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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05 19:56:05 | 수정시간 : 2003.10.05 19:56:05
  • [직업의 세계-9] 동시통역사 이지연
    예측 불가능한 초침과의 전쟁
    넓은 세계와의 시차없는 '국제뉴스 전령사'








    아침 7시, 출근하자마자 간밤의 외신뉴스부터 확인한다. 전날 저녁부터 방금 전까지 24시간 지구촌 안부가 담긴 녹화 테이프다. 그중 방송할 아이템을 고르는 고민이 끝날 때쯤이면 8시 안팎, 재빨리 손을 놀려 화면을 편집한다. 그림이 준비되면 다음은 주특기인 번역으로 들어간다. 영어가 순식간에 우리말로 바뀐다. 몇번이고 표현도 다듬고 단어 수도 줄인다.



    영어 기자들은 한국어 기자들보다 훨씬 말이 빠르고 쉬는 호흡도 없다. 곧이곧대로 다 통역하다가는 통역사도, 시청자도 숨만 가쁘다. 선배의 조언까지 거쳐 이만하면 안심이다 싶을 때 시계를 보면 시침이 이미 11자 근처에 가 있다. 테이프와 뉴스 멘트가 적힌 종이를 들고 더빙실로 들어선다. 조금 전에는 PD겸 통역사였던 그가 이번에는 아나운서로 변신해 있다.



    녹음 후 믹싱 작업에다 자막처리까지 해결하고 나면 점심시간. 식사 후 화면 앞뒤에 광고 화면까지 마저 편집해 붙이면 이제야 만세다. 그럭저럭 오후 3시가 되면 퇴근채비를 한다.



    이것은 ‘평화시’의 얘기다. YTN 소속 동시통역사 이지연(33)씨, 아침 근무로 ‘위성통역실’을 제작할 때면 대개 위와 같이 일과가 진행된다. YTN은 국내에서 동시통역사를 상근 정규직으로 채용한 첫 방송사다. 이씨는 이곳의 개국 때부터 함께 해 온 원년 멤버중 한 사람이다.



    이씨를 포함해 이곳 통역실에는 4명이 근무한다. 매일 방송되는 ‘위성통역실’을 비롯해 통역사들이 직접 편집, 제작하는 여러 프로그램 외에도 국제부 뉴스, 해외 특집물 등 영어가 쓰이는 곳이면 어디든 통역, 번역 지원을 맡고 있다.




    국제사건 터지면 그날이 장날





    “평소에는 비교적 시간 여유가 많은 편이예요. 자기 할 일만 열심히 하면 다른 구속을 받을 필요도 없고, 자유롭지요. 퇴근 후 시간을 자신을 위해 활용할 수도 있구요. 그리고 매일 새로운 소식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다는 것도 재미있어요.”



    하지만, 이씨의 평화는 여기까지가 끝이다. 일이 터졌다 하면 전우도, 방패도 하나 없는 맨몸의 종군병으로 방송의 전쟁터에 나선다. 지난 이라크전 때는 너무나 고생스러워 한 때 사표를 낼 생각까지 했었다. 이라크전이 조금만 더 오래 끌었어도 어찌되었을지 모른다.



    전황을 쫓고 쫓는 동시통역 한달 내내 24시간 비상근무 체제 속에서 체력도, 정신력도 완전 ‘그로기’상태였다. 이런 상황을 만나면 동시통역사들도 인질아닌 인질 신세다. 너나 없이 신경성 위장병에 걸린 채, 헤드폰과 마이크만으로 캄캄한 암흑 속에서 자신을 지켜야 하는 전파의 볼모다.



    이라크전쟁은 특히 이들에게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시험대나 다름없었다. 인간이 긴장해서 가장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은 최장 20분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는 통하지 않는 상식이다. 동료와 교대하기 전 통역사 1인당 마이크 앞에 꼬박 묶여 있는 시간이 휴식 없는 연속 8시간. 한번 방송이 물렸다 하면 짧게는 30분, 길면 1시간까지 이어졌다.



    방송이 수시로 물리고 풀리는 막간에도 행여 언제 다시 브레이킹 뉴스가 뜰지 몰라 줄곧 외신에서 눈과 귀를 떼지 못했다. 식사도 도시락으로 해결, 화장실에 다녀올 때도 행여 그 사이 뉴스가 터질세라 불안만 더 했다.



    가장 어려운 것은 그 어떤 준비도, 예측도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영어 방송을 듣자마자 우리말로 되옮기는데 주어지는 시간은 불과 수초 차이, 길어야 한 문장 정도 간격이다. 아무리 똑똑한 통역사라 해도 세계 전역의 인명이나 지명을 다 알 수는 없다. 발음조차 따라 하기 힘든 이라크 관리 이름들이 이라크전에서 숱하게 쏟아졌다.



    처음 들어보는 낯선 지명들에다 생소한 단체명, 어려운 전문 군사용어에다 약어, 군필자들조차 잘 모르는 최신 개발 신무기 이름까지, 이씨?통역사팀을 괴롭힌 이라크전의 유탄들이다.



    방송 기술상의 장애는 무엇보다 치명적이다. 헤드폰에 이상이 생기거나 오디오 장비상의 문제로 상대의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바보로 전락하는 건 시간문제다. 통역사들이 가장 아찔해지는 때다.







    “한번은 한참 통역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헤드폰에서 소리가 뚝 끊어지는 거예요. 너무 놀라서 황급히 손으로 사인을 보내자 일단 스태프쪽에서 스튜디오 스피커로 소리가 나오게 만들어 뉴스를 계속 듣게 해준 뒤 그 사이 다른 헤드폰을 가져와서 바꿔 끼게 했어요. 다행히 무사하기는 했지만, 그 잠깐의 시간이 제게는 정말, 정말 땀이 났어요.”



    원인이 무엇이든, 일단 문제가 터지면 회복할 방법도 없다. 2년 전에 있었던 9ㆍ11 뉴욕테러 관련 보도는 이씨에게 악몽으로 남아 있다. 이 전대미문의 테러 사태를 국내에 제1보로 전한 것이 이씨였다. 사건이 외신에 터지자 마자 곧바로 동시통역에 투입된 이씨.



    그런데 헤드폰을 끼자마자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가뜩이나 현장의 헬리콥터 소리, 사이렌 소리 등 현장음이 뒤범벅이 된 상태에서 그가 들어야 할 CNN 기자의 목소리외에 타 방송사 영어 기자의 목소리가 이상하게도 겹쳐 있었다. 뒤섞인 두 사람의 소리에 도무지 아무 말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현장에 여러 방송사의 취재진이 몰려 들어 리포트를 하기 때문일거라는 짐작으로 혼자 속만 끓였다. 어쨌든 통역방송은 이미 물린 상황,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자리를 지킬 수 밖에 없었다. 제대로 들리는 것이 없으니 당연히 통역이 순탄할 리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현장음이 아니라 기술상의 문제로 타 채널이 같이 붙어 빚어진 일이었다.



    “그땐 정말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을 정도로 결과가 엉망이었어요. 그렇다고 시청자들이 이런 내부사정을 전혀 알 리가 없지요. 욕도 많이 들었고, 인터넷에 ‘통역사 맞냐?’ 그런 글도 많았고, 그때 마음고생을 많이 했어요. 사실 저도 예전에 통역대학원 학생 신분일 때는 TV를 보면서 ‘에이 뭐 저래, 저렇게 밖에 못 따라가나’했는데 막상 그 자리에 직접 앉아보면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사방이 지뢰밭





    경력 8년차. 그러나 이같은 긴장과 극도의 스트레스는 경험과 상관없이 언제나 원점에서 되풀이된다. 외국 대통령의 취임식이나 국정연설 등 연례적인 동시통역 상황외에 이같은 ‘무차별 공습’만 1년에 한 두차례. 가장 친숙해할만한 부시 미 대통령도 이런 점에선 방송 통역사들에게 오히려 인기 최저가다.



    “부시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특히 일이 부쩍 많아졌어요. 사실 대선 치를 때부터 개표 소동이 터진 것을 비롯해서, 저희들끼리 앞으로 심상찮겠다 했었어요(웃음). 실제로 재임 중에 다른 대통령 때보다 훨씬 생방송 동시통역 상황이 많이 일어나고 있어요. 지금도 조마조마하지요. 북한을 건드리지는 않을까, 이란을 건드리지는 않을까…. 그 의중을 누가 알겠어요. 또 사담 후세인이 어디서 뿅~하고 나타나지는 않을까, 저희에겐 사방이 지뢰밭이예요. 터졌다 하면 제일 먼저 저희부터 혹사를 당하는 거죠(웃음).”



    이씨는 연세대 영문학과, 외대 통역대학원을 졸업한 순수 국내파 출신 동시통역사다. 외국 거주 경험자들만 통역사가 되는 줄 알았다가 한 선배 언니의 선례를 보고 통역사의 길을 준비, 재수 끝에 3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통역대학원에 입학했다.



    통역대학원은 입학하기도 어렵지만 졸업하기는 더 어렵다는 곳. 수업 방식부터가 혹독한 실전형이다. 이씨의 재학시절, 학생중 한명이 연설문을 내놓으면 즉석에서 영어는 한국어로, 한국어는 영어로 통역을 했다. 통역이 끝나면 이에 대해 다른 학생들로부터 공개적으로 평가를 받게 하기도 했다. 칭찬이 아니라 문제점만 집중 지적하는 것이 이 시간의 룰이었다.



    신랄한 비판 때문에 당사자는 자존심을 다치기 십상이었다. 결국 이 과정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도중에 학업을 포기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돌이켜 보면 통역사들이 사회에 진출해 맞부딪치게 될 환경에 대한 일종의 적응 훈련이었던 셈이었다. 졸업시험에서도 동기생 중 약 30%가 낙오했다. 세 번의 시험 기회에도 결국 통과하지 못해 수료로 마감한 경우도 있다.



    1995년 YTN에 입사, 이씨에게는 첫 통역무대이자 사회를 경험하는 첫 발이었다. 그가 있는 통역실은 보도부 초입의 서너평 남짓한 작은 방. 외형적으로는 누구보다 넓은 세계를 만나는 전문가들이지만, 사실상 모든 것이 화면으로 소통될 뿐 현실적으로는 하루종일 테이프와 씨름하는 일이 전부였다. 조금씩 갑갑증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다른 방송 통역사들도 어김없이 거치는 초기 진통이다.




    역사의 순간을 함께 한다는 자부심





    3년뒤 YTN을 퇴사했다. 보다 살아있는 일, 화면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는 통역을 하고 싶었다. 주로 기업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젝트 동시통역사로 6개월쯤 일했다. 일도 재미 있었고, 수입으로도 프로젝트 통역사의 벌이가 최고였다. 한달에 5일만 뛰어도 400~500만원을 벌었다.



    문제는 프로젝트가 끝날 때마다 다시 짐을 싸고 새 일을 찾아나서야 하는 ‘보따리 장사’ 신세라는 것. 안정된 소속을 원했던 이씨는 이어서 공정거래위원회에 취업, 공무원이 되었다. 공정위 소속의 유일한 통역사로, 주로 전윤철 전 재경부 장관의 통역을 맡았다. 하지만 격식과 의례를 중요시하는 공무원 특유의 문화가 부담스러워 다시 포기. 계약기간 1년을 채우기가 무섭게 ‘친정’으로 되돌아 왔다.



    “그전에는 갑갑하다고만 느꼈는데, 막상 나가보니 이 일이 정말 괜찮은 직업이었구나 뒤늦게 깨닫게 됐어요. 또 동시통역상황도 당시에는 고생스럽지만 한편으론 역사의 순간에 함께 했다는 사실이 다시금 의미있게 다가왔구요.”



    그 8년 사이, 실수와 시행착오도 많았다. 입사후 개국 준비 중에는 아나운서 억양을 익히느라 남들보다 갑절 진땀을 뺐다. 전쟁이나 대형 참사 동시통역 생방송의 후유증에 비하면 사소한 단어 한 두개의 실수는 통역사들 사이에 차라리 ‘애교 수준’, 부끄럽지만 웃음 나는 기억들이다.



    “옛날에 라빈 전 이스라엘 총리가 암살당한 뒤 클린턴 대통령이 애도 연설을 했을 때 성경구절을 인용해 ‘honey and milk’가 흐르는… 이라고 하는 것을 말 그대로 꿀과 우유로 통역했다가 나중에 ‘너는 젖 안 먹고 우유 먹고 컸냐’고 놀림을 받은 적이 있어요. 중국 장쩌민을 들리는 대로 장재민 총리라고 썼다가 나중에 ‘이게 누구냐?’고 해서 강택민으로 다시 고친 적도 있지요(웃음). 생각하면 창피한 일이지만, 사실 그런 실수들을 통해서 더 많이 배우고 얻기도 해요. 실전을 통해서 노하우가 쌓이는 거지요. “



    지금처럼 한가로운 시간은 또 얼마나 갈까? 불꽃 튀는 동시통역 방송 한 두번만 겪고 나면 통역사들에게 저절로 외쳐지는 구호가 있다. 바로 이것. “세계 평화를 지킵시다!” 길은 같아도 숨은 뜻은 조금 다른, 이씨와 동시통역사들의 생존구호다.



    정영주 pinplus@empal.com


    입력시간 : 2003-10-05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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