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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06 10:23:06 | 수정시간 : 2003.10.06 10:23:06
  • [재즈 프레소] 양수연의 재즈 오딧세이






    양수연(31)이 담배를 끊은 지 1년반이다. 담배는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했지만, 재즈는 언제나 그녀 곁에 있어 왔다. 그녀가 견뎌 온 시간은 한국적 재즈 정황이 어떤 것인가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별난 모델이다.



    “여자들은 담배를 피워야 한다”는 마광수 교수의 ‘강의’를 촉발점으로 해 5년 동안 피워 온 담배다. 재즈 전문 월간지 ‘재즈 힙스터’를 만들 때는 하루 두 갑씩 피웠다. 예나 지금이나 재즈의 꽃을 피우겠다는 일념은 마찬가지다.



    1990년대 재즈는 신종 문화 아이템으로 한국 사회에서 열화의 불길처럼 피어 오르던 새로운 물결이었다. 잡지, TV 광고, 상호(商號) 등 생활 곳곳이 재즈를 인용하던 시절, 그는 자신이 한가운데에 서고자 했다. 1994년 스트리트 페이퍼 ‘몽크 뭉크’의 발행인으로 일했던 시간은 그 출발점이었다.



    이어 1995~96년, 이번에는 재즈 전문지 ‘재즈 힙스터’의 창간인이 됐다.대학생 아르바이트생 너댓명을 데리고 일하던 당시 그는 원고 쓰랴, 편집하랴, 운영하랴, 몸이 두세 개는 돼야 할 판이었다. 애궂은 담배만 죽어 갔다. 최대 부수 1,000여부까지 갔던 그 잡지는 재즈 붐이 쇠락하면서 더 이상의 적자를 견뎌 낼 재간이 없었다.



    이후 그녀는 자신의 출발점이었던 재즈 뮤지션으로 나타났다. 밤이면 재즈 클럽 ‘야누스’와 ‘천년동안도’등에 피아니스트 겸 보컬로 출연했다. 또 낮에는 인터넷 관련 벤처 회사에 출근해 음악 콘텐츠를 개발하는 생활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은 오래갈 수 없었다. “클럽에 나가 노래 부르면서 내가 너무 엉터리라는 생각에 휩싸이고 부터는 무대에 설 수가 없더군요.”대충 재즈 분위기나 잡아 주는 가수는 되기 싫었던 것이다.



    그는 회사를 다니면서 나름의 공부를 시작했다. 존 콜트레인, 마일스 데이비스 등 거장의 솔로 라인을 자신의 목소리로 따라 하는 데 정성을 쏟았다. 목소리로 내는 악기, 그것이 바로 스캣이다. “재즈 보컬이란 대중 가수의 활동 중의 하나 정도로만 여겨지고 있는 국내의 현실에 평소부터 회의가 깊었어요.”



    1999년부터는 클럽 출연을 접게 된 이유다. 무대에 설 때는 옷을 섹시하게, 또는 드레시하게 입어 달라는 사장의 말도, 당시 뮤지션 사이에서 급속도로 번져 가던 골프 바람도 싫었다. 바로 그 때, 그는 홍익대 앞 지하 공간을 빌어 ‘핫 하우스’라는 재즈 클럽을 만들어 경영 일선에 나서며 틈틈이 무대에 올라 노래 불렀다. “너무 좋은 뮤지션을 많이 만났어요.”



    무명의 재즈 뮤지션들에게 무대를 활짝 개방한 덕이다. 클럽 운영을 하며 만났던 숨은 실력자들을 자기 클럽에 속속 소개해 나간 것이다. 쟁쟁한 선배가 와서 자신의 무대를 보고 있다가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눌 경우, “떠들려면 나가 달라”고 당당히 요구할 정도로 그들은 자신의 음악에 최상의 가치를 두고 있었다. 근근이 현상 유지하며 ‘재즈힙스터’의 빚을 갚아가고 있던 그녀에게 가해진 결정타는 월세 3배 인상이었다. 2002년 5월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이후 그녀는 틀어 박혀 한동안 잊고 지냈던 소설 쓰기에 매달렸다. “장애인, 뮤지션 등 우리 사회의 비주류를 주인공으로 한 단편 소설 20여편이 나왔어요.”재즈가 소비 상품으로만 인식돼 가는 우리 현실에서 인문학적 교양의 단련을 받은 양수연의 존재는 이질적이기까지 하다.



    대표적인 예가 1997년 이후 자신의 서교동 작업실에서 석달에 한번씩 펼쳐 오고 있는 철학 강의다. 다음 테마는 서강대 철학과 김봉규(45) 교수의 주재하에 펼쳐질 죽음에 관한 철학적 담론이다. 김용옥이 TV 강의에서 재즈 밴드를 초빙해 연주를 펼쳐주기 이전, 양수연의 작업실에서는 재즈와 철학의 공존이 이뤄진 것이다. 7월말의 ‘철학적 인간학’ 시간에는 그녀가 민영석(기타), 정재영(″)의 반주로 재즈를 들려주기도 했다.



    한때 ‘다운 비트’와 ‘스윙 저널’ 등 미국과 일본 최대의 재즈 잡지를 한국판으로 만들어 보려 했던 그녀다. “그러나 자존심이 너무 셌고, 엄청난 로열티를 요구해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었어요.” 한국의 재즈 인프라로 우리를 감당해 낼 수 있느냐는 암묵적 시험을 넘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저런 시도가 결국 실패의 기억으로 끝났지만, 그녀가 재즈에의 堧?포기하지 않는 한 그것은 실패의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핫 하우스 출발 당시 그녀가 도메인 등록 시킨 인터넷(www.hotjazzclub.com)은 지금도 계속 업데이트 되고 있다.



    그녀의 추억은 여전히 작동중이다. 요즘은 마포도서관에서 빌린 ‘러셀 자서전’을 가방에 넣고 다니며 틈틈이 꺼내 보고 있다. “노래 부르고, 쓰고, 열심히 읽어요.”한편의 ‘재즈 오딧세이’가 영글어 가고 있다.



    장병욱 차장 aje@hk.co.kr


    입력시간 : 2003-10-06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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