10-05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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