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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05 15:41:47 | 수정시간 : 2003.10.05 15:41:47
  • [추억의 LP여행] 이미자(下)






    극장주들은 2,000원이던 극장 출연료의 20배가 넘는 5만원에라도 이미자를 모셔가기 위해 사활을 건 출혈 경쟁을 벌였다. 연주비 조차 없어 박시춘의 도움으로 겨우 녹음했던 신생레코드사 지구도 메이저급 회사로 동반 상승했다. '동백 아가씨'에는 취입 때부터 갖가지 사연이 만발했다.



    미도파레코드에서 독립한 지구의 임정수 사장은 생소한 지구보다는 중견회사인 미도파레코드 이름으로 음반을 슬쩍 발매했다. 그런데 음반이 공전의 히트를 터뜨리자 미도파 측에서 회사 이름 도용 문제를 거론하며 소송을 걸어와 곤혹을 치렀다. 미도파와 지구 두 회사의 같은 '동백아가씨'음반이 존재하는 것은 이 같이 복잡한 사연 때문.



    1964년 겨울, 대학생들이 주고객 층인 충무로 음악감상실 '세시봉'과 서린 동경 음악실. 트롯을 천시했던 이곳의 젊은 멋쟁이들조차 '동백아가씨'를 합창으로 따라 부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후 이미자는 '울어라 열풍아'등 후속 발표 곡마다 인기 퍼레이드를 벌었다.



    인기 가수로 떠오르자 성남극장, 우미관, 노벨극장, 금호극장등 하루에 극장 네 곳을 매일 한바퀴 도는 바쁜 몸이 되었다. 64년 9월 첫 딸 재은을 낳은 이미자는 1년 사이에 아담한 집과 전화, TV, 자동차를 한꺼번에 마련할 만큼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그녀는 "사는 즐거움과 일하는 보람을 느꼈던 꿈같은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65년 말 '동백아가씨'가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방송금지가 되고 66년 '섬마을 선생님'도 뒤를 이어 판매 금지 당했다. 남편과의 갈등으로 이혼까지 하는 시련의 계절이 찾아 왔다.



    아이러니한 것은 금지 처분을 받은 '동백아가씨'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애창곡이었다는 사실. 대중 음악에 대한 군사 정권의 이중 잣대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금지곡 가수이면서 정상의 가수였던 그녀는 월남 파병 부대 위문 공연단에 1순위로 뽑혀 다섯 차례나 파월 장병들의 눈물샘을 터뜨렸다.



    이때의 공로로 73년 방한한 티우 대통령으로부터 베트남 최고훈장을 받기도 했다. 66년 이미자의 소문을 들은 일본 빅터레코드사는 음반 취입을 제의를 해왔다. 현해탄을 건너 가, '동백아가씨'와 현지에서 받은 곡을 일본 노래로 취입했다.



    '동백아가씨'는 '사랑의 빨강 등불'로 일본 정서에 맞도록 제목과 가사 내용이 변경되고 이미자는 일본식 발음인 '리요시코'로 소개되었다. 당시는 한일 국교 수립이후 반일 감정이 악화된 시절. 이 사건은 반일 감정에 거센 기름을 붓는 파문을 일으켰다. '이미자를 즉시 송환시켜라', '왜색 노래가 이제야 제 나라 찾아 갔다'는 극단적 반응이 불거져 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회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고통을 받았다. 대중 음악은 한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과 문화적 정서와 밀접하게 연관돼 사회를 반영함을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어쩌면 이미자는 대중음악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시대의 희생양일지도 모른다.



    촉망받는 작곡가 박춘석이 자청해 전속사를 옮겨 오면서 더욱 가속이 붙은 이미자는 66년도엔 '흑산도 아가씨'등으로 가요계를 석권하고 67년에는 최고의 히트곡 '섬마을 선생님' 등 무려 4곡이 연말 결산 톱 10곡에 선정되는 절정기를 구가했다.



    68년에는 제일교포 위문차 두 번째로 일본 공연 길에 올라 후지 TV에 출연했다. 상복도 유난히 많았다. 64년부터 70년까지 MBC 10대 가수상의 단골 수상자였고 그 중 3번은 가수왕에 등극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녀가 받지 못한 가요계의 상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69년은 끔찍했던 한 해. 빅 히트곡 '기러기 아빠'가 또다시 방송금지 되었을 뿐 아니라 6월에는 북악 스카이웨이 팔각정 앞길에서 대형 교통 사고로 팔이 부러지고 얼굴이 찢어지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연말에 취입곡이 1,000곡을 넘어선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이혼 이후 크고 작은 스캔들에 연루되었던 이미자는 KBS PD 김창수씨와 재혼을 하며 안정을 찾았다.



    87년 8월 '동백아가씨', '유달산아 말해다오' 등 5곡이 한꺼번에 금지의 멍에에서 벗어났다. 생기를 되찾은 이미자는 89년 10월 순수 예술계의 반발을 딛고 최초로 세종문화회관무대에서 30주년 기념공연을 여는 쾌거를 이뤄냈다. 91년엔 SBS 라디읏【?'이미愍?가요 앨범'을 맡아 DJ로 변신을 하기도 했다.



    95년엔 제2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대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문화훈장을 받고 97년에는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 히트곡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까지 세워졌다. 99년엔 노래인생 40년을 총 정리하는 기념 앨범과 자전 에세이를 발표했다. 2002년에는 국내 가수로는 처음으로 '평양 특별공연'을 남북 동시 생중계로 방영해 민족 모두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이처럼 그녀의 노래들은 역경의 삶에서 나오는 애절함과 꾸미지 않는 순수함으로 남북을 불문하고 한민족의 가슴을 울려왔다.



    흔히 이미자는 끊고 맺음이 분명하고 감정 표현이 직설적인 성격, 사생활 공개를 꺼려 인터뷰하기 힘든 가수로 유명하다. 하지만 가요계의 대모로 44여 년 동안 국민 가수로 칭송 받는 이유는 '당일 날 곡을 받아 가사를 외우고 취입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가수'라는 작곡가 고봉산의 극찬처럼 실력 있는 가수이기 때문이다. 한국 대중 가요의 산증인 이미자는 '전통 가요'의 맥을 잇는다는 자부심으로 여전히 무대에 오르고 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입력시간 : 2003-10-05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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