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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02 10:59:44 | 수정시간 : 2003.10.02 10:59:44
  • [데스크의 눈] 세상이 온통 말에 놀아나니....


    인터넷에서 네티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플래쉬 캐릭터 졸라맨과 마시마로가 유행하던 시절에 들은 우스개 소리다. 사랑하는 남녀가 정동진 바닷가에서 ‘날 잡아봐라’하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를 향해 “날 잡아봐라”고 하면서 모래판으로 ‘X나게’ 도망 다녔고, 남자는 ‘X빠지게’ 잡으러 다녔다. 미친 듯이 모래판을 뛰어 다니던 두 사람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자 그제서야 놀이를 멈췄다.

    그때 화장실을 다녀온 남자가 사색이 되어 말했다. “큰일났어! X이 다 빠져버렸어!”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짓던 그녀가 얼른 화장실에 갔다 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자기야! 걱정마. 나한테 X이 났어!”

    지금도 인터넷에 오른 글을 읽다 보면 심심찮게 ‘졸라’라는 단어를 대하게 된다. 매우, 몹시라는 뜻으로 쓰이는 ‘졸라’가 비슷한 발음의 ‘X나게’에서 변형된 것임을 알고나 자판을 두드리는 것일까? 기호학 측면에서 보면 졸라는 거친 남자들의 전용 단어였던 ‘X 나게’와 기의(記意)는 같으나 기표(記票)가 바뀐 케이스다.

    90년대 중반 우리 독서계에 선풍을 일으킨 기호학은 말 그대로 기호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기호란 우리가 다른 사람과 의사를 주고받거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말(문자) 숫자 수화 제스처 아이콘 등등이 있는데, 그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말이다. 기호는 문자(소리)로 나타나는 기표와 뜻(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기의로 나눠진다.

    둘은 한 덩어리로 붙어 다니면서 기호를 이루는데, 문제는 서로 엇박자로 움직일 때 발생한다. ‘돌’이란 기호(말)를 예로 들어보자. 돌의 기표는 돌이라는 발음 혹은 문자다. 그런데 돌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진짜 ‘돌멩이’를 뜻할 때가 가장 많지만 지능이 떨어지는 두뇌, 혹은 성적으로 불감증 여성을 가리키기도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기표 ‘돌’에 맞는 기의는 말(문장)속에서 찾아낼 수밖에 없다. 어떤 남자를 소개받은 뒤 ‘돌인데 잘 생겼더라’고 소감을 말했을 때와 ‘잘 생겼는데, 돌이더라’는 여성의 선택에서 분명히 차이가 난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듯 ‘어 다르고 아 다른’ 것이다.

    엊그제 참여정부의 새 언론정책을 대표해온 청와대 대변인 송경희씨가 두어달만에 물러났다. 송 대변인과는 별도로 청와대의 활동과 분위기 등을 전하는 ‘청와대 브리핑’을 만들어온 박종문 국정홍보비서관도 같은 날 경질됐다.

    대통령의 뜻을 대신 전달하는 ‘입’이었던 송 대변인의 경질은 여러 차례 말 실수나 발표의 잘못이 있었으니 그렇다 치고, 나름대로 청와대의 새 언로(言路)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은 박 비서관의 경질은 의외다.

    그래서 “청와대 브리핑을 만들면서 대통령의 뜻을 전달하는데 대변인과 혼선을 일으켰기 때문”이라는 뒷말이 무성한데, 그것은 바로 대통령의 같은 말(기표)을 놓고 뜻(기의)를 달리 새긴 탓이라고 본다. ‘말은 새겨들어야 한다’는 어르신네들의 충고가 새삼 가슴에 와닿는다.

    이런 경우에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을 끌어들이면 ‘두 사람의 사고가 말에 놀아났다’고 할 수 있다. 언어학을 정신분석에 끌어들인 라캉은 같은 말이라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사고에 따라 뜻이 달라진다고 한 것이다.

    우연인지 모르나 노무현 대통령도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맞는 말이다. 국정 운영에는 참여자들 사이에 의사소통이 원활해야 하고, 무엇보다 ‘오독’(誤讀)을 없애는 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책임은 듣는 쪽에만 있는 것일까? 아니다. 말하는 쪽에도 상당부분 있다.

    최근 KBS1-TV의 ‘100분 토론’에 나온 노 대통령은 신당에 대한 질문에 “내 마음은 정해져 있는데, 당정분리 약속 때문에 섣불리 말을 못한다”고 했다. 언론 정책에 대해서는 “언제 대통령 대접을 해주었습니까?” 라고 반문했다.

    또 평검사들과의 대화에서 “그 정도면 막가자는 거지요?”등 이전 대통령에게서는 듣지 못하던 화법을 구사했다. 또 국민에게 보내는 e메일 편지에서는 ‘호시우행’(虎視牛行)이란 단어를 선택했고, “농부는 선량한 곡식에게 피해를 주는 잡초를 뽑아낸다”며 정치의 ‘잡초론’을 폈다. 여기에다 화려한 수사법에 깜짝 놀랄만한 임기응변도 더해진다.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이쯤되면 대변인은 누구보다 대통령의 마음과 생각을 잘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또 대통령의 말에 대한 정치권의 해석이 여당과 야당, 여당내에서도 신 구주류가 서로 다른 점도 이해가 된다. 그래서 언론계 주변에서?노 대통령의 말은 ‘행간을 읽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온다. 행간을 읽는다는 표현은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나 쓰던 용어다. 기표와 기의가 완전히 다른 대통령의 말은 많은 국민을 불안하게 한다.



    이진희 부장 jinhlee@hk.co.kr


    입력시간 : 2003-10-02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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