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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06 14:25:53 | 수정시간 : 2003.10.06 14:25:53
  • [추억의 LP여행] 나미(下)






    귀국 후 휴식을 취하던 나미는 솔로 가수로 국내 무대에 복귀하기로 결심하고 록 그룹 '검은 나비'의 오디션에 응했다. 이때가 1979년. 헌데 오디션을 지켜보던 이탈리아 출신의 일본 빅터 레코드사 전속 작곡가 프랑코 로마노가 원더풀을 연발하며 자신의 로마노 밴드 객원 가수로 나미를 영입했다. 귀국 첫 복귀 무대는 타워호텔 나이트클럽이었다.



    활동을 시작하자 곧 소문이 났다. 블루벨즈 출신으로 남성듀엣 '머슴아들'의 멤버였던 장세용이 찾아 와 매니저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나미와 프랑코 로마노 밴드를 그룹 '나미와 머슴아들'로 합쳐 첫 앨범을 제작했다.



    하지만 비자문제로 밴드 멤버들이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솔로로 나섰다. 데뷔 앨범 중 트로트 곡 '미운 정 고운 정'과 댄스 곡 '영원한 친구'가 좋은 반응을 얻었다. 본명인 김명옥 대신 나미라는 예명을 사용한 것이 이때부터. 나미는 육감적인 외모와 우수에 젖은 허스키 보이스에 색소폰, 풀룻, 기타, 베이스, 피아노 등 못 다루는 악기가 없었던 음악적 재능으로 더욱 인정 받았다.



    음반 발매 6개월만에 '미운정 고운정'은 2주 연속 가요 차트 1위를 차지하며 기염을 토했다. '영원한 친구'도 대학가에서 응원가로 애창될 만큼 단숨에 스타로 떠올랐다. 덩달아 밤업소 출연료가 엄청나게 오르면서 동생의 투병생활로 기울어졌던 가세 또한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이후 소속사 문제로 매니저 장세용과 일본에서 돌아온 로마노 사이에 분쟁이 벌어지면서 다소 주춤했다. 하지만 82년 11월 지구레코드와 거금 3,000만원을 받고 2년 계약을 맺는 것으로 인기를 새삼 확인했다. 그녀의 첫 전속무대는 리버사이트호텔 나이트클럽. 이곳에서 80년대의 슈퍼스타 조용필과 함께 무대에 섰다.



    이후 가요계에는 나미를 필두로 방미, 미애, 미희 등 '美자 여가수 선풍'이 일었다. 그룹 출신인 나미는 트로트 가수의 이미지를 벗기 위해 스타 작곡가 이범희와 손을 잡고 9곡에 1,500만 원이라는 가요사상 최고액의 작곡료를 지불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일반적인 곡 당 작곡료는 3~5만원 수준이었다.



    하지만 국내 활동 시작부터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프랑코 로마노가 폐암으로 83년에 사망한 것은 아픔이었다. 이듬해에는 트위스트와 록큰롤을 믹스한 듯한 '빙글빙글'을 발표, 새로운 물결을 주도했다. 언론은 '전국이 빙글빙글 신드롬에 걸렸다'며 나미를 '뉴웨이브 가요'의 선두 주자로 대접했다. 당시 전 세계는 마돈나, 신디 로퍼등 뉴웨이브 풍 여가수들의 전성시대였다.



    나미는 '빙글빙글'을 위해 의상을 경쾌하고 단순하게 변화시킨 것은 물론, 춤도 파도처럼 흐느적거리게 만드는 등 새로운 시도를 했다. 이 노래는 85년 최다 방송 가요로 기록되고 KBS-TV '가요 톱 10'에서 5주 정상을 고수해 골든 컵의 영예를 안겨 주었다. 2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한 이 음반은 당시 KBS 라디오 조사에 의하면 주한 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인기 가요이기도 했다. 인기몰이는 일본 킹레코드에서 싱글음반을 발표하는 등 일본무대 진출 길까지 터 주었다.



    '디스코의 요정'으로 떠오른 그녀는 5집 앨범에서 각기 개성이 다른 '유혹하지 말아요', '보이네', '슬픈 인연', '나비' 등 4곡을 동시에 히트시켜 화제의 주인공에 올랐다.



    결국 85, 86년 KBS, MBC 등 양대 방송은 그를 10대 가수상의 정상에 등극시켰다. 솔로 활동 7년만인 86년 그녀는 '나미와 불새'라는 7인조 그룹을 결성해 해외 진출을 꿈꾸기도 했다. 87년 3월엔 신곡 발표 및 팬 클럽 결성을 위해 국내 첫 디스크 콘서트를 개최했다.



    또한 에바스 화장품 CF모델로도 나서고 87년 '사랑이란 묘한거야'로 골든 디스크상을 수상하는 중단 없는 히트 퍼레이드를 벌였다. 88년엔 앙드레김과 롯데호텔에서 패션쇼를 겸한 조인트 디너쇼를 열기도 했다. 89년 3월 트로트 열풍을 감지한 그녀는 발라드 풍의 트로트 가수로 다시 변신을 꾀했다. 6집 '미움인지 그리움인지'로 가요 차트에 다시 진입한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홍보도 하지 않은 '인디언 인형처럼'이 심상치 않은 반응을 몰고 왔다. 팬들은 댄스가수 나미를 원했다. 이에 평범하게 불렀던 이 노래를 DJ 붐붐과 함께 색다른 패턴으로 재 취입을 시도했다. 독특한 춤과 더불어 랩을 도입해 리믹스 댄스 뮤직으로 거듭난 '인디언 인형처럼'은 가히 폭풍 같은 반응을 일으켰다.



    특히 나미의 헤어스타일은 새로운 유행의 기준이 되었다. 서울 시내 미용실에는 나미의 '추장머리 스타일'을 요구하는 고객들이 줄을 섰고 인형 가게에선 벌거벗은 모습으로 춤을 추는 검은 인디언 인형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청소년층에는 가히 '나미 신드롬'이 생겨났다.



    마침내 KBS2 TV ‘가요톱10’에 2주 연속 재등극하면서 이 곡은 최대의 히트곡이 되었다. 그 결과 87년에 이어 90년 골든디스크상을 수상하고 진유영 감독의 영화 '독재 소공화국'에 발탁되는 행운까지 안았다.



    이후 사생활 문제 등으로 침체에 빠진 그녀는 92년 윤시내와 함께 한 조인트 음반 발표 후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5년만인 96년, 댄스곡 '설득' 등 싱글 앨범을 발표하며 활동을 재개한 그녀는 97년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개인콘서트를 열며 건재를 과시했다.



    이후 2000년 반포에 한정식 레스토랑 '야미'를 오픈하며 사업가로 변신했다. 현재 나미는 연예기획사 ‘양지기획’의 대표 최봉호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낳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kschoi@hk.co.kr


    입력시간 : 2003-10-06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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