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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06 10:37:40 | 수정시간 : 2003.10.06 10:37:40
  • [김동식의 문화읽기] 폭력적 욕망의 대변


    “이종격투기 좋아하세요?” 모 신문사의 S 기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종격투기요? 직접 본 적은 없어요. 가끔 텔레비전에서 방송해 주는 것을 지나가며 잠깐씩 본 적이 있을 따름이지요.

    주간한국의 ‘문화읽기’에서 언제가 한 번 다루고 싶은 주제인데, 경기를 직접 봐야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미루고 있었지요. 언제 기회가 되면 한 번 꼭 보고 싶네요.” 조금은 실망한 듯한 분위기가 전화선 저쪽으로부터 전해져 온다. 정중하게 전화를 마무리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게 아니었던가 보다. “그래도 케이블 방송 등으로 경기를 보셨으니까, 그때의 느낌 같은 것이 있을 것 같은데요? 왜 사람들이 이종격투기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까?”

    방송에서 보았던 이종격투기의 몇몇 장면들이 머릿 속에서 뮤직비디오처럼 스쳐 지나간다.

    “이종격투기를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던데요. 우선 이종격투기라는 용어 자체가 의미 있는 것 같아요. 왠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격투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근대 스포츠는 엄밀한 분류 체계에 의해 틀이 지워져 있고, 동일 종목이나 체급 내에서의 경쟁만을 인정하지요. 그래서 축구선수와 농구선수 사이에는 경기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스포츠의 관점에서 보자면 태권도와 킥복싱이 맞붙는 것은 흥미거리의 쇼케이스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이종격투기는 가격을 위주로 하는 격투기와 서로 엉겨서 싸우는 유술기(grappling)의 차이와 구분을 허물어뜨렸지요. 다양한 무술이 한 무대에 올려진다는 점에서 격투기의 브리콜라주(bricolage)라고 할 수 있을 테고, 싸움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규칙만 적용된다는 점에서 미니멀리즘적인 면모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떠세요?”

    좀 오버하고 있다는 생각도 없지는 않았지만, 전화는 이미 사적인 대화의 차원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종격투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사람들마다 다르겠지요. 저는 가끔 고도로 합리화된 사회에서는 승부를 가릴 수 있는 기회는 줄어들고 선택할 수 있는 기회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살아가면서 온몸으로 느끼는 승리의 쾌감이나 패배의 허무를 경험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지요.

    물론 승부를 가리는 일은 폭력이 교환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치명적인 위험을 동반합니다. 따라서 스포츠가 승부의 대체 경험의 양식으로 주어집니다. 20세기에는 레슬링과 권투가 승부의 카타르시스를 전해주었다면, 이제는 이종격투기가 그 자리를 채워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옆길로 새려는 이야기를 겨우겨우 바로 잡는다.

    “선택은 언제나 다른 한쪽의 포기를 전제하지요. 그래서 선택은 언제나 그 어떤 잉여, 그러니까 감정의 찌꺼기 같은 것을 남기게 마련입니다. 이긴 것 같지도 않고 진 것 같지도 않은 어정쩡하고 찜찜한 상태가 그것이지요. 이러한 감정의 잉여가 과도하게 축적되면 걷잡을 수 없는 사회적 폭력이나 집단적 광기의 차원으로 치닫게 됩니다.

    따라서 과도한 잉여 에너지를 해소함으로써 사회 전체가 폭력에 휘말리는 상황을 방지해야 하는데요. 축제(카니발)와 희생제의가 잉여 에너지를 발산함으로써 감정의 정화를 경험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입니다. 희생제의는 죄 없는 양에게 폭력을 집중함으로써 폭력이 무차별적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막는 사회적 메커니즘인데요.

    르네 지라르는 희생제의를 두고 ‘폭력으로써 폭력을 속이는 일’이라고도 하지요. 권투나 레슬링이 그러했듯이, 이종격투기 역시 폭력과 관련된 사회적 제의의 기능을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있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근대국가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늑대로 대변되는 무차별적인 폭력의 상태를 극복하고 모든 사적인 폭력의 사용을 사법기관과 경찰기구에게 위임할 때 탄생한다. 쉽게 말하면 합리화된 사회는 폭력의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사용을 금지하며, 정부기관을 통한 간접적인 사용만을 허용한다. 폭력의 금지는 사회의 유지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규정이다.

    하지만 사적인 영역에는 여전히 폭력으로 치달을 수 있는 감정적 잉여가 남아있다.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저주스러운 잉여를 어떻게든 풀어버려야 하는데, 그 일이 결코 쉽고 간단하지가 않다. 어떠한 경우에도 무차별적인 폭력은 용인될 수 없지만, 인간에게는 폭력의 사용을 통한 폭력의 정화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종격투기의 격렬함이란 폭력의 정화와 관련된 우리사회의 욕망을 대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득, 싸움과 승부를 통해서 자기의 정체성을 ?曠構資?했던, 영화 ‘파이트 클럽’과 ‘반칙왕’의 슬프도록 처절한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다.



    김동식 문화평론가 tympan@empal.com


    입력시간 : 2003-10-06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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