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이신조의 '작가와 차 한 잔'] <8> 소설가 윤대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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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7.06.11 14:43:17 | 수정시간 : 2007.06.12 16:09:38
  • [이신조의 '작가와 차 한 잔'] <8> 소설가 윤대녕
    시간과 공간을 흐르는 새와 물고기



    그가 약속 장소를 인사동으로 잡았으면 했을 때 ‘볼가’는 피해야지, 문득 그런 생각을 먼저 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스스로에게도 딱히 설명할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조각하늘’이 어떠냐고 물었고, 그는 그러자고 답했다.

    흐르는 것은 시간만이 아니다. 공간도 흐른다. 그것은 단순히 ‘모든 것이 변하므로 다 부질 없을 뿐이다’와는 조금 다른 차원의 얘기다.

    이를 테면, 당신에게 ‘인사동’은 어떤 곳인지. 인사동의 카페 ‘볼가’는, ‘조각하늘’은 또 어떤 곳인지. 물론 그 장소들을 가보지 않았을 뿐더러 들어본 적도 없다 할지도 모른다.

    어떤 고유명사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인사동, 볼가, 조각하늘, 또는 홍대앞, 덕수궁, 코아아트홀, 산정호수 등의 이름을 듣게 되면 입을 굳게 다물고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게 마련인 것이다.

    딱히 그곳들이 너무나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고 공간이 흐른다.

    햇살이 더없이 환했던 5월의 어느 오후, 인사동 그 골목 - ‘조각하늘’은 사라지고 없었다. ‘조각하늘’이 있던 곳엔 낯선 음식점 간판이 걸려 있었다.

    이미 몇 년에 걸쳐 그 골목에서 ‘사람 사는 정’, ‘평화 만들기’ 등의 카페가 차례로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서울에는 예술가와 철학자들이 단골로 드나드는 100년 역사의 파리식(式) 카페가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짐짓 당혹스러웠다.

    이 나라에서의 추억이 많은 경우 가혹한 것은 사라지는 대부분의 것들이 언제 그런 게 있기나 했었냐는 듯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조각하늘’과 불과 열 발자국 남짓 떨어진 ‘볼가’ 앞에서 조금 늦을 거라는 연락을 해 온 그에게 ‘조각하늘’이 사라져버렸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윤대녕의 최근 단편소설 ‘낙타 주머니’에 카페 ‘볼가’가 등장한다. 소설 속 바로 그 장소에서 그 소설을 쓴 작가를 만난다는 것이 지나치게 인위적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던 것이다.

    아주 멀리는 말고 ‘볼가’와 열 발자국쯤 떨어진 ‘조각하늘’에서 ‘볼가’를 얘기하는 것도 괜찮으려니 했다. 그러나 결국 ‘볼가’에서 그를 만나게 됐다.

    마리아 칼라스의 포스터, 이국적인 장식품들, 체크무늬 테이블보, 빨간 나무창틀 너머 반질반질 윤이 나는 녹색 담쟁이 넝쿨, 그 모습을 더욱 환하게 보이도록 하는 어둑한 실내. ‘볼가’가 내게 더없이 각별하고 유일한 장소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닌 곳이라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다.

    지난 시간 이곳에서 마주했던 어떤 얼굴들, 그 얼굴들과 나누었던 어떤 얘기들, 어떤 느낌들. 그리고 이제 아주 사라져버린 ‘조각하늘’에서의 같은 경험들을 떠올리며, 소설가 윤대녕을 기다렸다.





    “내가 좋아하는 테이블은 저쪽인데.” 그가 말했다. “‘낙타 주머니’의 그 테이블은 어디죠?” 내가 물었다. “그건 그 옆 테이블.” 그가 대답했다.

    “오래 전 그 테이블의 바로 옆 테이블에서 어떤 남자들과 포르투갈의 노래 ‘파두’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나는 속으로 말했다. “저 제일 안쪽 테이블은 아내를 처음 만난 자리여서…” 그가 다시 말했다.

    굳이 몽환(夢幻)에 잠기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 모든 것이 그의 소설 같은 것이다.

    인사동 카페에서 백마의 주점으로, 진관외동 진관사로, 북한산의 대남문으로, 제주의 산간도로로, 강화도의 들판으로, 대관령의 양떼목장으로, 그리고 다시 인사동의 ‘볼가’로. 3시를 알리는 괘종시계가 울렸다.

    여기는 괘종시계가 있는 카페인 것이다. 예전의 그때도 괘종시계가 울렸던가. 시간이 흐르고 공간이 흐른다. 아니 흘러온 것은 우리 자신이다.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 그의 소설에는 우리를 대신해 시간과 공간을 끊임없이 흘러 다니는 숱한 새와 물고기들이 등장하는 것인지 모른다.

    지난 겨울 이래 내게 ‘견딜 수 없다’는 느낌을 주었던 글은 꼭 두 편이었다. 첫 번째는 이태리 작가 프리모 레비의 아우슈비츠 체험기 <이것이 인간인가> - 참혹했다면, 그저 지독히 참혹하기만 했다면, 그저 지독히 참혹하기만 하고 지독히 아름답지는 않았더라면, 견뎠을 것이다.

    혹은 책읽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참혹하고 너무나 아름다워 견딜 수 없었다.

    책을 둘렀던 띠지에 인쇄된 작은 흑백사진 속 옆얼굴의 프리모 레비가 섬세한 손가락을 흰 수염이 덮인 입술에 가져다 대고 지금 내 노트북 모니터 화면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긴 인생 속 단 1년의 시간 동안 수용소에서 사용한 유대인 죄수번호를 생몰연대와 함께 자신의 묘비명으로 남기고 죽은 프리모 레비를 나는 언제까지나 만나볼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프리모 레비는 내가 가장 손을 잡아보고 싶은 남자다.

    그리고 두 번째, 다음과 같은 문단으로 시작하는 윤대녕의 소설집 <제비를 기르다>의 작가의 말.

    “그리고 삼 년 만에 다시 소설집을 낸다. 각별히 고독을 챙기며 살았던 지난해에 여러 편의 중·단편을 쓸 수 있었다.

    자정에 작업실에서 퇴근할 때면 막사발에 냉수를 받아놓고 아침에 출근하면 그것을 마셨다. 하루하루 그 일을 되풀이하면서 내가 과연 삶의 한가운데로 가고 있나를 산짐승처럼 틈틈이 살폈다.

    길을 잃으면 안 되겠기에 보다 숨을 낮추고 되도록 말을 꺼렸다. 그렇게 생의 한가운데를 어두운 숲처럼 더듬더듬 관통하면서 나는 ‘그 모든 어찌할 수 없음’에 대해 억누를 수 없는 그리움을 자주 체험했다. 삶의 정체는 결국 그리움이었을까?”

    견딜 수 없었다. ‘각별히 고독을 챙기며 살았’다는 구절에서부터 죽은 친구의 편지를 뒤늦게 접한 ‘낙타 주머니’의 주인공처럼 호흡이 가빠져 도망치듯 서점을 빠져나와야 했다.

    여러 날 뒤 용기를 내어 다시 책을 잡았고, 과연 오래도록 견딜 수 없어했다. 책에 실린 단편 ‘연’, ‘탱자’, ‘마루 밑 이야기’ 들을 읽고는 오래오래 서성거려야 했다. 그렇게 견딜 수 없어하던 어느 순간, 윤대녕의 전화를 받았다.

    아주 오랜만의 통화였다. 그때 내가 있는 서울에는 밤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가 있는 강원도에는 밤눈이 내리고 있었다. 통화가 끝난 다음, 견딜 수 없어할 수 있음을 감사해 해야 한다는 걸, 간신히 알았다.

    제주도 얘기를 안 할 수 없겠다. 몇 년 전 소설가 윤대녕이 가족과 함께 제주도로 거처를 옮겼을 때, 사람들은 그런 그의 선택에 ‘돌연’, ‘홀연히’ 등의 수식어를 붙였다.

    “살아가다보면 국면을 전환해야 할 순간들이 있어요. 우리 같이 예술가라는 부류들은 말할 것도 없죠. 그것이 지독히 외롭고 지독히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감행해야 해요.

    물론 결과를 낙관할 수도 없고 괴로움을 피해갈 수도 없어요. 제주도에 살 때 밤샘 바다낚시를 자주 다녔어요. 바다낚시는 유유자적 취미생활이라기보다는 고된 육체노동에 가까워요.

    어둠 속에서 해가 뜰 무렵까지, 쉴 새 없이 역동적으로 변하면서도 결코 고요와 평온을 잃지 않는 바다에서 많은 걸 배웠어요. 맞아요. 나이가 든다고 해서 삶의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된다거나 하지는 않아요.

    그저 고통을, 제 마음을 다루는 기술과 지혜를 익히고 늘리는 것뿐이죠.”

    그에게 12년 전 이맘 때 무엇을 하고 있었냐 물었다. 그와 나는 띠동갑인 것이다. 첫 소설집이 나오던 날 회사에 미리 써두었던 사표를 냈고, 12년 전 그해 작가로 산 지금껏 가장 많은 소설을 써 발표했다고 했다.

    12년 전인 것이다. 그맘 때, 그의 소설 속에 나오는 ‘전함 포템킨’이란 카페를 찾아 나는 충무로 거리를 하루종일 헤매고 다닌 적이 있었다. 그 시간은, 그 공간은 또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 버린 걸까.

    아니 나는, 그는 각자 어디에서 어떻게 흘러와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마주 앉아 있는 걸까.

    “삶은 뜻하지 않은 각도로 사람을 바꿔놓는다. 남들이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일이 어떤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계기로 작용해 생의 전모를 바꿔놓는 수가 종종 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삶의 원리이자 저마다 이면에 감춰진 속박이자 굴레이기도 하다.” (단편소설 ‘고래등’ 중)

    다시 괘종시계가 울리고 그와 나는 ‘볼가’를 나왔다. ‘볼가’ 앞에서 ‘볼가’를 등지고 그의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몇 년 전 남다른 두 친구를 초록 담쟁이가 덮인 ‘볼가’의 담벼락에 세워두고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두 친구와 나는 그 몇 년을 윤대녕 소설 속의 새와 물고기처럼 흘러왔다.

    눈물과 웃음의 시간이 기쁨과 슬픔의 공간이 아직 우리를 멈추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은 제각각 지어낸 이야기를 미처 완성시키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시간 아주 많은 사람들과 그랬던 것처럼 나는 윤대녕과 함께 나란히 인사동 거리를 걸었다. 시간과 공간을 끊임없이 흘러다니는 은어와 문조와 학꽁치와 제비와 붕어들을 고요히 데불고.

    ● 약력





    1962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단국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했다.

    1990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은어낚시통신>, <남쪽 계단을 보라>,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 <누가 걸어간다>, <제비를 기르다>, 장편소설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미란>, <눈의 여행자>,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산문집 <그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것들>, <어머니의 수저> 등을 출간했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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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시간 : 2007/06/11 14:43




    글, 사진 - 이신조 소설가 zovenba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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