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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05 20:18:54 | 수정시간 : 2003.10.05 20:18:54
  • 왜 그들은 조국을 버리려하는가?
    일제 희생자 300여명, 정부 미온적 태도에 격분 '국적포기' 선택







    “오죽하면 국민이 국가를 부정하려 하겠습니까.” 일제 강제 징용의 피해자인 김성수 할아버지(79)는 광복절을 앞두고 마음이 심란하다. 팔 십 평생 자랑스럽게 여겨온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려고 마음 먹었기 때문이다.



    김 할아버지가 일제에 강제 징용돼 태평양 전쟁에 끌려간 것은 1942년. 미얀마 전투에서 오른팔을 잃고 왼쪽 다리도 크게 다쳤다. 전쟁 후 다친 몸을 이끌고 미군 부대 통역을 하거나 고무신 장사를 해봤지만 성치 않은 몸 때문에 고생만 할 뿐 치료비도 제대로 벌기 어려웠다.



    전쟁 후유증으로 인한 장애와 가난을 60년 가까이 겪다보니 이제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것이다. 김 할아버지는 “강제 징용의 피해자이지만, 일본과 정부는 철저히 외면해 왔다. 해방 후 48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보상 한번 받지 못했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또 다른 태평양전쟁의 희생자인 이금숙(59)씨는 1943년 징용 당한 아버지의 생사를 여태껏 확인하지 못했다. 이씨의 어머니는 25년간 남편을 기다리다 한을 품고 돌아가셨다. “아버지 유골이라도 찾아 어머니 곁에 모시겠다고 약속 드렸는데 아직 생사도 모른다. 이번 추석 때 어머니 묘소에 가서 도 뭐라고 해야 하나”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는 지난해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할 작은 단서라도 찾기 위해 정부에 한일협정문서 공개를 요구했으나 이마저 거절 당한 상태다. 격분한 이씨는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할 테니 아버지처럼 (대한민국도, 다른 나라도 아닌) 미지의 곳으로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일본 외면, 정부 무관심





    제 58회 광복절을 맞는 2003년 8월. 이들이 고통은 정부의 무관심과 일본의 외면 속에 여전히 방치돼 있다. 참다 못한 태평양 전쟁 피해자들이 집단으로 국적을 포기키로 해 파문이 일고 있다.



    30여 개 시민단체가 연대하는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 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추진위원회’(특별법 추진위)에 따르면 위안부들이 모여 사는 ‘나눔의 집’과 ‘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유족회’, ‘일제강제연행한국 생존자협회’, ‘시베리아 삭풍회’ 등 5개 단체 피해자 회원 300여 명이 8월 13일 청와대에 국적 포기서를 제출키로 했다.



    추진위는 국적 포기서와 함께 희생자 개인별 사유서를 청와대에 전달하고, 노무현 대통령과 면담도 요청할 계획이다.



    이들이 ‘국적 포기’라는 강경한 수단을 선택한 데에는 우리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가 크게 작용했다. 일본이 피해자에 대한 공식 사과와 피해 보상을 하지 않는 것은 그렇다고 치고, 이에 대해 우리 정부가 수수방관하는 것은 국민안전을 책임지는 국가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상임이사인 이희자(61)는 “우리 정부가 한 맺힌 피해자들의 절규를 외면하는데, 일본이 우리에게 사과와 보상을 해주겠냐”며 “자기 국민을 나몰라라고 내팽개치는 우리 정부가 일본보다 더한 가해자”라고 분개했다.












    보상근거 마련하려는 고육책





    또 다른 이유는 현실적인 피해 보상의 근거를 마련하겠다는 뜻이다. 현재 이들 피해자의 보상 문제에 관한 최대 걸림돌은 1965년 맺어진 한일기본 조약. 이로 인해 일본은 일제 강점기의 청구권이 전부 소멸됐다고 주장한다. 때문에 피해자들은 한국 국적을 이탈해서라도 보상의 근거를 마련하겠다는 절박한 심정을 토로한다.



    특별법 추진위 최봉태 공동집행위원장은 “일제 강점시기 피해자들은 국내법이나 조약 등 국제법에 의해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고 명예회복도 이뤄지지 않았다”며 “70∼80대에 접어든 피해자들이 모두 돌아가시기 전에,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속한 해결을 촉구했다.



    하지만 국적 포기 절차는 그리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다른 나라 국적을 취득하면서 우리 나라의 국적 상실을 신고하는 경우는 있어도 임의로 국적을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 법무부 관계자는 “임의로 무국적자가 되는 것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 국적 포기라는 말 자체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에 대해 특별법 추진위 김은식 사무국장은 “국적 포기서가 반려될 경우 정부를 대상으로 한 피해 보상 요구 소송을 강도 높게 펼쳐나가겠다”고 말했다.



    중경고 역사탐구반의 '10대들의 역사리포트'
       




    "막연한 반일 감정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으로 바뀌었죠."



    서울시 동부이촌동에 위치한 중경고 역사탐구반 학생들이 일제 강점기 피해자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엮어 '10대들의 역사 리포트(도서출판 역사넷)'란 책으로 펴냈다. 이 책에는 위안부 할머니와 강제 징용ㆍ징병 할아버지의 힘겨웠던 삶에 대한 기록과 함께 일본 방문길에서 만난 일본 학생들의 관심과 이에 얽힌 희망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고 1ㆍ2학년이었던 역사탐구반의 13명 학생들은 일제 강점기에 관심을 갖고 2001년 3월부터 학습을 시작했다. "일제 시대는 근대사에 속하고, 특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이 쌓여 있었기에 다들 관심이 많았어요. 특히 우리 조상의 아픈 역사를 되짚으면서 문제 해결에 작은 보탬을 주는 기록을 남겨야 겠다고 마음 먹었지요."



    전쟁의 비극을 전해줄 어른들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학생들은 피해자들의 주소만을 들고 수소문하여 경기도 이천, 강원도 양양, 충북 괴산 등 전국을 헤맸다. 일본에 살고 있는 피해자들의 고충을 듣기 위해 2002년 1월에는 일주일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국민이 미워 그들이 얼마나 잘못했는지 알아야 한다는 마음에 거리에서 전단지를 돌렸어요. 그런데 일본 사람들을 만날수록 그들을 미워하고만 있기보단, 당시의 진실을 알려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가까워졌으면 마음이 간절해졌죠."



    학생들은 오래된 역사의 엉킨 매듭을 푸는 것은 과거를 인정하고, 그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본다. 입시를 준비할 시간에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을 만나고 책을 펴내느라 바쁘게 2년 여를 보냈지만, 이 시간을 알차게 소비했다고 확신한다.



    한 학생은 "일본 정부에 항의하는 각종 집회와 봉사활동에 참가해 부족한 역사 공부를 추가로 하고 있다"며 "어른들이 외면한다면 아이들이라도 문제 해결에 대한 관심과 뜻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배현정 기자 hjbae@hk.co.kr


    입력시간 : 2003-10-0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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