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데스크의 눈] 송두율씨가 양심의 문을 열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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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10 10:00:30 | 수정시간 : 2003.10.10 10:00:30
  • [데스크의 눈] 송두율씨가 양심의 문을 열 차례다


    주러시아 한국대사관에서 10년 가까이 근무한 A씨는 국정원 소속 해외공작원이다. 암호명 ‘1호’, 혹은 엄지손가락을 세우는 것으로 통하는 주러 북한대사의 행적을 중심으로 북한대사관의 움직임을 추적하고, 북한 고위 인사의 러시아 방문 및 활동을 챙겨왔다. 98년 7월에는 북한 정보를 얻으려 러시아 외교부 간부를 만났다가 러시아 보안요원들에게 긴급 체포돼 ‘스파이 혐의’로 추방명령을 받기도 했다.

    비록 ‘추방’이란 외교적 불명예를 덮어쓰긴 했으나 고려인 사회에 알려진 그의 정보 수집 능력은 출중했다. 그는 여전히 손을 내젓지만 96년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 망명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그녀의 근황을 추적하는 것도 A씨의 몫이었다고 한다.

    성혜림이 신병치료를 위해 러시아 고위 간부들이 이용하는 모스크바 중앙병원에 입원했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바로 옆방에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밀착 감시한 사실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러니 ‘추방 사건’같은 게 안 터질 리 없다.

    한때 동서냉전의 최전선이었고, 북한이익대표부가 위치한 베를린에도 A씨 같은 요원들이 많았다. 그곳은 북한측이 우리측 인사를 포섭하는 전초기지여서 우리측의 대응조치가 필요했던 탓이다.

    최근 귀국해 국정원 및 검찰 조사를 받은 재독 사회학자 송두율씨도 90년대 초반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된 만큼 A씨들의 밀착 감시를 받았으리라는 점은 예상 가능하다. 그의 움직임은 A씨들의 안테나에 빠짐없이 걸렸고, 북한이익대표부 직원과의 만남이나 입북 및 방북 활동 등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우리측 ‘송두율 X파일’로 전송됐을 게 틀림없다. 더구나 그와 접촉한 북한이익대표부의 김경필 서기관은 서방으로 망명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송씨가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가 아니다’며 줄기차게 부인한 것은 수많은 A씨들의 능력을 얕잡아본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가 지난해 출간한 책 ‘경계인의 사색’에서 ‘송두율을 김철수라고 단정할 만한 증거는 없다’는 서울지법의 판결을 거론하며 이를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프랑스군 장교 드레퓌스가 1894년 독일군 첩자란 혐의로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을 때 에밀 졸라 등 지식인들이 성명을 발표한 사건)에 비유했을 때 A씨들은 “두고 보자”며 별렸다고 한다.

    무작정 아니라고 우기는 것으로 A씨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계산했다면 송씨는 너무 순진하다. 아니라면 너무 무식하다. 국정원측이 내놓은 송씨의 친북 자료는 아주 구체적이다. 노동당 입당에서 김일성과의 만남, 정치국 후보위원 선임, 김일성과 오진우 사망시 방북 조문, 공작금 15만달러 수수 등에 이르기까지 정황은 송씨의 결백 주장을 뒤엎을 만하다.

    물론 그 당시 행위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다. 노동당 입당이 요식행위이고, 후보위원 선임 자체를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또 북한으로부터 받은 돈은 학술지원비일 수 있다. 송씨가 국정원측과 벌이는 ‘김철수 진실게임’에서 진실은 본인만 아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송씨가 사실(팩트)확인 과정에서 거짓말을 했고, 말을 바꾸다 보니 그의 진실성과 신뢰성이 땅에 떨어졌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노동당 입당 사실이나 정치국 후보위원 여부가 아니라 그가 왜 그런 사실을 미리 말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입국을 결심했을 때, 인천 공항에 도착했을 때, 37년만에 한국말로 강연했을 때, 국정원에 들어갈 때 등 사실을 밝힐 기회는 많았다. 굳이 공식석상이 아니더라도 뒤를 따라 다니는 보도진에게 진실을 털어놓고 사과할 수도 있었다. 우리 사회 물정에 어두웠던 탓일까? 그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계속 아니라고 우겼다. 결과적으로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배신감’을 안겨주지 않았나 싶다.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 한국일보에 쓴 칼럼에서 “송두율 교수 문제는 분단체제와 민주화 운동의 관계에서 이념적 문제와 법적 문제 이외에 양심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남북이 분단이후 반세기동안 얽히고 설킨 오해와 불신, 원한을 풀어가려면 법과 제도가 아니라 관용과 양심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를 받아들인 많은 사람들은 양심의 열린 마음으로 환영했는데, 정작 자신은 양심의 문을 열지 않고 있는 듯하다. 사법 처리니 국외추방이니 하는 추측들이 나오지만 분단체제에서 파생된 양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본인이 먼저 양심에 따라 마음을 문을 열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 송씨가 그 첫번째 기회를 저버린 것 같아 안타깝다.



    이진희 부장 jinhlee@hk.co.kr


    입력시간 : 2003-10-10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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