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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06 10:59:55 | 수정시간 : 2003.10.06 10:59:55
  • [석학에게 묻는다] 이성무 국사학자


    "역사에 오늘을 불어 넣어야"















    8월 28일 경복궁은 차라리 투명했다. 지루한 늦장마 끝이라 더욱 그랬을까.



    삽상(颯爽)한 초가을 하늘 아래 중국과 일본에서 관광 온 청소년들의 분주한 대화 소리가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의 광장에 흩뿌려졌다. 때마침 돌마당 위에서 치러지는 화려한 수문장 교대식이 600년 왕조의 영광을 21세기안으로 고스란히 들이민다.



    “태조 7년, 그러니까 1398년에 왕자의 난이 일어나 방원이 동생들을 다 죽였죠.” 과거의 일이라면 숫자 하나라도 틀리는 일이 없는 이성무(66) 선생에게는 조선 시대 왕실의 사건이 현대판 ‘왕자의 난’보다 더 친숙한 듯 하다. 지난 3월 6일 국사편찬위원회(국편) 위원장의 4년 임기를 마치고 선생은 재야의 몸이 됐지만, 발길은 더욱 분주하다. 사회와 맺어 둔 인연 때문이다.



    2001년 KBS 제 1라디오에서 들어 온 40분짜리 프로 ‘역사 탐구’에서 강사를 맡아 달라는 요청은 선생의 구수한 입담 덕을 톡톡히 봤다. “과거 내가 썼던 책에서 중요한 부분을 뽑아 그날 그날 화두를 정한 뒤, 횡설수설 풀어 갔죠.” 나흘만에 한번꼴로 스튜디오에서 만나 방송 작가 김교식과 함께 시사적 사건을 곁들여 가며 이어 왔던 프로다.



    “대중적인 역사책을 틈틈이 써 온 경험 덕을 그때 톡톡히 봤죠.” 말을 분명히 끊어, 단정적이고 주관적으로 말해야 먹히는 미디어의 생리에 잘 적응할 수 있었던 것 역시 그랬다. 단군이 실존 인물이냐 신화냐는 문제에 대해, 단서 조항 없이 신화쪽으로 몰고 갔던 것이 좋은 예다. 이번에 나온 책은 당시 명쾌한 설명에 주목했던 국내 장년 계층과, 특히 옌벤 교포로부터 쇄도한 출판 요청을 모른 체 할 수 없어서다.




    조선 당쟁의 본질 밝혀내





    먼지 덮인 사료에서 채취한 생생한 사실들을 동시대에 펼쳐 놓는 일에 선생은 선구적으로 일해 왔다. 1998년 선생은 ‘조선 왕조 실록, 어떤 책인가’(1998년)로 세계 문화 유산에까지 등록된 우리의 보물이 갖는 의미를 일반인에게 풀어 냈다. 비슷한 시기 명ㆍ청, 일본, 월남 등에서도 실록이 있었지만 정치적 사건에 국한돼, 민속까지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에는 비길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사 1,2’(1998년)의 경우는 오는 12월 일본에서 번역돼 나온다.



    ㈜서울시스템과 공동 작업하에 1999년 단 한 장의 CD롬으로 나온 ‘국역 조선왕조실록’은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로서의 선생을 이해할 좋은 예다. 1995년, 석장으로 나왔던 것을 압축한 것이다. 태조에서 철종까지 25대 472년간 왕의 재위 기간 동안에 대한 정사(正史)를 36만2,161건의 기사로 데이터 베이스화해 마음껏 꺼내 볼 수 있도록 했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대로다. 북한 국사학계에서는 번역까지만 해 둔 상태였다.



    “조선은 당쟁 등 싸움만 일삼던 구제 불능의 민족이라며 미시나 아키히데(三品彰英) 같은 일본 사학자들이 열을 올리지만, 그것은 현대판 시민 단체라 할 만한 사림(士林)의 존재를 도외시한 소이죠.” 실제로 선생은 노론에서 나온 ‘당의통략(黨議通略)’ㆍ소론의 ‘아아록(我我錄)’ 등 당쟁 관련 서적 15권에서 추출한 사료 등을 근거로 ‘조선당쟁사 1, 2’(2000년)를 저술, 당쟁의 본질을 밝혔다.







    그러나 첨단 기술과 학문, 대중 시대와 학문의 만남이 바람직한 결과만을 낳았던 것은 아니다. 검색 기능 등 신기술까지 포함, 모두 500만원으로 값이 매겨져 3월 출시됐던 조선왕조실록 CD롬을 반긴 것은 불법 복제품이었다. 결과, 땀의 대가가 고작 몇 만원으로 시중 유통되는 바람에 출시 회사측에 손해만 입힌 꼴만 되고 만 것이다.



    극단적 양면성을 띠고 다가 오는 컴퓨터 문명을 처음 접했던 것은 1981년. 정문연 교수로 있을 당시, 하버드 옌칭연구소에 연구 교수(co-ordinator researcher)로 초빙돼 가면서부터 였다. 한국학의 대부 에드워드 웨그너 교수가 문과방목(文科枋木:문과 급제자 명단)을 분석하는 데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컴퓨터를 처음 목도하고는 컴퓨터의 위력을 절감한 그는 귀국후 산자부 산하 산업연구원의 도움으로 ‘잡과 방목 전산화’ 작업부터 시작했다. “기초 한자 4만8,000자에 없는 글자는 일일이 수작업으로 필름을 떠서 만들었죠.” 그래서 빛을 본 책이 ‘조선시대 잡과 합격자 총람’(정문연刊)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정문연 최초의 전산화 작업 주도





    정문연 최초의 전산화 작업으로 기록되는 ‘한국 문화 대백과 사전’ 발간의 핵심이 바로 당시 편찬부장이었던 선생이다. “박사 과정의 제자 20여명까지 불러 밤늦도록 했던 그 작업에서 우리는 국어학자도 잡아내지 못 했던 벼라별 사어를 건져냈어요.” 당시 매년마다 발간했던 유행어 사전격인 ‘어록해(語錄解)’ 등 먼지 쌓인 서책에서 알록달록한 구슬이 쏟아졌다. “혼자 했더라면 10년은 걸릴 일이죠.” 단일 민족의 백과 사전으로는 세계 최대의 것이 그렇게 창조된 것이다.



    ‘반작(反作)’이란 말은 서리들의 상용어로 ‘번지르르하다’란 이두식 표현이며, ‘무면석(無面石)’이란 말에서의 ‘면’이란 ‘개미나 쥐가 슬 면’이란 뜻으로 당시 서리들이 상용했다는 등의 사실이 그 때의 밤샘 연구끝에 밝혀졌다. 한문의 대가도 모르는 표현이었고, 더구나 일제가 피괴시켜 절멸됐던 언어다.



    또 ‘교량’에서 ‘교(橋)’란 마차가 통행하는 다리고, ‘양(梁)’이란 징검다리라는 등등 당시 생활 한자를 이해하려 한 선생의 고집이 죽은 책에 생명을 불어 넣었던 것이다. 모두가 ‘경국대전’을 완독해 전산화하기 위해 거쳐야 했던 일들이었다. 선생은 적어도 ‘경국대전 역주’에 있어서는 북한의 빈약한 번역과는 비교도 못 할 바라고 말한다.



    후학들의 귀감이 되는 선생의 정밀함은 아이러니하게도 15년 실업자 세월의 결과다. 1960년 4ㆍ19 이후, 국민대 교수로 들어 간 1975년까지의 시간을 가리킨다. “다산 선생한테 귀양의 사간이 없었다면 역저들이 나왔겠어요?” 서울대 졸업후 규장각에 들어가 문집 등 사료에 관한 글을 써 받은 약간의 돈으로 호구지책을 대신하던 시기였다.



    “일자리를 얻지 못한 대신, 성균관대의 역사학 교수 성낙훈 선생의 집으로 들어가 8년을 꼬박 공부했다. 이후 경남 산청 산골로 가서 퇴계의 마지막 직계 제자였던 중재 김황(重齋 金榥) 선생에게 가서 5년 동안 경전과 작문을 배우려 했다. “2년밖에 있지 못 한 것은 서울대 사학과에 들어가 박사가 되려는 마음때문 이었어요.”



    서울 한성고교 2학년 당시 역사 선생의 강의에 매료됐던 게 가장 컸다. 법대에 가 봤자 법을 제대로 쓰는 사람을 보지 못했던 우등생은 ‘돈 없고 빽 없는데 공부나 하자’고 마음을 먹게 됐다. 그 선생이 바로 훗날 역사학의 대가로 자리잡은 차하순씨였다.



    고교 2학년 때 검정고시에 통과, 서울대 56학번이 된 선생은 맨 처음 서양사 연구실에 들어가 조교로 일했으나 ‘아무리 잘 해봤자 남의 다리 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문과 일어를 파고 든 선생은 마침 1969년 박사 과정이 신설된 국사학과에 들어갔다.



    당시 대학가를 들끓게 했던 국정교과서 문제를 앞에 두고 백낙청ㆍ 염무웅 등 의식적 지성인들과 창비 동인이었던 선생은 ‘국사 교과서를 비판한다’며 역사의식이 박약했던 당시 국정 교과서를 반대하는 데 앞장섰다. 춥고 배고픈 시절이 뒤따랐다.


    오해 불구, 정부 돈으로 연구에 정진











    또 한번의 계기점은 1980년 정신문화연구원으로 적을 옮긴 일이었다. 10ㆍ26 직후라 사회 분위기는 극도로 흉흉했다. 정문연의 손짓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주변 사람들은 ‘어용 학자가 되려느냐’며 많이들 말렸다.



    그러나 풍찬노숙의 시절을 길게 겪었던 선생은 뭣보다 정문연이 제공하는 훌륭한 연구 환경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깥의 욕, 정부의 간섭 따위에 전혀 눈치 볼 일 없이 연구만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신천지였죠.” 경국대전 역주나 전산화 사업 등은 그 같은 조건 없이는 꿈꾸기 힘든 결과다.



    정부와 지근 거리에 있다는 점이 불필요한 오해를 샀던 것은 사실이다. 선생은 그 같은 풍토가 생긴 것은 일제를 거치면서 정부 기관에 대한 반감이 증폭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문연의 연구비를 받아 놓고 논문 하나 안 쓰면서, 마치 그게 독재 정부에 대한 저항인 양 떠들고 다니는 지식인들을 정문연 한국학 대학원 교수로 재직할 때 많이 보았다고 한다. 이후 국사편찬위원장직을 막 끝낸 것이다. 학자로서 차관급까지 올라간 예는 선생이 유일하다.



    먼저 1년에 15억원이었던 예산을 5년 동안 걸쳐 100억원으로 인상할 것을 요구, 국회에 나가 동의를 받아 내 우선 20억원을 확보한 것을 첫 업적으로 꼽는다.



    이와 함께 실록의 5배에 달하는 ‘승정원일기’를 전산화하는 일에 10년간 매년 15억원씩 확보키로 한 것은 둘째다. 전산화라는 시대적 추세에 맞춰 1년에 100~150억원의 예산으로 규장각ㆍ정문연ㆍ민족문화추진회 등이 함께 하는 역사정보통합시스템(역통사업)에 국편이 책임 연구 기관으로 선정된 것 역시 선생이 노력한 결과다.




    남북 국사연구분야서 통일 물조





    여기까지 본다면 선생의 관심은 기득권에 국한된 게 아니가 하는 생각도 들 법하다. 그러나 2001년부터 박상증(참여연대), 박경서(인권위원장)씨 등과 함게 해 오고 있는 ‘민주화 자료 전산화’ 사업은 정사의 지평을 넓힐 사업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2002년 3월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북한사학자측에게 ‘일본 압제 자료 전시회 공동 연구’를 제의한 것은 국사 연구에서 통일의 물꼬를 트자는 쾌거였다. “제의한 바로 그날 밤, 북한 학자측으로부터 ‘빨리 하자’는 답이 왔어요.” 금강산의 고급 음식점에서 합의문까지 작성됐던 그 안건은 그러나 남북관계가 예민해 진 현재는 답보 상태다.



    예정을 넘긴 인터뷰 탓에 선생은 점심때를 놓쳤다. 서둘러 택시를 잡아타고 길을 재촉한다. 2시 문화재청이 벌이는 ‘종묘 복원 사업’에 자문위원으로 선정돼 처음으로 참석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큰아들 희진(40ㆍ서강대 국사학 박사)씨가 가야사를 전공, 부친의 뒤를 잇고 있다.



    그렇게, 과거와 미래가 함께 가고 있다.



    장병욱기자 aje@hk.co.kr


    입력시간 : 2003-10-0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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