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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06 11:14:46 | 수정시간 : 2003.10.06 11:14:46
  • [추억의 LP여행] 최희준(下)






    1960년대 초반에 결성된 최초의 노래 동아리 포 클로버스는 64년쯤 세시봉에서 멋들어진 화음을 꿈꾸며 킹스턴 트리오의 '탐 둘리' 등을 함께 노래했다. 리더격이었던 최희준은 “멤버들의 개성이 너무 강해 중창단으로는 그저 그랬다”고 회고한다.



    실제로 이들은 보컬 그룹이 아닌 독자적인 솔로 활동으로 각자 확고한 위치를 쌓았다. 명문고ㆍ명문대 출신의 엘리트 가수라는 학벌 프리미엄은 유명세를 부추겼다.



    하지만 포 클로버스의 진정한 평가는 비탄조로 일관된 기존의 트로트와 다른, 밝고 건강한 가요나 외국의 히트 팝송을 보급한 데 있다. 5ㆍ16쿠데타로 침울했던 당시 대중들의 마음을 희망적이고 신나게 변화시킨 새로운 음악적 시도였다. 이들은 63년 패티 페이지나 냇 킹 콜 등 세계적인 외국 가수들의 내한 공연 때는 어김없이 한국 가수들을 대표해 찬조 출연했던 국가 대표급 가수들이었다.



    포 클로버스 멤버들인 최희준, 유주용, 위키리, 박형준은 국제호텔 ‘장글바’에서 자주 어울렸다. 당시 작곡가 손씨는 이들에게 "연예인은 매스컴을 따라 다녀서는 안 된다. 매스컴이 관심을 가질 만한 뜻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최희준 음악인생의 원칙이 되었다.



    60년대는 극장 쇼 무대의 전성기. 1965년 말 전남 여수 중앙극장에서 낮 공연을 마치려는데 객석에서 갑자기 `하숙생`을 불러 달라며 난리가 났다. '하숙생`은 새롭게 시작된 KBS의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이었다. 여수 공연은 이 드라마 주제가가 나간 지 5~6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최희준은 급히 녹음만 마쳤을 뿐 가사를 외우지 못한 터였다. 그런데 드라마 인기가 삽시간에 치솟아 열화와 같이 노래를 청하는 관객들 때문에 그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하숙생`의 인기는 천정부지로 솟았다. 극장 공연에서 이 노래를 세 번이나 앙콜로 부른 적도 있었다. 아무 방송이나 틀면 이 노래가 흘러 나왔다. 일부에서는 "최희준 밖에 가수가 없냐"는 불평이 나왔을 정도였다.



    66년은 최희준 음악 인생 최고의 해였다. 주간한국, 산업경제, 국제신문, 대구신문 등 각종 언론의 최고인기 가수상을 석권한 데 이어 66년 제1회 MBC 10대 가수상 시상식에서는 마침내 `하숙생`, `종점`의 성공으로 가수왕에 처음으로 등극했다. 64년부터 66년까지는 TBC 가요대상을 3연패 하는 등 가히 '최희준 독주 시대'라 할 만 했다.



    이후 67년은 배호, 68년은 남진이 수상을 하고 69년에 다시 남자 가수상을 수상해 건재를 과시했다. 1970년부터는 한국연예인협회 가수분과위원장을 3년간 역임했다. 이후 74년 앨범 <길> 발표 이후 그는 청계5가에서 극장식 맥주홀 ‘아마존’을 운영하다 78년부터는 ‘희준 레스토랑’을 개업하며 사업가로 변신했다.



    이후 12년 만인 86년 가요 인생을 정리하는 의미를 담은 '황혼' 등을 발표하고, 88년 압구정동 현대백화점에서 김현식의 신촌블루스와 한달동안 공연 하는 등 활발한 컴백 활동을 펼쳤다. 90년 엔 `디 모테오`라는 세례명으로 천주교 영세를 받았다.



    94년엔 제1회 한국연예예술상에서 대통령표창을 받고 95년엔 세종문화회관에서 35주년 기념공연과 더불어 기념음반 <새벽>을 발매했다. 이후 1996년 국민회의 공천으로 가수로서는 최초로 제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4년 동안 의정 활동도 했다.



    그러다 2002년 3월 KBS 1TV '가요무대'에 출연하며 음악활동을 재개했다. 그해 6월 저혈당으로 쓰러져 생사의 기로에 섰던 '봄비'로 유명한 후배가수 박인수 돕기 모금공연을 가진 것을 비롯, 재즈 1세대들의 음악회에 참여하는 등 꾸준히 무대에 오르고 있다.



    또 35주년 기념 공연 이후 7년만에 정동극장 무대에서 한달 동안 '최희준 가을밤 콘서트'를 개최하며 녹슬지 않은 가창력으로 건재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 공연에서는 최고의 펑키 기타리스트인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의 록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러 화제를 일으켰다. 두 사람은 1998년 명동성당에서 대부 대자를 맺은 종교적 부자지간이기도 하다.



    이때 신촌블루스의 엄인호, 정훈희, 한영애, 들국화의 전인권, 이수미 등 총 14명의 후배가 앞다투어 게스트 출연을 자청했을 만큼 최희준은 한국 대중가요계에 있어 절대적인 존재이다. 최희준은 철저한 자기桓??스캔들 없는 모범 가수로도 유명하다.



    금년에는 신설된 사단법인 한국대중음악연구소의 이사장을 맡았다. 한국대중음악연구소는 대중음악평론가 강헌씨가 연구소장을 맡아 한국 대중음악사 연구, 아카데미 설립, 대중음악 발전정책 제안 및 포럼 개최, 대중음악 자료의 데이터베이스(DB)화 사업 등을 펼칠 예정이다.



    그는 이사장으로서 연구소를 이끌어 갈 뿐만 아니라 음악 인생 40여 년 동안의 경험과 기억을 자료로 구축하는 작업에도 몰두할 생각이다. "큰 무대는 벅차고 주로 소극장 위주로 내 노래의 추억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고 싶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놓지 않겠다. 무대에서 노래할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이라고 환한 표정으로 말한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입력시간 : 2003-10-06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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