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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07 12:17:03 | 수정시간 : 2003.10.07 12:17:03
  • '환율전쟁'
    달러화 약세 정책으로 환율 급락, 주식시장 폭락
    美, 위안화·엔화 절상압력에 中·日 반발




    “환율은 시장 메커니즘에 의해 결정돼야 한다. 유연한(flexible) 환율 제도가 바람직하다.” 두바이(아랍에미리트)에서 열린 선진 7개국(G7) 재무장관ㆍ중앙은행 총재 회담에서 채택한 성명은 매우 원론적이었다. 언뜻 보면 각국 통화 정책의 ‘ABC’를 재확인한 것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행간에는 엄청난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오랜 기간 지속해 온 미국의 ‘강한 달러’정책의 포기, 다시 말해 본격적인 ‘약(弱) 달러’ 시대를 예고한 것이다. 환율이 급락하고 주식 시장이 폭락하는 등 시장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표현만 완화됐을 뿐 달러화의 약세를 용인키로 해 엔화의 가치를 무려 두 배 이상 절상시킨 1985년 ‘플라자 합의’의 재판이 될 수 있다는 우려였다.

    이번 합의의 직접 타깃은 위안화를 달러에 고정시켜 사실상 고정환율제를 운용하고 있는 중국과, 외환 시장에 정부가 개입해 엔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낮게 유지해 온 일본 등 아시아 국가였다. 한ㆍ미 재계회의에서 프레드 버그스텐 미국 국제경제연구소장은 “중국 위안화의 25% 절상을 전제로 원화의 10% 절상이 바람직하다”며 아예 노골적인 아시아 공세에 나서기도 했다.

    중국과 일본의 저항은 거세다. 중국은 곧 바로 “달러 페그(달러 당 8.23위안)제를 폐지할 수 없다”고 못박았고, 일본 정부 역시 “엔화 절상 흐름은 너무 빠르다”며 여전히 시장 개입 가능성을 내비쳤다. 미국과 중국, 일본 등 강대국들이 벌이는 한치의 양보 없는 ‘환율 전쟁’이 시작된 것. 과연 그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나라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일까.


    G7 성명서에 담긴 미국의 속셈은



    미국의 선택은 이미 예견됐다. 미국이 현재 겪고 있는 ‘쌍둥이 적자’ , 즉 경상 수지와 재정 수지 적자는 스스로 감내하기 힘든 수준에 이르렀다. 올 상반기 경상수지 적자는 2,700억 달러를 넘어섰고, 2003 회계연도(2002년10월~2003년9월) 연방 정부 재정 적자는 4,550억 달러로 추산되고 있다.

    더구나 이라크 통치 비용과 대규모 감세 조치에 따른 세수 감소는 쌍둥이 적자 규모를 눈덩이처럼 불리고 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있는 부시 행정부로서는 사면초가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번 G7 성명의 의미는 미국이 유럽과 공동 보조를 취해 아시아권, 특히 중국과 일본을 겨냥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지난해 미국이 기록한 무역 적자는 4,680억 달러. 이 중 중국(22%)과 일본(15%) 두 나라가 차지한 비율은 무려 37%에 달했다. 모건스탠리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스티븐 로치는 최근 보고서에서 이렇게 해석했다.

    “그동안 미국이 대부분 짊어져 왔던 세계 경제에 대한 부담을 중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와 유럽이 나눠지자는 것이다. 그간 미국은 강한 달러 정책으로 무역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반면 일본 등 아시아 국가는 인위적으로 외환 시장에 개입하면서 반사 이익을 챙겨왔다.” 중국 경제가 ‘약한 위안’을 무기로 급속도로 팽창하고 바닥을 헤매던 일본 경제가 모처럼 회복세로 접어들고 있는 바로 지금이 ‘달러 약세’를 위한 적기라고 판단한 것이다.


    일본, 그리고 중국의 저항은 어디까지



    일본은 G7 멤버 중 하나. 통화 전쟁의 당사자인 일본 역시 이번 합의에 동의를 해준 것이다. 유럽이야 중국, 일본 통화의 평가 절상을 통해 과실을 얻겠다는 계산을 했겠지만, 일본이 암묵적으로나마 이번 성명에 동의를 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메리츠 증권 고유선 이코노미스트는 이를 두고 이런 해석을 했다.

    “최근 회복세를 보이는 일본 경제 지표를 감안할 때 더 이상 달러 약세를 거부할 명분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궁극적으로는 엔화 절상을 막고서는 중국 위안화 절상을 강제할 수 없다는 것에 미국, 유럽과 이해 관계를 같이 했을 것 같다.” 언제까지나 ‘환율 조작국’ 의 오명을 뒤집어쓸 수는 없는 상황에서 실리를 챙기는 쪽으로 전환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본이 달러 약세를 무한정 용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신임 재무장관으로 임명된 다니가키 사다카즈 장관은 G7 합의 직후 “환율은 안정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엔고(高)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달러 약세라는 대세는 받아들이되 경제 회생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기 위해 엔화 강세를 막기 위한 개입의 끈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일본에 비해 중국의 저항은 더욱 거셀 것이 분명하다. 정치ㆍ군사적으로 일본과 달리 미국의 우산에서 벗어나 있는 데다, 아무리 경제가 급성장하고 있다지만 최소한 신흥시장국(이머징 마켓)으로 명함을 내밀려면 향후 10년 가량은 고성장이 필요한 탓이다. 저유샤오촨 인민은행장이 “궁극적으로 변동환율제를 도입하겠지만 현재로서는 구체적 시점을 알 수 없다”는 입장만을 표명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여느 때보다 강경한 미국의 압력을 마냥 무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특히 미국이 극단적으로 ‘통상법 301조’를 들고 나올 경우 다른 국가들도 무역 보복 조치에 동참할 수 있는 상황이다. 금융연구원 신용상 연구위원은 “변동환율제 도입 등의 급격한 조치는 중국 경제가 치명타를 입을 수 있는 만큼 복수통화바스켓제도 등을 통해 제한적으로 소폭 절상하는 선에서 타협점을 찾으려고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환율 전쟁 속 한국의 득실



    원ㆍ달러 환율은 G7 성명 이후 1,150원 벽을 지켜내고 있지만 ‘달러 약세’ 공세가 계속될 경우 하향 돌파는 불가피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전망이다. 이미 112엔대까지 떨어진 엔ㆍ달러 환율과의 동조화가 이뤄질 수밖에 없기 때문. 전문기관들이 예측하는 연말 환율은 1,100~1,140원. 지난해 1,300원을 웃돌았던 것을 감안하면 1~2년 새 무려 15% 가량의 원화의 절상이 이뤄진다는 얘기다.

    원화의 절상은 우리 경제에 짐이 될 수밖에 없다. 달러 외채가 많은 기업에는 득이 되고 수입 물가도 내리는 등 반사 이익도 있겠지만 수출 손실은 이를 훨씬 능가할 수밖에 없는 탓이다.

    LG경제연구원은 원화 가치가 10% 오를 경우 국내 제조업체의 매출액이 5.1% 가량, 경상이익률(경상이익을 매출액으로 나눈 것)은 3%포인트 가량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무엇보다 가장 우려되는 대목은 중국이 강력히 저항하는 가운데 원화 가치만 상승하는 경우. 상당한 부문에서 중국 제품과 경쟁을 해야 하는 우리나라로서는 당장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원화 절상의 영향이 부정 일색인 것만은 아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원화 절상이 대 중국 경쟁력에서 타격을 입기는 하겠지만 중국이 위안화 약세를 통해 수출 경쟁력을 유지하는 한 한국 등 주변국도 득을 볼 수도 있다고 평가한다.

    현대증권 이상재 경제조사팀장은 “지금까지 중국의 수출증가율과 우리나라의 수출증가율이 정비례해 왔다”며 “이는 중국 수출이 늘어나면 중간재 수입이 늘어나고 또한 중국 내수 경제가 좋아져 한국으로부터의 소비재 수입이 늘어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물론 시차는 있겠지만 ‘달러 약세 →미국 경제 회복 →세계 경제 회복→한국 경제 회복’의 시나리오도 기대해 볼 수 있다.

    이번 환율 전쟁은 짧게는 내년 미국 대선까지, 길게는 2~3년 정도 계속될 것이라는 게 대체적 견해. 전문가들은 이렇게 경고한다. “이번 전쟁의 타격을 최소화하는 것은 대처하기 나름이다. 면밀한 분석과 장기적인 플랜 없이 임시 처방식 대책으로 일관할 경우 우리나라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이번 전쟁의 최대 피해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영태 기자 ytlee@hk.co.kr


    입력시간 : 2003-10-07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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