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한국 초대석] 국민대 미술학부 신장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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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2.18 13:51:12 | 수정시간 : 2003.12.19 16:12:16
  • [한국 초대석] 국민대 미술학부 신장식 교수
    10년의 그리움 담은 금강산의 실경과 진경
    서울 한복판서 만나는 꿈의 산, 세번째 개인전




    사진= 최규성 차장



    금강산의 꿈에 물들지 않은 곳이 없다.

    한쪽 벽을 가득 메우다시피 한 대형 화폭에서 한 자 짜리 습작품까지, 나아가 10여개의 가부좌상까지, 곳곳이 금강산의 꿈에 취해 있다. 12월 27일까지, 사비나 미술관은 서양화가 신장식(43ㆍ국민대 미술학부)교수가 살포해 놓은 금강산의 꿈에 포위돼 있다. ‘10년의 그리움, 금강산’.

    미술과는 거리가 먼 50~60대를 불러 들여, 마침내는 그리움에 젖게 한다. 그들이 전체 관객의 7할이다. 나머지는 소문을 듣고 찾아 온 20~30대. 뾰족 뾰족한 기암괴석 사이로 풍성히 나래를 펼친 아름드리 나무의 그림은 잊혀져 있던 산하를 서울 한복판으로 불러 오기에 족하다.

    미술관 설립 이후 처음으로 사본을 즉석에서 만들어 판매하는 시도가 곁들여져 행사의 의의를 더해 준다. 일반의 반향을 고려한 미술관측에서 한국 휴렛패커드사와 제휴, 전시돼 있는 그림을 고화질의 컴퓨터 영상으로 출력해 제공한다. 출입구 부근에 준비돼 있는 HP 디자인젯 5500이 슬라이드 형태로 컴퓨터에 내장돼 있는 영상을 포토샵 프로그램으로 장당 3만원에 판매하는 것이다. 하루 평균 10명 남짓의 관객들이 이용하고 있다.

    2층 전시장은 신씨의 체취가 더욱 가까이 느껴지는 곳이다. 공중에 매달려 있는 7개의 크고 작은 결가부좌상이 관객의 시선을 사로 잡는다. 2001년 신씨가 세번째로 금강산에 다녀 온 뒤, 자신과 금강산의 관계를 형상화해 본 작품이다.

    ‘금강산 명상’이라 이름 붙여진 이 한지 조형물은 먼저 찰흙 소조물을 만들고, 거기서 뜬 얇은 석고틀에 한지를 붙여 만든 것. 원래는 1년 열두달을 상징하는 12개였으나 거기서 전시에 합당한 7개가 추려진 것. 불상처럼 좌정해 있는 형상들 가운데 어떤 것에는 단풍이 물든 산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또 어떤 것에는 쇳가루가 칠해져 숯검댕이를 뒤집어 쓴 듯 새까맣다.

    금강산을 보고 싶은 마음과, 식은 죽 끓듯 하는 남북 정세에 따라 닫혔다 열렸다 하는 사정을 지켜 봐야 하는 자신의 심정이 표현돼 있다.


    금강산은 민족 명화의 영원한 주제



    2층에는 또 직접 만든 영상물이 대형 화면으로 한쪽벽을 가득 메꾼다. 금강산을 소재로 한 조선 시대의 명화, 일제 시대의 빛바랜 사진첩, 신씨의 금강산 그림 등이 모두 320여 컷이다. 한 번 갈 때마다 700~800컷 정도로 찍어 온 사진을 추려 낸 것들이다. 만물상, 옥류동, 해금강 등 세 코스로 나눠진 금강산 관광길에 따라 분류 전시돼 있다.

    ‘미군 철수’ 등 북측에서 만든 대형 선전판의 광경도 그대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금강산의 실경이고 진경이다.



    “고려에서부터 시작해 겸재 정선과 구한말을 거쳐 소정 변관식에 이르기까지 명화의 주제로 등장했다, 한동안 절멸됐던 민족의 성지를 되살리고 싶었어요.” 실제로 밟을 수 없었던 산하라는 뜻보다는, 그림의 소재로 끊겨 있었다는 뜻이 더 강하다. 아무도 그릴 생각을 못 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금강산을 두 눈으로 볼 수 없었던 때에도 그는 금강산을 그렸다. 바로 1993년~1998년 동안 그렸던 금강산 그림들이다. 그는 그것을 가리켜 “관념 산수화”라고도 했고, “10년 그리움의 시작”이라고도 했다. 지하에 전시된 1995년작 만물상 그림이 대표적이다. 1980년대, 일본 사진작가 구보타 히로치가 찍어 출판한 금강산 화보를 보고 그렸다.

    그는 직접 가서 보지 못 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운무가 잔뜩 끼어 뿌연 산 그림 위로 정방형을 겹친 것이다. “창을 통해 멀리서 금강산을 본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는데, 당시 관객들은 휴전선 철책이 가로 막힌 현실을 표현하다 보니 그런 그림이 나왔다고 나름대로들 해석했나 봐요.” 그 그림, ‘금강산 만물상’은 이번 전시회 팜플렛?표지로 쓰였다. 각별한 애정을 표시한 셈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히려 “젊은 화가가 가 보지도 않은 금강산을 잘 그렸다”며 기특하고 신기해 했다. 별 반응을 얻지 못 하던 그의 ‘관념 금강 산수화’가 적극적 반응을 얻기 시작한 것은 1995년 서울 강남 표갤러리에서 열렸던 초대전부터였다. 강남의 갤러리 이콘에서 초대전 형식으로 첫 금강산 전시회가 열린 지 2년만이었다.

    금강산 만물상이 실경 산수화로 맨 처음 되살아 난 것은 1층에 전시돼 있는 ‘1998년 11월 21일’이다. 날짜가 제목으로 돼 있을 만큼, 본인에게는 뜻 깊은 날이었다. 하루 전 장전항에 도착, 온정리를 거쳐 맨 처음 금강산을 본 날이다. 금강산도에서 오직 산만을 그렸던 그가 유일하게 인물을 등장시킨 그림이다.

    등산로를 따라 만추의 명산을 오르는 남한의 동승객들이 크고 작게 깔려 있다. 화폭에 되도록 많은 풍광을 담으려는 마음에 사진을 이용해 완성시킨 그림이기도 하다. 모두 8장으로 돼 있는 이 대형 그림은 갖고 간 카메라를 이용해 찍어 둔 8컷을 한지와 아크릴을 이용해 캔버스상의 한지에 재현시킨 것이다. 거의 한바퀴나 다름 없는 270도에 걸치는 장대한 광경이 선명한 이미지로 묘파된 것이다.

    “금강산 나물 비빔밥도 먹고 그곳 주민과도 만나야 되는데, 금강호에서 준비한 뷔페식으로 달래야 했어요.” 첫 금강산행은 이 같은 아쉬움에다 묘한 긴장감이 뒤섞여 겨울 산의 느낌을 주었다. 개골산(皆骨山)이라는 겨울 금강산의 이름 그대로였다.

    두번째인 1999년 4월의 산행은 이문열 박범신 등 문화계 인사들과 함께 들렀다. 금강산 그림전을 기획한 모 신문사 주최로 열린 당시는 화가 15명이 동행해 때 아닌 사생 대회가 열렸던 셈이다.

    그러나 산세와 전망 좋은 곳 등을 지난 번에 눈 여겨 봐 두었던 그는 설명까지 해 주며, 보다 나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2001년 가졌던 개인전의 작품이 여기서 나왔고, 평단은 ‘추상과 관념을 벗어나 숙성됐다’는 평으로 답했다.


    국내 첫 시도 '유화붓 준법'



    그의 금강산 그림은 주제적으로는 몰론, 기법적으로도 20세기 이후 국내 화단에서 첫 시도되는 것이다. 이름하여 ‘유화붓 준법(駿法)’. 캔버스 위에 닥종이를 붙이고, 그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뻣뻣한 유화붓의 필치를 남겨 두었다. 종이와 모필만을 갖고 일필휘지하던 옛 한국화의 방식을 서양화 방식으로 되살린 화법이다.

    그러나 점도가 강한 유화가 아니라, 훨씬 유연한 아크릴을 뿌리거나 바르는 화법이다. 산의 형상을 그려 내고 골짜기를 여백으로 남겨 두는 전통 수묵화의 멋을 현대에 맞게 변용한 특유의 붓질 실험이었다. 그의 그림은 그러므로 끊겨졌던 역사의 복원이면서, 모자이크 벽화를 연상케 하는 새로운 화법의 발현이다.

    2001년 10월, 코스가 연장됐다는 소식에 세번째로 금강산에 오른 그는 장려의 극치라는 가을의 금강을 접할 수 있었다. 전에는 구룡폭포가 종점이었으나, 이번에는 폭포 너머의 산꼭대기인 구룡대까지 올라가 동해는 물론, 상팔담 선화대 등의 절경을 두루 완상한 것이다. 당시의 감흥이 이번 전시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서울대 미대 서양화과 출신인 그가 한국화적 감성과 긴밀하게 융화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그 뿌리를 불교 계통의 학교인 대구 심인고에서 은연중 흡수한 오방색 등 전통적 미의식에 두고 있다.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마친 그는 ‘현대회화’, ‘앙가주망’, ‘회화정신’ 등 신구상 운동의 일원으로 새로운 조형 언어를 탐색해 왔다.

    그가 한국적인 그림의 고갱이를 본격적으로 탐색하게 된 것은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 미술조감독으로 개ㆍ폐회식의 조직 업무를 맡게 되면서부터였다. 원로 화가 이만익 감독 아래서 고놀이 등 민속적 소재를 찾는 데 골몰하다 찾아 낸 주제가 ‘아리랑’이었다. 전통과 현재를 융합해 새로운 조형 언어로 되살린 1989년의 첫 개인전이 그렇게 열렸다.

    1993년까지 이어졌던 ‘아리랑’ 연작 시리즈는 한의 정서로만 이해돼 왔던 아리랑을 전혀 새롭게 되살려 내는 작업이었다. 청사초롱, 깃발, 징, 북 등의 한국적 소재를 현대에 맞게 형상화해 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같은 인위적 조형에는 한계가 있었다. 소나무, 들풀 등 한국적 자연에로의 전환이 모색됐던 시기였다. 안동 하회 마을 앞의 소나무숲에서 그가 보았던 것은 아리랑의 생명력이었다. 아리랑은 곧 우리의 산하였다.

    당시 나왔던 ‘아리랑-통일’은 온전히 하나가 된 남과 북을 그리는 마음이 잘 묘사돼 獵? 두 마리의 봉황새가 목을 꼬고 있는 모습이었다. “둘이 태극 형상을 감싸고 있는 풍경은 분단 상황을 초극해 또 다른 희망으로 승화시켜 보고자 하는 바램이었어요.”

    전시회는 12월 27일까지 사비나미술관에서 계속된다. 이 미술관은 공교롭게도 금강산 관광의 주체인 현대 본사 사옥 바로 옆이다. 그는 현대 그룹의 비극에 대해 “분단의 아픔을 딛고 가는 과정”이라며 자신은 화가의 자세에 충실함을 강조했다.그는 또 “지나치게 형식화된 북한의 그림은 내 체질과는 어긋난다”며 북한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피했지만, “최대의 걸림돌인 북핵 문제가 6자 회담 등을 통해 타결되길 빈다”고 말했다.


    남과 북 포용하는 염원 담아



    근작 ‘금강산에서 바라 본 백두대간’에는 남과 북을 함께 포용하는 금강산이 돼야 한다는 그의 염원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150호짜리 대형 캔버스를 두 개 이어 만든 이 그림에는 만물상에 올라가 동해쪽을 바라 본 풍경이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성 앞바다다.

    그림에서 산맥은 더 이상 고정된 물체가 아니었다. 흩뿌려 그린 독특한 화풍에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아지랑이의 모습은 금강산은 엄연히 살아서 기지개를 펴고 있다는 사실을 일러 주기에 족했다.

    조삼모사에 일비일희하는 정치판과 남북 정세 앞에서 산천은 말이 없다. 우리의 백두대간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그는 “남북한 화가를 대상으로 서울서 대규모 금강산 그림전을 펼치거나, 서울-평양 간 교류전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다짐했다.

    온전한 금강의 꿈은 아직 미완이다. 현재 진행형일 수 밖에 없는 까닭이다.



    장병욱 차장 aje@hk.co.kr


    입력시간 : 2003-12-18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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