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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07 16:37:57 | 수정시간 : 2003.10.07 16:37:57
  • [추억의 LP 여행] 이원재(上)
    클래식에서 대중음악으로 이주현ㆍ조동진이 길 터줘



    이원재만큼 특이한 삶을 살아온 포크 가수도 없을 것이다. 한양대 음대 기악과에서 클라리넷을 전공한 순수 음악도였다는 사실도 그렇고, 한때는 '제 2의 김민기'로 불릴 만큼 주목받던 싱어 송 라이터인 그가 수 만장의 음반을 소장하고 있는 소문난 콜렉터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하지만 그가 운전 면허증은 물론 단 한 장의 신용 카드도 없이 살아가는 원시인이라면 믿겠는가. 그는 숨겨진 또 한 명의 80년대의 포크 아티스트임에 분명하다.

    이원재는 신촌전화국 국장이었던 부친 이영현씨와 모친 이양분씨의 3형제 중 막내로 1959년 3월 26일 서울 보문동에서 태어났다. 음악을 좋아했던 부모님 탓에 전축은 물론 릴 테이프 녹음기까지 있을 만큼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성장했다. 3살 때 처음 전축을 통해 그의 귀를 관통한 음악은 일본의 국민 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노래였다. 곧바로 노래를 따라 불렀을 만큼 음악성은 타고 났다.

    경기중학을 차석으로 들어갔을 만큼 수재였던 작은형 이원규는 종로 쉘브르에서 노래 아르바이트를 했던 아마추어 통기타 가수였다. 큰 형 이원태는 책가방과 함께 폴 앵카등의 판을 끼고 다녔던 음악광이었다. 큰형은 늘 전축 앞에 어린 이원재를 앉혀 놓고 트위스트를 가르치며 팝송을 들려준 음악 메신저였다.

    부친은 일본 엔카와 클래식을 선호했고 어머니는 이미자, 이난영 등의 전통 가요를 좋아했다. 이처럼 그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공존하는 집안환경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 그는 놀기 좋아하고 운동 잘하는 아이였다. 큰 형 손을 잡고 청계천 음반 가게를 돌아 다니기 좋아했던 그는 보문동 대광초등학교에 입학해 농구 선수를 했다. 5학년 때 홍익 초등학교로 옮겼다.

    휘문중학 때는 스케이트에 미쳐 아이스하키 선수가 되었다. 기타를 처음 접한 것은 중학교 때 작은형의 최고급 가야 수제품 기타. 형 몰래 독학으로 기타를 익혔다. 당시 그를 매료시킨 음악은 멜로디컬한 비틀즈, 피터 폴 & 메리나 프로그레시브한 핑크 플로이드의 노래들. 이때까지 그는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철없던 아이였다.

    연합고사 1기인 그는 집에서 50m거리에 있던 아이스하키 명문 경성고를 희망했으나 마포고로 추첨 배정되어 운동을 그만 두었다. 대신 밴드부에 들어가 드럼을 배웠다. 하지만 "클라리넷만 잘하면 공부를 안 해도 대학을 갈 수 있다"는 선배의 말에 귀가 솔깃해 클라리넷을 잡았다. 하지만 1학년이 끝날 때까지 애국가조차 연주를 못했던 밴드부의 고문관이었다.

    1학년 가을 어느 날, 느닷없이 빚쟁이들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어머니가 사기를 당했던 것. 마포 도화동 산동네로 이사를 했다. 애지중지 모아온 음반을 길바닥에 팽개치고 몸만 가야 했다.

    그는 "내 평생 그 때 가장 많이 울었다"고 털어 놓는다. 74년 10월 고3 때. 인생의 분기점이 되는 일이 생겼다. 울적한 그를 위로하기 위해 절친한 친구 공준원은 광화문의 '왜 그럴까'라는 분식집으로 데리고 갔다. 뮤직박스가 있는 분식집 안에는 록 음악이 터져 나왔다. 그곳에서 20살 된 DJ형을 만났다. 후에 들국화의 리더가 된 돗수 높은 안경에 더벅머리의 전인권이었다.

    당시는 전인권이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DJ를 하던 무명의 시절. 책가방에 음반을 넣고 다니는 이원재와 전인권은 단숨에 친해졌다. 이후 작은형과 서울대 노래동아리 '메아리'의 창립 멤버인 이경호와 가수 문무상, 후에 정수라와 함께 '아! 대한민국'을 불렀던 장재현, 아이돌 스타 김만수, 그리고 '눈이 큰 아이'로 유명했던 김홍경등이 합세했다.

    75년, 학생들이었던 이들은 대담하게 세종문화회관 뒤에 '개여울'이라는 분식 센터를 오픈했다. 한국 최초의 라이브 분식 센터였다. 모두다 장발인지라 노래하다 경찰에게 잡혀가기 일쑤였다. 하지만 저녁때 빙 둘러앉아 술 한 잔 하며 음악, 인생, 철학을 논했다.

    아름다운 시절이었지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고민 또한 많았다. 이 시절 고등학생 이원재는 창작의 물꼬를 텄다. 첫 창작곡은 '좋아'. 스스로 우울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곡이었다. 이 곡은 데뷔 음반의 타이틀 곡이 되었다. 고3이 되자 정신을 차리고 하루 3시간만 자고 13시간 동안 클라리넷만 불며 대입 준澍?몰두했다.

    그 결과, 중앙대 주최 음악 경연 대회에서 1등 상을 수상했다. 예능 특기생으로 뽑힌 그는 특차로 한양대 음대 기악과에 합격했다. 이후 클래식에만 몰두했던 그는 대학원에 진학해 1년 간 공부하다 육군에 입대했다. 이 때 같은 군용 열차엔 김수철이 타고 있었다. 그는 논산 훈련소 군악대에 배속되었다. 이후 당시 최고인기프로그램이었던 MBC의 ‘영11’ 진행자 이택림이 입대, 함께 밴드를 만들어 군 공연을 다녔다.

    84년 제대를 하고 다시 전인권을 찾아 갔다. 안경도 벗고 더벅머리에서 사자머리로 변한 전인권을 따라 용평리조트에 가 윤형주, 이규대가 주도했던 용평 팝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대마초로 활동 금지를 당했던 가수들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김수철은 "클래식 때려 치우고 대중 음악을 하라"고 했다.

    결정적으로 대중 음악을 하게 만든 장본인은 조동진. 조동진은 자신의 3집 '제비꽃' 음반 세션으로 그를 스카웃했다. 다시 대중 음악을 해보니 싫지 않아 '들국화' 창단에 참여했다. 이때 멤버는 전인권, 조덕환,허성욱,이원재 4인조였다. 첫 방송무대는 서세원이 진행하던 MBC 라디오 '별밤'. 서세원의 주선으로 '무당'의 롯데 호텔 콘서트에서 '들국화'는 게스트로 올랐다. 들국화의 공식적인 첫 활동무대였지만 이원재에게는 마지막 무대였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입력시간 : 2003-10-07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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