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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05 15:20:22 | 수정시간 : 2003.10.05 15:20:22
  • [석학에게 듣는다] 임동권 민속학자
    "민속문화는 우리의 지존"











    ‘일본의 대장군에 대해서도 더 많은 현지 조사를 해야 했으나 모조리 답사하지는 못 했다.’ 국한문이 혼용돼 있는 ‘대장군 신앙의 연구’의 서문 중 한 구절이다.



    민속학 전문 출판사인 민속원이 1999년에 펴낸 이 책은 일본의 장승이 한국에서 전래됐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힌 책이다. 8세기에 일본이 대궐에 장승을 세운 것은 백제 출신인 왕비가 향수를 달래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곳 학계에도 없는 대장군 일람표와 분포도를 작성해 놓고도 전부 다 하지 못했다고 밝혀 두는 민속학자 임동권(78) 선생을 준열하다고 해야 할까, 결벽하다고 해야 할까. 인터넷에 몇 차례 검색해 보고 없으면 오프 라인상에서도 부재하는 것으로 치부하고 마는 요즘 사람들의 감각으로는 상상도 못 할 시간이 그의 호리호리한 몸에 축적돼 있다. 책은 발표한 지 석달만에 일본 출판사에서 번역될 만큼 일본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선생의 거처는 고층 아파트다. 노인 둘만 있는 썰렁한 한옥이 싫어 이사 왔다는 서울 봉천동의 한 신축 아파트 16층이다. 바깥으로 눈을 돌리면 도시 풍경이 펼쳐져 있지만, 두터운 유리창 한장을 격해 있는 실내에는 과거의 시간으로 꽉 차 있다.



    부인 이정원(76)씨는 손자 보러 미국에 가 있어 집안이 뒤숭숭할 법도 한데, 모든 것들이 놀랄만치 제 위치에 있다. 민속학계의 태두로 여전한 현역인 그에게 엄청난 자료는 언제든 꺼내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7월 22일 일정만 보자. 오전 11시는 백제 문화 연구원에 가서 연내로 1차 간행 예정인 ‘백제문화총서’(전 20권)를 집필하고 편집 작업도 하고 왔다. 이어 오후 2시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의 ‘세시풍속사전’의 교열을 봐 주었다. 두 시간 뒤에는 국립박물관에 가서 일본인으로 김해 김씨의 후손인 가네코(金子)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민속학회의 산 역사





    한국과 일본에서 나온 민속학 관련 책자들, 발품을 팔아 모아 둔 민속 자료 더미는 언제라도 찾을 수 있게 정리돼 있다. 선비 부채, 무당 부채 등 6상자로 나눠져 있는 희귀한 부채는 거기에 비하면 약과라 해야 할 판이다. 중앙대 민속학과에 1만6,000여권을, 또 귀한 부채 300여점은 그 대학 박물관에 기증하고 남은 것들이다. 그가 명예 교수로 있는 학교다.







    “내 영양은 그것들이 다 빨아 먹었지.” 숫제 자식 이야기를 하는 어버이 말투다. 그 귀한 자료들은 여기 저기 ‘출가’ 시켰지만, 늘 곁에 둔 게 있다. 도서관에서 흔히 보는 목록 카드함에 보관중인 민요 카드 2만5,000여장이다. 1965년 한국일보에서 ‘향요(鄕謠) 문화 찾기 운동’을 펼쳤을 때, 민속학자 예용해 선생과 3년 동안 방방곡곡을 헤집고 다니며 수집한 민요 가사들이다. 각 카드마다에는 이런 것이 촘촘하게 씌어져 있다.



    ‘외씨 같은 딸을 두고/뭐가 불러(부러워) 장개 갔노/벼락이나 맞어 주소/첫날밤에 들거들랑/미야제야 병 나 주소.’ 1968년 12월 경북 영양군에서 김선희(당시 66세)에게서 수집했다고 깨알 같이 씌어져 있다. 미야제란 신랑의 사투리였으니, 재혼이 저토록 금기시되던 때도 있었나 싶다. 재혼요(再婚謠)란 항목에 일목요연하게 분류돼 있다. 그밖에도 보리타작, 어부가 등 분류 항목만 380개다.



    지천으로 널린 민요가 학문적 연구 대상이라고 아무도 생각지 못 했던 시절, 선생은 서울 수복 얼마 안 된 1953년부터 이 같은 작업을 해 왔다. 원래는 재미 있는 민요를 들으면 노트에 필기하는 식이었으나, 수효가 늘어가면서 나름의 카드 분류를 해 왔다.



    그러나 전쟁통에 망실되고 말았던 것이 수복과 함께 재개된 것이다. 곁에 두고 애지중지하는 이유가 절로 드러난다. 이들 민요 카드는 1961년 집문당에서 ‘한국민요집’전 7권)이란 이름으로 정리돼 나와 있다.



    그는 한국 민속학계의 산 역사다. 7권의 책은 79년 ‘한국灌時爻?繭?이름으로 독역된 데 이어, 95년에는 일본에서 ‘한국의 신화’로 번역됐다. 71년의 ‘한국민속학논고’는 84년 일본 ‘오푸샤(櫻楓社)‘ 출판사에서 ‘한국의 민속과 전승’이란 제목으로 번역됐다. 일본의 민속학자 구가야마(熊谷) 박사가 한양대 교환 교수로 왔을 때 이 책을 발견, 자신의 수업 교재로 쓰고 싶다며 제의해 온 것이다.




    공식문화권에 편입시킨 민속





    서울대와 난곡 일대를 굽어 보며 선생은 말을 이어 갔다. “분류학이 돼 있지 않으면 학문이 아니다. 우리 민속학은 선배도 없어, 내가 다 했다.” 민속학 관련 자료가 거개인 집안의 물건들 모두가 왜 그렇게 깔끔하게 정돈, 아니 분류돼 있는지를 선생은 은연중에 설명한 것이다. 64년 초대 문화재 위원으로 위촉된 이후 DJ 정부까지, 선생은 34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켜 온 최장수 문화재 위원이다.



    또 최연소였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던 민속을 공식 문화권에 편입시켜가며, 선생은 우리 고유의 민속 자산이 갖는 현재성을 동시대에 깨우쳐 왔다.



    어머니 나철민 여사로부터 모든 것은 비롯했다. ‘한국의 민담’(1972년)에 수록된 이야기 중 10여편은 어릴 적 어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어머니는 초등학교가 없던 청양군 장평면에서 6㎞나 떨어진 학교로 꼬박꼬박 아들을 보낼 정도로 규범을 중시했다. 선생은 한술 더 떴다.



    낡은 마루바닥으로 찬바람이 숭숭 들어 오는 겨울에도 양말을 신지 않고 보냈다. 그 같은 강단은 이후 제 2차 대전 때 끌려 간 텅스텐 광산에서 노동을 할 때는 물론, 훗날 민속학자로 민요 현장 조사(field work)를 하며 산천을 누빌 때 든든한 저력이 됐음은 물론이다.



    요즘 사람들은 입으로는 개성을 외치면서도 ‘트렌드’라며 서로 닮아가기에 급급하다. 그러나 윗세대에게는 자기 것에 대한 자존 의식이 매우 강했다. 천덕꾸러기에 지나지 않던 민요에 선생이 착목하게 된 것은 서울대에서 방언학을 가르치던 방종현 교수가 “아무도 연구하지 않는 민요를 해 보라”는 제안한 덕택이다.



    해방 공간의 어수선한 시기, 그는 필기 도구를 챙겨 제주도에만 20여 차례 찾을 정도였다. 전쟁의 상처가 생생하던 54년 국학대에서 국내 최초의 ‘민속학 개론’ 강의를 맡은 것이 대학 교단의 출발이었다. 뒷날 고려대로 흡수된 기억 속의 대학이다.




    발로 쓰고 발굴해낸 우리민요





    선생은 발로 썼다. 55년 하버드대 옌칭연구소가 한국 정부에 제주도 민속에 대한 연구를 부탁해 왔을 때, LSD에 캐비닛만한 녹음기를 싣고 간 것은 민속학 태동기의 아스라한 기억이다. ‘오돌또기’ 등 지금은 전국민이 아는 제주 민요가 바로 그 때 처음으로 녹음됐다. 토속 문화 행사로만 치부되던 강릉 단오제, 안동 차전놀이, 은산 별신제 등을 문화재로 지정한 것은 이론적 단련하의 숱한 현장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민속학을 연구하는 이상, 일본과의 만남은 필연적이었다. 선생은 61년의 일을 생생히 기억한다. “일본 학자들이 우리 민요를 연구한다며 휴대용 도시바 녹음기를 갖고 왔지요.” 당시 선생은 그 기계를 보고는 “미쳤다”고 한다. 학교로 온 그는 사방에 수소문, 당시 최대의 전파사였던 ‘기쁜소리사’에서 노트북보다 큰 휴대용 녹음기를 입수할 수 있었다. 단아한 풍모에서 불쑥 나온 격한 표현에 선생의 젊은 날이 성큼 다가 왔다.



    일본은 그렇듯 기술적ㆍ제도적으로 항상 앞서 있었다. 그들의 선진적 업적을 포용하며 우리의 민속학을 이끌어 온 선생의 경험은 한일관계에서 많은 것을 암시한다.



    63년 서라벌예대 학장으로 첫 방일한 그는 일본 학자들이 한국에 와서 조사하고 싶어도 남북관계에 치여 변을 당할까 봐 방한을 무서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나 한국 학자들은 너무 가난해 갈 수 없었다. 민속학을 하려면 20세기 초부터 인류학을 해 온 일본을 피해갈 수 없었던 현실속에서 선생은 일본을 끌어 안기로 했다. 72년 일본의 민속학자 8명을 초청해 원하던 대로 남도를 조사한 뒤 공동 조사로 이어졌다.



    “문화적 뿌리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똑똑히 확인한 일본학자들이 놀라던 모습이 아직 생생합니다.” 특히 대마도의 경우 무당의 방울, 산(山)제사 등의 방식은 좋건 싫건 한국 문화의 연장이었다. 일본 문부성 산하 국제 교류 기금의 지원으로 이뤄진 여행이었다.



    선생은 최근 정부가 경제난을 이유로 국제교류기금을 차단한다는 결정을 내린 사실이 “슬프다”고 했다. 榴?“올해도 국립박물관장 片?광고를신문에서 보았다”며 “문화마저 경제적 수치로 환산하던 DJ 정부의 오류를 현정부가 답습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84년 일본 국제교류기금의 프로젝트로 도쿄 고쿠가쿠인다이가쿠(국학원 대학)의 교환 교수로 가 있을 때, 그곳 교수의 도움으로 극비 자료까지 용케 볼 수 있었던 선생은 현재 한국의 경제 최우선주의가 걱정스럽기만 하다. 일본이 없느니, 있느니 단선적 일본관만이 먹혀 드는 한국 문화의 내일은 염려스럽다고 선생은 덧붙였다.



    선생은 지난 5월 제 1회 시상식을 가진 민속학계 최초의 상, ‘월산 민속학상’의 운영위원이다. 뿐만 아니라 성금을 쾌척하기도 했다. 그는 “설렁탕 장사하는 할머니도 장학 재단을 만들었다는 소식에, 나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기금을 기탁한 이유를 대신했다. 그 소식을 들은 한 친구는 “지하철 타고 다니는 주제에…”며 한 소리 했고, 한 제자는 “6년째 쓰는 노트북이나 바꾸실 일이지…”라며 또 한 소리했다는 후문이다.



    그래도 기쁘다는 임동권 선생. 65세 때 노인 복지 카드를 받고 보니 내심 조금 서운했지만, 지하철 타고 다닐 때 유용하게 쓰고 있다는 선생. 손자 재롱을 보고 싶지만 원고 작업 때문에 마다하고 또 자료 더미에 묻혀 사는 선생. 어머니는 66년 세상을 떴지만, 국전 심사위원인 조각가 윤영자씨가 생시에 만들어 둔 흉상을 응접실에 모셔두고 있어 마음이 늘 든든하다는 선생이다.



    장병욱차장 aje@hk.co.kr


    입력시간 : 2003-10-05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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