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추억의 LP 여행] 이원재(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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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10 17:05:00 | 수정시간 : 2003.10.10 17:05:00
  • [추억의 LP 여행] 이원재(下)
    음악적 시련과 좌절딛고 가스펠 가수로 새인생



    대학로 '파랑새'극장 개관에 맞춘 들국화의 창단 공연에 참여를 할 즈음 이원재는 중요한 음악적 계기를 맞이했다. 중학 시절부터 음악 우상이었던 이주원과 만났다. 가슴이 뛰었다. 그는 '따로 또 같이'의 3, 4집 앨범과 콘서트 세션으로 함께 음악을 했던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때가 1987년 초. 이주원은 음악 스승이었다. 어떤 마음 자세로 곡을 써야 되는지 알려 준, 그의 음악적 조언은 이원재를 포크의 세계로 인도하는 징검다리가 되었다.

    "중학교 2학년 때 김민기의 노래를 접하면서 처음으로 쇼크를 받았다. 두 번째는 조동진과의 만남이었고 이주원을 만나면서 처음으로 무슨 음악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클래식과 대중 음악 사이에서 선택의 갈등을 느끼며 그는 자신의 음악을 하고픈 갈증을 느꼈다. 그래서 87년 데모 테이프를 들고 서라벌레코드로 찾아갔다.

    동아기획 김영 사장은 당시 유재하(작고)와 이원재 두 신인 가운데 한 명의 음악을 선택해야 했다. 유재하를 젖히고 자신의 음악이 선택되자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주변의 시샘 때문에 치명적인 마음의 상처를 입혔다. 유일하게 그의 편을 들어준 사람은 전인권과 이주원. 외골수인 그는 자신을 시기하는 분위기에 심한 화병을 앓으며 쓰러졌다. 병원에서도 회복 불능 진단이 내려질 만큼 삶의 의욕을 잃어갔다. 그는 선뜻 기타를 빌려준 전인권의 도움으로 어렵게 1집 녹음을 마쳤다.

    당시는 민주화 항쟁으로 온 세상이 어두웠던 시절. 우중충한 분위기의 재킷 그림은 그가 느낀 '우리나라 하늘 색깔'을 후배가 그려 준 것이었다. 데뷔 음반은 제법 반응이 좋았다.

    하지만 병마에 시달리며 발표한 지라 본인은 음악적인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2년 후인 89년, 포크 록 적인 분위기의 2집을 발표했다. 1집 보다 반응은 더 좋았지만, 본인은 "목소리 톤도 그렇고, 못마땅한 음반"이라고 털어 놓는다. 주변 사람들의 참견으로 너무 대중적으로 간 2집은 사실 본인이 아닌 다른 가수들을 염두에 두고 만든 곡들이었다. 2집 녹음 때는 이원재는 76kg의 체중이 54kg로 떨어질 만큼 건강이 악화되었다.

    2집 발표 후 사람을 만나기 싫어지면서 음악도 싫어져 기타도 팔아 버렸다. 그리곤 후배의 카페에서 2년 간 DJ생활을 하며 틀어 박혔다. 신촌의 카페 우드스탁에서는 "이원재가 죽었다"는 루머까지 나돌았다. 방황의 시기에 당시 홍대 미대생이었던 아내 이은애를 만났다. 아내의 사랑은 창작을 샘을 다시 솟아 오르게 한 한줄기 빛이었다.

    때마침 서라벌레코드에서 3집 음반 제작 섭외가 들어왔다. 문제의 3집 '하늘과 바보'. 힘든 세월 속에 자신의 솔직한 넋두리를 담았다. 하지만 '가사 내용이 너무 선동적'이라는 이유로 '푸른 하늘'이 검열에 걸렸다. 정부측의 시선을 무시해 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판매 금지 처분이 내려지고 음반은 전량 수거되었다.

    마스터 음원도 빚쟁이들에 의해 분실되었다. 크레용으로 동심 세계를 그려 재킷 제작에 도움을 준 아내의 정성에도 불구, 녹음 기간 중 부인이 유화 작업 중 실수로 3도 화상을 당하는 불운을 겪기까지 했다. 3집은 또 다시 좌절만 안겨주었다.

    이후 화상으로 인해 기타를 칠 수 없게 되자 견딜 수 없는 시련에 무너졌다. 일어나기만 하면 구토를 해 걷지도 못하는 암흑의 시절이었다. "전공도 내팽개치고 옷 장사 등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아내의 고생은 극심했다."고 털어놓는 그의 눈가엔 이슬이 맺혔다.

    94년 여름 어느 날, 후배인 고 김광석이 집으로 불쑥 찾아왔다. 김광석은 자신의 세실극장 공연에 이원재를 게스트로 세웠다. 러닝 셔츠에 슬리퍼 그리고 3일간 세수도 하지 않은 몰골로 꽉 찬 관중 앞에서 선 그는 김광석의 소개로 창작곡 '칡'을 불렀다. 다시 음악을 하게 된 된 계기가 된 가슴 뭉클한 순간이었다.

    두 사람은 노찾사 시절의 김광석 때부터 서로의 고민을 털어 놓던 사이였다. 김광석은 유난히 이원재의 '칡'을 좋아했다. '칡'은 군악대 시절, 월동 준비를 위해 싸리비를 준비하러 산골 마을로 갔을 때 부모의 버림을 받고 할아버지와 외롭게 살고 있던 8살 어린 아이의 슬픔을 동요처럼 만들어 본 곡이었다.

    게스트를 쓰지 않는 가수로 유명했던 김광석은 이원재 만은 강제로 게스트로 올렸다. 그는 재기를 도와준 은인이었다. 김광석의 주선으로 프로젝트 팀인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를 결성했다. 하지만 녹음때는 노찾사 1기 조경옥 만이 남아 '뜬 눈'을 불렀고 나머지 노래는 이원재가 다 불러야 했다. 사실상 4집이라 할만한 96년에 나온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1집 CD다. 양병집이 70년대에 번안했던 '역'을 이원재는 어린이와 함께 불러 주목을 끌었다.

    99년 친하게 지내던 시완레코드의 성시완씨가 4집 '인생'을 발매해 주었다. 이후 종교를 가지게 된 그는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교인들을 위해 기타로 교회 성가대 반주를 하고 있다. 밝은 마음을 갖자 건강도 회복되기 시작했다.

    2001년 어느 날 교회 교지에 수록된 '당신을 향한 예수님의 편지'라는 장문의 글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가슴을 친 작자 미상의 글은 곧바로 6곡으로 만들어졌다. "좋은 곡은 의도적인 것보다는 이렇게 갑자기 내려온다"는 생각이 들자 새로운 창작의 세계가 보였다.

    "전인권은 타고난 록커가 아니라, 멸시받는 환경을 딛고 노력해 올라선 예술가다. 나는 그의 정신을 본받으려 한다." 그는 요즘 일반 대중도 편하게 들을 수 있는 가스펠 포크에 전념하고 있다. 2004년 말께는 8년 만에 그의 신보를 만나게 될 것 같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입력시간 : 2003-10-10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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