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종가기행 45] 淸州 韓氏 久菴 韓百謙(청주 한씨 구암 한백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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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7.05.16 12:57:17 | 수정시간 : 2007.05.16 12:57:17
  • [종가기행 45] 淸州 韓氏 久菴 韓百謙(청주 한씨 구암 한백겸)
    한백겸 1552년(명종7)-1615년(광해군7)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
    동국지리지 편찬 주도한 실학의 선구자





    동국지리지


    구암유고

    구암 한백겸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얼굴 모습이야 초상화를 보면 쉽사리 알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선현들처럼 구암 역시 초상화를 남기지 않았다. 다음으로는 인물평을 살펴보는 것이다.

    인물평은 대개 주로 두 글자 내지 네 글자로 되어 있다. 그에게 주어진 권위 있는 평어는 '위인단중(爲人端重) 소심평서(素心平恕)'다. '사람됨이 단아하고 마음가짐이 관대했다'는 의미다.

    소심에서 소(素)라는 글자는 깨끗함이요, 평(平)은 공평함이며 서(恕)는 남을 편안하게 대하는 너그러움을 말한다. 떠오르는 이미지는 한없이 온화한 어른이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의 인물평이다.

    이러한 이미지에 걸맞은 또 다른 평 하나가 있다. 구암유고 서문에서 택당 이식은 그를 '유아(儒雅)'한 이로 규정지었다. 택당은 격조 있는 선비, 학자로 구암을 기렸다.

    서애 류성룡의 수제자며 동춘당 송준길의 장인인 우복 정경세는 묘갈명에서 구암을 '질단기화(質端氣和) 언온모공(言溫貌恭)' 이라고 묘사했다. '반듯하고 온화하며 따뜻한 말씀과 공손한 태도를 보이셨던 어른'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마냥 온화하기만 한 이는 아니었다. "비록 독서를 할 때라도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장중(莊重)한 모습이어서 가까이 할 수 없는 사람인 듯했다. 그렇지만 사람들과 만날 때는 편안하고 즐겁게 대하고 모든 정성을 다해 똑똑하거나 어리석은 이들 모두 진심으로 좋아했다." 이 정도의 설명이면 마음 속에 그의 초상화를 그려볼 수 있는 자료가 될 터이다.

    그는 아우와는 달리 서화담의 제자인 민순(閔純, 1519-1591)의 학문적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3형제 중 장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17, 18세 무렵 민순의 문하에 들어가 주자의 학문을 배우게 된다.

    그는 여기서 특히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을 중심으로 수신(修身)과 의리(義理)를 배우게 되는데, 이를 평생 공부로 삼게 된다. 그 뒤 1579년(선조12)에 생원시에 3형제가 나란히 합격한다.

    구암은 기축옥사 때 정여립(鄭汝立)의 시신을 수습해 장사를 지낸 이다. 이는 그가 정여립의 생질인 이진길(李震吉, 문과 덕산 이씨)과 교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로 구암은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유배되어 4년 만에 방면되었다.

    그가 조정에 주목을 받은 것은 43세 때 주역에 정통하다고 추천을 받아 경연에 입시하면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51세 때 왕명에 따라 주역전의(周易傳義)를 교정하는 일에도 참여한다. 이는 함께 일했던 만전당 홍가신, 한강 정구와 함께 구암이 당시 그 분야의 최고 권위자 중의 한 사람이었음을 말해준다.

    구암은 목민관으로서도 각광을 받았다. 44세에 안악현감을 시작으로 함종현령, 영월군수, 연안부사, 청주목사, 파주목사 등을 지내면서 애민 정신으로 정성을 다해 치적을 남겼다. 그래서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해당 고을 부로와 선비들이 앞다투어 문상했다.

    구암이 현재 우리 역사에 이름이 남은 것은 그가 편찬한 한 권의 책자와 그곳에 담긴 실증적인 시각 때문이다. 그는 <동국지리지>라는 역저를 남겼다. 10행 20글자에 60장 정도의 작은 분량이다.

    이 책은 1614년(광해군6)에 시작해 약 1년 만에 완성했고, 1640년(인조18) 경상감영에서 간행되었다. 책의 내용은 중국 역사 열전 부분에 기록된 부족국가, 삼국 및 고려 시대에 관한 부분 등 모두 세 부분으로 대별된다.

    그의 소책자가 주목받는 이유는 우리나라 역사지리학의 효시(嚆矢)라는 점과 향후 이 분야의 연구의 선하(先河)가 되었다는 것. 이 책자의 영향을 받아 이후 편찬된 역사서로는 오운의 <동사찬요>, 유형원의 <동국여지지>, 신경준의 <강계고>, 안정복의 <동사강목>, 정약용의 <강역고> 등을 들 수 있다.

    실제로 <동사강목>이나 <강역고>를 펼쳐보면, 여러 곳에서 동국지리지를 인용하고 그 의견에 동조한 구절을 볼 수 있다. <동국지리지>에 대해선 학자들이 연구한 단일 논문만도 몇 편에 이를 정도로 주목받고 있다.

    구암의 문집은 아들 한흥일에 의해 유고 형태로 편집 간행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등 화란을 당해 온전한 상태로 편집되지 못했다. 특이하게도 그의 문집에는 한 수의 시도 실려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첫머리에 기전유제설(箕田遺制說)이라는 글이 그림과 함께 실려 있다.

    이 글은 그가 56세 때인 1607년에 그의 아우 한준겸이 관서 관찰사로 있을 때 평양(箕城)에 가서 기전유제를 보고 쓴 글이다. 그 말미에 유근(柳根)과 허성(許筬)의 발문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주목받았던 것임을 알 수 있다. 2권 1책 84판의 작은 규모다.

    한백겸은 사후 57년 만인 1672년(현종13)에 강원도 원주의 칠봉서원에 배향되었다. 칠봉서원은 원주의 대표적 역사 인물인 운곡 원천석을 주향으로 모셨다 뒤에 원호, 정종영, 한백겸을 배향한 사액서원이었으나 고종 때 훼철된 뒤 복설하지 못했다.

    구암(久菴)이라는 호의 유래

    구암은 자신의 호의 유래에 대해 물이촌구암기(勿移村久菴記)라는 글에서 밝혔다. 그는 만년에 행주성 아래 양주 수이촌(水伊村)에 터를 잡아 우거했다.

    본래 그곳은 아우 유천 한준겸의 별장이 있었던 땅인데, 그중 얼마를 형님에게 떼서 준 것이다. 매년 홍수로 고초를 당하기도 했지만 그는 이곳에서 평생을 마치고자 작정한 뒤 그 지명의 방언음을 따서 '평생 떠나지 않겠다'는 의미로 물이촌(勿移村)이라고 개명한 뒤 방 이름도 구암(久菴)이라고 지어 현판을 걸었다.

    대개 사람들이 옮기는 것을 외모(外慕, 외부적인 것에 대한 추종 내지 동경)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오래 있으면 편안하고(久則安), 편안하면 즐겁고(安則樂), 즐거운 경지에 다다르면 그만두려 해도 그러지 못해 옮기도 싶어도 옮기지 못한다고 자신의 희망을 피력했다. 이는 그 자신이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제자 안연의 안빈낙도(安貧樂道)를 꿈꾼 것이기도 하다.

    다음 호엔 선성 김씨(宣城金氏)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 종가를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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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시간 : 2007/05/16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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