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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02 15:49:55 | 수정시간 : 2003.10.02 15:49:55
  • [데스크의 눈]'노짱'의 색깔을 보여주세요


    정치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몰이 경쟁으로 해가 뜨고 지는 것 같다.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3김 주도의 세몰이는 그게 정치집회건 반정부 투쟁이건, 또 조직적이든 자발적이든 얼마나 모였느냐는 머릿수로 희비가 엇갈렸다. 민심도 덩달아 춤췄다. 언론도 정치성 집회가 열리면 경찰 추산 따로, 주최측 집계 따로 보도했다. 동원됐든, 자기 발로 왔든 참여자 수가 그 판의 성공 여부를 가름하는 바로미터로 인식된 탓이다.

    정치판의 세몰이는 80년대 최대의 정치 이벤트인 87년 대선에서 1노 3김이 여의도 광장에 100만명을 모으는 것으로 절정에 올랐지만 XXX 후보를 연호하는 목소리의 크기로 판세를 짐작하는 것은 92년, 97년 대선에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3김식 세몰이는 조직을 통해 동원된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그 과정에서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 갔다.

    우리나라가 머릿수로 세몰이를 한다면 땅이 넓은 미국은 사람보다는 돈이다. 대선 예비선거철이 다가오면 후보들은 정치자금 모금캠페인으로 세몰이를 시작한다. 1년여 남은 대선에서 실탄으로 쓸 자금을 얼마나 거뒀느냐에 따라 판세가 요동치는 것이다. 그 경쟁에서 밀린 후보는 일찌감치 손을 털어야 한다.

    2000년 미국 선거에 쓰인 돈은 대략 30억 달러에 이른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당시 1억 달러 모금이라는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렇게 모은 돈이 공식적으로 공화당 5억550만달러, 민주당 3억7160만달러였다. 양 진영은 이 돈으로 산 TV광고를 통해 상대 후보를 헐뜯고 약점을 물고 늘어졌다. “미국의 선거는 돈에 의해, 돈으로 산 미디어에 의해 판가름 난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시들고 있다”며 영국의 가디언지가 꼬집은 대로다. 돈잔치를 통한 세(여론)몰이를 입증하는 대목이다.

    대통령제와는 달리 민심이 의회를 통해 국정에 반영되는 내각제의 일본에서 세몰이는 곧 ‘계보 싸움’이다. 보스를 정점으로 하는 계보가 총선에서 몇 명을 당선시키고 어느 계보와 손을 잡느냐에 따라 정치판이 엎어지고 뒤집어진다.

    지난 수십년간 일본 정치판을 쥔 최대 계보는 하시모토파다. 다나카 전총리로부터 시작된 이 파벌은 가장 많은 의원을 거느리며 2001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파벌 파괴’를 내세운 고이즈미 현 총리에 의해 ‘불패신화’가 무너질 때까지 세몰이에서 철옹성을 구축했다. 하시모토파의 불패신화 뒤에도 돈이란 ‘보이지 않는 손’은 있었다.

    세몰이로 힘을 과시한 뒤 이를 계보로 묶어 정치판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전형적인 3김식 정치였다. 세몰이에 계보를 관리하자니 돈도 많이 들었을 법하다. 합법적인 정치자금으로는 태부족이었다.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150억원을 건넸다는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의 주장을 박씨는 거듭 부인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겠지”라는 반응이 나오는 것은 3김식 정치가 배태한 경험칙 탓이 크다. 더구나 DJ 정권에 불거진 권력형 비리가 하나 둘이 아닌데, 소위 ‘대(代)통령’ 소리를 들은 박씨가 그 현란한 정치를 무슨 힘으로 해왔겠느냐는 데서 민심은 출발한다.

    미국에서 뒤늦게 DJ와 인연을 맺은 박씨가 DJ정권의 2인자로 떠올랐을 때 시중에는 그에 대한 시샘성 소문이 무성했다. 동교동을 처음 찾아 갔을 때 얼마를 준비했느니, 공천을 받았느니 못 받았느니, 비서출신 동교동 실세들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았으니…. 그 당시 정치권 안팎에서는 박씨가 돌리는 폭탄주 한잔 못 얻어 먹었다면 팔불출이라는 이야기도 돌았다. 어디 그뿐이랴.

    노무현 대통령은 6월23일 150억원의 실체를 밝혀내려는 송두환 특별검사의 특검 연장 요청을 거부했다. 특검의 손을 떠난다는 것은 실망스런 일이지만 이 건은 검찰에 넘겨서라도 계속 수사를 해야 한다.

    인위적 정계개편이니, 노무현 신당을 위해 사정의 칼을 뺐다느니 하는 악의적 음모론이 고개를 들겠지만 150억원 수수 폭로를 계기로 3김식 돈 정치의 뿌리를 뽑지 않으면 노 대통령이 대선에서 공약한 ‘헌 정치 파괴’는 물 건너 간다. 노 대통령은 대선에서 기존 방식의 세몰이 대신, N세대의 자발적인 참여라는 신선한 바람으로 ‘노짱’의 기대를 모으지 않았던가?

    노 대통령은 취임후 “성공한 대통령은 내가 평가하겠다”(전국 세무관서장 초청 특강), “신문만 안 보면 다 잘되고 있다”(정대철 민주당 대표와 회동), “제대로 대통령 대접을 해준 적이 있는가”(MBC 100분토론 때 일부 언론을 상대로) 등의 말로 국민에게 실망과 함께 실소를 안겨 주었다. 이제는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질 만도 한데, 그 시작으로 150억원 미스터리의 철저한 수사도 괜찮을 듯하다. 그래서 ‘노짱’의 개혁 색깔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이진희 부장 jinhlee@hk.co.kr


    입력시간 : 2003-10-02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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