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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06 10:08:44 | 수정시간 : 2003.10.06 10:08:44
  • 사법의 城, 허물고 다시 쌓아야
    '파동' 직전 봉합, 서열구조 개선 등 '사법개혁' 이제부터 시작









    우려했던 사법 파동에 이르지는 않았다. 8월 18일 열린 ‘전국 법관과의 대화’를 고비로 사태는 일단 수습됐다. 대법원이 내놓은 해법은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초미의 관심사였던 대법관 자리에는 원안 후보를 고수하는 대신, 헌법재판관 자리에 사상 최초로 여성 법관을 임명하며 여론 달래기에 나섰다.



    이번 사태를 통해 보여진 법관들의 사법부 개혁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폭발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거셌다. 외부에 비쳐진 것처럼 단지 몇몇 개혁 성향 법관들만의 잔치도 결코 아니었다. 사태가 진정됐음에도 불구하고 법관 한 명 한 명에게서 개혁을 바라는 강한 열정은 좀처럼 식지 않고 있다. 이제부터가 진정한 사법 개혁을 위한 중대한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일각의 평가가 의미심장하다.




    대법원, 급한 불은 껐다





    18일 오전10시30분, 일선 법관들에게 대법원으로부터 긴급 메일이 전달됐다. 이날 오후 3시 사법 사상 처음으로 ‘전국 법관과의 대화’를 소집한다는 내용이었다. “대법원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 같다”는 기대와 “개혁 요구를 무마시키기 위한 모양 갖추기”라는 우려가 교차했다. 회의를 불과 4~5시간 앞두고 이뤄진 무책임한 통보에 대한 불만도 뒤섞였다.



    회의는 양측 모두 한 발도 물러 설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 비공개로 진행됐다. 성토, 설득, 반박, 재반박…. 단 한 차례 쉬는 시간 없이 무려 7시간 30분 동안 진행된 설전이었다. 그리고 밤 10시30분. 회의장 밖으로 울려 퍼진 회의 참석자 70여 법관들의 긴 박수소리. 파문이 일단 진정됐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손지호 대법원 공보관은 마라톤 회의를 마친 뒤 결과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설명했다. “이번 대법관 인사는 당초 추천된 세 명 중 한 명을 제청하는 방향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대신 내년부터 후보 추천 전에 판사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쪽으로 상당한 의견 일치를 보았다.” 대법원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일선 법관들의 개혁 요구를 최대한 수용한 결론이었다.



    이튿날, 최종영 대법원장은 8월말 임기 만료로 물러나는 한대현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후임으로 여성인 전효숙(52ㆍ사시 17회) 서울고법 형사2부장판사를 지명했다. 헌법재판관으로 여성이 지명된 것은 물론 사상 처음. 대법원은 “여성 보호, 소수자 보호라는 법원 내외의 시대적인 요청에 가장 적합한 후보자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전 헌법재판관 지명자는 시민단체가 공개적으로 추천한 대법관ㆍ헌법재판관 후보 6명 후보에 포함됐던 인물.







    여성이라는 것 자체도 그렇거니와 현재 9명의 헌법재판관 중 말석 재판관의 사시 기수가 10회인 것을 감안하면 지금까지는 상상하기 힘든 파격 인선이었다. 비록 대법관이 아닌 헌법재판관이었고 여론 달래기의 한 방편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지만, 이번 파동이 낳은 혁혁한 성과인 것 또한 분명했다.



    최 대법원장은 대신 서 성 대법관의 후임에는 예정대로 김용담(56ㆍ사시 11회) 광주고법원장을 임명 제청했다. ‘대법관 = 안정, 헌법재판관 = 개혁’ 구도의 인선으로 이번 파문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여전히 뒤숭숭한 법원





    사태는 수습됐지만 그렇다고 파장이 쉽게 가라앉길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여전히 법원 내부는 뒤숭숭했다.



    며칠 뒤 서울 서초동 서울지방법원 나동 20층 민사28부 박시환 부장판사실. 대법관제청위원회가 끝난 직후 결과에 불만을 시해 사표를 제출해 이번 파동에 불을 지폈던 박 부장판사는 심경이 복잡한 듯 했다. “한번 생각해 보라고. 사표를 철회하는 것이 모양새가 가능하다고 생각해? 누굴 바보 만들 생각 아니라면 그냥 지켜봐 주라고.”



    연신 걸려오는 동료 혹은 선ㆍ후배 법관들의 안부 전화에 그는 앵무새처럼 똑 같은 답변을 하고 있었다. 그의 생각은 이랬다. “비록 대법원측이 사표를 반려했지만 제 사표를 통해 사법 개혁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가능해졌는데, 이제 와서 법관직을 되찾아 오는 것은 염치 없는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대법원이 내놓은 해법에 대해 만족스럽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워낙 사법부에 대한 깊은 불신이 자리잡은 탓이었다.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다.” 결과가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약속 대로 대법원이 사법 개혁을 위해 노력한다면 이번 사태가 충분히 성과가 있었던 것이라고 믿는다는 의미다.



    “이번에 법관들이 대법관 한 자리에 연연해 투쟁을 한 것이라고 오해하지는 말기를 바랍니다. 한번쯤 생색 내기로 대법관 자리에 파격적 인물을 앉힌다고 해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의 평가는 여기까지 였다. 사표를 낸 마당에 왈가왈부하는 것은 자신이 지금껏 몸 담아온 사법부와 동료 법관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믿음 때문이었다.



    ‘조건부 사퇴’ 의사를 밝히며 이번 파문의 중심에 섰던 서울지법 문흥수 부장판사는 여론의 만류에 밀려 사퇴 의사를 접었지만 여전히 불만스러움을 감추지 않고 있다. 그는 “대법관이 퇴임 후 변호사가 되고 판사들은 승진에 목을 매는 현행 제도를 개혁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며 “소장 판사들이 한계를 느끼는 것 같은 상황에서 개혁 드라이브를 더 강하게 걸 필요가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사법 개혁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





    “요즘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나의 주변에 있는 인물들의 청탁이다. 수사 담당 검사에게 판사임을 밝히고 사건을 공정하게 수사해 달라는 전화를 부탁하는 내용, 연수원 동기 법관에게 보석으로 석방을 받을 수 있도록 언질을 해 달라는 내용….” 임관 3년차의 한 젊은 법관은 최근 법원 내부통신망에 진지하고 솔직한 자기 성찰의 글을 올렸다.



    “판사로서 겪게 되는 최고의 고통은 이러한 청탁으로부터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는 부연 설명과 함께.







    그는 “앞으로도 나에게 청탁은 계속 될 것”이라며 “언제 나의 이 고통이 해결될 수 있을 지 선배 법관들에게 그 해결책을 묻고 싶다”고 했다. 법원 내에 청탁은 없으며 현행 승진 제도가 법관의 양심을 억누를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대법원의 강변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글을 통해 자신을 현 체제에 나름대로 잘 적응하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법관이라고 소개했다.



    판결문도 나름대로 성실히 작성하여 당사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도 하고, 대법원 판결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으면 논문도 찾아서 그와 반대되는 논리로 판결문을 작성하기도 하고, 동료 법관들과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식사도 하고 술도 마시고…. 그런 그는 “이런 저런 연유로 연판장에 서명을 해야 할 지 말지 심각하게 고민을 했었다”며 “법관이 판결로써만 말을 해야 한다면 나는 법관 생활을 그만 둬야 할 지도 모르겠다”고 적었다.



    이 글은 현재 상당수 평범한 법관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법원 내부에 적잖은 파장을 불러 왔다. 서울지법 민사 단독의 한 판사는 “사법 개혁의 요구는 사태를 주도한 몇몇 판사들만의 생각이 아니라 모든 법관들의 솔직한 자기 성찰에서 비롯됐음을 보여주는 글”이라며 “스스로 보수성에 길들여져 가고 있는 상당수 법관들이 이런 고민들을 하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그래서 법관들은 이제 “사법부 인사 개혁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 입을 모은다. 서울고법 한 부장판사는 “사표를 낸다든지 혹은 연명을 받는다든지 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일부 이견이 있을 지 몰라도 사법 개혁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대체로 공감이 형성됐다”며 “만약 대법원이 현 시스템을 지속하려 한다면 아마 법관들이 폭발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법부 폐쇄성을 타파할 수 있을까





    최종영 대법원장은 23일 노무현 대통령과 독대한 자리에서 사법 개혁 공동기획단 구성에 합의했다. 공동기획단에는 학계 인사와 재야 법조계 인사, 그리고 시민단체 인사 등이 대거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전국 법관과의 대화’에서 약속했듯 사법 개혁을 위한 본격적 수순을 밟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관건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다. 대법원이 법관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대법관 제청위원회’라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지만 내용 면에서는 조금도 변하지 않으면서 결국 이번 사태를 袈′構?된 것은 淪?岵?사례다.



    일선 법관들이나 시민 단체 등에서는 가장 시급한 개혁 과제로 대법원 구성과 기능 재편 등을 포함한 법원내 서열 구조 개선을 꼽고 있다. “심지어 식사를 하러 갈 때도 서열 순으로 간다”, “의자에 앉을 때도 서열을 따라야 한다” 등등 법관의 군대식 서열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그간 법원 안팎에서 비등했다. 사법연수원의 성적표는 평생 꼬리표처럼 따라 다녔다.



    이 같은 서열 구조의 정점은 법원 판결의 최종심을 맡는 대법관이나 각종 헌법 분쟁의 최종 심판자 역할을 하는 헌법재판관. 한 법관은 “합의부 좌배석 판사에서부터 시작해 단독판사, 부장판사, 고법 부장판사, 대법관 등으로까지 이어지는 승진 서열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사법부의 보수성을 탈피할 수 없다”며 “이번 사법 개혁 추진기구를 통해서 단지 대법관 임명 절차 뿐 아니라 법원 내에 고착화 한 서열 구조 전체를 재조정하는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로스쿨 도입이나 사법시험 제도 개선 등 법조인 양성 제도 개선 방안에 대해서도 충분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주문이 잇따른다. 재야 법조계 일각에선 판사 임용 자격을 강화하기 위해 사법연수원 수료생 중 상당수를 부(副)판사로 임용해 5년 이상 경과한 후에 평가를 거쳐 정식 판사로 임용하는 제도의 도입 등을 제안한 바 있다.



    또 변호사, 검사 경력이 5~10년 이상인 법조인을 판사로 일부 임용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과연 수십년간 고착된 사법부의 폐쇄성이 이번 개혁 작업을 통해 타파될 수 있을지, 아니면 또 다시 기득권 세력의 보수성에 밀려 좌초하고 말 것인지. 이제는 국민들이 직접 나서 감시를 해야 할 때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영태 기자 ytlee@hk.co.kr


    입력시간 : 2003-10-06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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