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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05 15:11:39 | 수정시간 : 2003.10.05 15:11:39
  • [추억의 LP여행] 이미자(上)
    트로트 40년의 역사 영원한 '동백아가씨'





    결코 화려하지 않은 외모지만 노래만큼은 최고였다. 타고난 미성에 꾸밈없는 그녀의 애절한 창법은 듣는 이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었다.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목소리’로 추앙 받는 이미자에게는 엘레지의 여왕, 살아있는 트로트의 역사, 국민가수라는 찬사가 늘 따라다닌다.



    대표 곡은 역시 ‘동백아가씨’. 최초로 100만장 음반판매시대를 연 영광스런 노래이건만 한동안 왜색(일본풍)가요로 금지의 낙인이 찍혀 깊은 좌절을 안겨준 곡이기도 하다. 하지만 40여 년 동안 500여장의 음반과 2,000 곡이 넘는 노래를 발표해 한국 최다음반, 최다 취입곡 가수로 기네스북에도 오른 이미자는 우리 가요사상 최고의 여가수중 한 명이다.



    이미자는 서울 한남동에서 1941년 7월 22일 을지로 화원시장에서 일했던 부친 이점성씨와 모친 유상례씨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불화로 4살 때 생모와 이별하고 할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60년대 당시 신문, 잡지에는 ‘6살 때부터 이미자는 서커스단에서 끼니를 굶어가며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99년 자신의 자전 에세이 ‘인생 나의 40년’에서 그녀는 그 기록이 사실 무근이라고 주장했다. 한남초등학교를 다니다 10살이 되던 해 한국전쟁이 터졌다. 그녀의 집안은 1.4후퇴 때 충남 예산의 한 초등학교에서 겨울을 났다. 이곳에서 생전 처음 콩쿠르에 나가 특별상을 받았을 뿐이다. 이후 부산 피난 시절 그녀는 국제시장 앞 동아극장에서 인기가수 백난아의 공연을 보면서 가수의 꿈을 품었다.



    국제시장의 노래 잘하는 아이 이미자는 주위의 소개로 미군부대 위문공연 무대에 올라 몇 개월 간 영어가사로 번안한 ‘아리랑’을 부르기도 했다.



    휴전 후 서울 계동으로 올라온 뒤 부친이 재혼을 해 다섯 명의 이복동생이 생겼다. 이미 6학년 나이가 된 그녀는 종로 YMCA자리에 선교단체가 천막을 치고 운영하던 학교와 청계천의 일성고등공민학교 중학교 과정을 거쳐 마포 문성여중고를 다녔다.



    여고 시절 국전에 정물화를 출품하고 규율부 단장을 맡아 시가행진을 벌이는 등 활달한 학생이었다. 당시 송민도, 나애심의 노래와 슬픈 영화들을 특히 좋아했던 그녀는 “학교 생활은 재미 있었지만 졸업해 가수가 되는 것만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당시 각종 노래 대회에 몰래 참가해 상품으로 큰 그릇, 대야, 양푼들을 받아왔다.



    2학년 말에 나간 KBS 라디오 노래자랑대회. 남산에 있던 KBS에 교복을 입고 갔다가 학생출전 불가라는 이유로 퇴짜를 맡자 다음날 새엄마 옷으로 갈아입고 출전을 하는 대담성을 보였다. 이때도 1등을 했다. 여고 졸업을 앞둔 58년 KBS보다 5년 먼저 개국한 최초의 민영TV 방송 HLKZ의 ‘예능 로터리’에도 출전해 최고상을 받았다. 입상을 계기로 화신백화점 카바레의 전속가수로 픽업됐고 이때 섹소폰 연주자 김경호로부터 악보를 보는 음악이론을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가수 남일해가 찾아와 KBS악단장인 작곡가 나화랑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나화랑은 그녀에게 라디오 쇼프로 ‘노래의 꽃다발’출연을 주선하고 59년 데뷔 곡인 ‘열아홉 순정’을 SP음반과 LP음반을 내 정식가수의 길을 걷도록 했다.



    하지만 출연료가 싼 오프닝 가수로 서울보다는 지방 무대를 더 많이 돌아다녔다. 그때는 고생의 연속이었다. 선배들 양말을 빨고 온갖 잔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한번은 지방공연을 갔을 때 여관방이 너무 추워 몰래 도망을 친 적도 있었다. 춥고 외로웠던 이 시기에 그녀는 콘트라베이스 주자인 정진흡씨를 만나 결혼했다.



    당시 스카라 극장 건너편 국제다방이나 신카나리아가 운영하던 모나미다방은 무명가수들의 집합소. 이미자도 이곳에서 일거리를 찾으며 몇몇 레코드회사를 기웃거리는 싸구려 가수였다. 그녀의 애절한 노래를 귀담아 두었던 작곡가 백영호의 추천으로 이미자는 전緞渦敾?맺고 ‘동백아가씨’를 취입할 기회를 가졌다.



    인기가수 최숙자 대신 그녀와 전속계약을 맺은 이유는 값싼 개런티 때문. 미도파레코드에서 독립해 모나미다방 뒤에 문을 연 지구레코드는 보따리 장수 수준의 신생 회사였다.



    64년 여름, 선풍기 한 대가 전부인 지구 레코드 녹음실. 임신 8개월 만삭의 무거운 몸으로 이미자는 찜통 더위와 싸워가며 녹음을 마쳤다. 당시는 최희준, 한명숙, 현미등 미8군 가수들의 전성시대. 7월에 ‘동백아가씨’ OST음반을 발매한 지구레코드는 인기 배우 최무룡의 ‘단둘이 가봤으면’을 타이틀곡으로 정했다.



    하지만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영화 ‘동백아가씨’가 온 나라를 울음바다로 몰아넣으며 흥행에 성공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타이틀 곡 은 뒷전이고 뒷면에 수록된 이미자의 노래 ‘동백아가씨’만 연신 방송에서 흘러나왔다.



    음반을 사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전국의 음반업자들이 음반을 구하기 위해 아우성을 치자 언론들은 ‘가요계 판도를 뒤바꾸는 일대 사건’이라고 흥분했다. 그렇게 무려 100만장의 음반이 팔려나간 ‘동백아가씨’는 35주 동안 인기차트 1위를 점령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무명가수 이미자는 일약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입력시간 : 2003-10-05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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