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김동식의 문화읽기] 플래시 몹의 텅 빈 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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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15 11:26:45 | 수정시간 : 2003.10.15 11:26:45
  • [김동식의 문화읽기] 플래시 몹의 텅 빈 충만


    올해 8월 17일 산타모니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일군의 무리가 대형 전광판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는 각자 준비해 온 리모콘을 동시에 꺼내들고 전광판을 향해서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리모콘을 누른다고 전광판의 채널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에는 즐거움이 넘쳐난다.

    주변의 사람들은 ‘뭐 하는 짓인가’라는 생각을 하며 멀뚱하니 쳐다보았겠지만, 모임의 성격을 파악하기도 전에 리모콘 부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썰물처럼 사라진다.

    금년 여름부터 세계의 여러 대도시에서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끼리 번개처럼 모여 짧은 시간 동안 괴상한 짓을 한 뒤 순식간에 사라지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이들을 ‘플래시몹’(flash mob)이라고 부른다. 6월 미국의 뉴욕에서 시작된 이래로 마치 전염병처럼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문화적 현상이다.

    뉴욕의 플래시모버들은 장난감 가게에 전시된 공룡이 포효하자 갑자기 땅에 꿇어앉아 경배를 보냈고, 로마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한 대형서점에 몰려와 존재하지도 않는 책을 주문하다가 사라졌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동상처럼 굳어버린 사람들이 바닥에 드러눕는가 하면, 동경에서는 매트릭스의 복장을 한 일군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한국에서는 지난 8월 30일 강남역에서 ‘안녕하세요’라는 인사와 함께 최초의 플래시몹이 있었고, 9월에는 명동에서 시체놀이를 연출해서 사람들을 잠시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인터넷에 마련된 카페(cafe.daum.net/flashmob)의 설명에 의하면, 플래시몹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인터넷이나 휴대폰을 이용하여 미리 지정된 시간과 장소에 집결한 뒤에 모버레이터들이 나눠준 지시서에 따라 짧은 시간동안 의미 없는 행동을 하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행위를 말한다.

    오프라인에서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번개(모임)’와 비슷하지만, 그 형식은 상당히 다르다. 번개가 온라인의 익명성을 넘어서 일상적인 대면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플래시몹은 온라인의 익명성을 오프라인에서도 고스란히 유지한다. 또한 ‘번개’가 가지고 있는 친교의 차원 또한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플래시몹은 사교도 아니고 축제도 아니고 시위도 아니다.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쓴 박영신 씨의 지적처럼, 플래시몹은 시(詩)와 놀이가 결합된 양상이며 초현실주의적인 유머에 가깝다.

    플래시몹의 기본 정신은 ‘그냥 재미있으니까’(just funny)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표현은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공공질서를 해치고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주면서까지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한다는 이기적인 태도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페의 게시판에 게재된 글들을 읽어 가는 동안, 플래시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진지하고 순수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이나, 상업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 그리고 사회정치적인 메시지를 표현하는 행위들을 스스로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특정한 의미나 목적에 종속되는 순간 플래시몹이 추구하는 유희의 순수성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플래시몹을 철학적인 용어로 규정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목적 없는 합리성(칸트)과 순수 유희의 상상력이 결합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희의 순수성 또는 순수 유희의 상상력은 플래시몹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가치 있는 의미를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는다. 또한 사회적 법규나 금지를 파괴하고 위반해야 한다는, 위반의 강박관념에도 시달리지 않는다. 상업적인 플래시몹뿐만 아니라 반전(反戰) 플래시몹까지 반대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플래시몹이 구태여 정치적 퍼포먼스나 계몽적인 캠페인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타인에게 불편함을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 의미나 목적으로부터 일시적으로 자유로운 놀이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정말로 희소해서 가치 있는 것은 정치적 퍼포먼스나 계몽적인 캠페인이 아니라 순수 유희의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게시판의 여러 글들을 읽어 가는 과정에서 ‘왜 그런 바보같은 짓들을 하는 거지?’라는 생각은 더 이상 가지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물신(物神)과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아무런 의미나 목적도 없이 ‘그냥 재미있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10월 25일에는 전세계에서 동시다발적인 글로벌몹이 펼쳐질 것이라고 한다. 의미과잉의 시대를 즐겁게 비켜가는 휘발성의 무의미들과 만나게 된다면, 비록 잠시 동안이겠지만 무척이나 유쾌할 것 같다.



    김동식 문화평론가 tympan@empal.com


    입력시간 : 2003-10-15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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