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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02 15:14:17 | 수정시간 : 2003.10.02 15:14:17
  • [수해, 그후 1년] "올 장마는 어떻게 견딜꾜"
    기약없는 복구공사, 곳곳 수마 상처 그대로





    오전부터 잔뜩 찌푸린 날씨다. 6월11일, 금방이라도 비가 퍼부을 것처럼 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뒤덮였다. “에구 마, 또 비가 오려는가 보네. 지긋지긋도 허지.” 길 위에 쪼그리고 앉은 70대 노파는 아래 쪽 오봉 저수지를 내려다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댄다. 저수지를 끼고 도는 산은 곳곳이 무너져 내려 있고, 도로는 가다 끊기기를 반복한다. 지난해 여름 마을 전체가 섬처럼 고립됐던 곳, 강원 강릉시 성산면 오봉리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인부들의 마음은 바쁘다. “장마가 6월 말에 온다면서요? 그 때까지 공사를 끝내기나 할 수는 있는 건지….” 옆에 있던 이가 말을 거든다.



    “이대로 공사도 끝나기 전에 장마가 오면 또 수해가 날 수밖에 없다는 것 아니요. 시장이니, 군수니 하는 사람들 순 엉터리래요. 인근 마을에선 다른 업자를 시키면 1억원이면 될 공사를 10억원에 맡겼다는 얘기도 들리잖소.” 인부들은 말을 끝맺기도 전에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고 산 경사면 수방 공사 현장으로 총총 걸음을 잰다.



    상처를 치유하는 데 1년이라는 시간도 너무 짧았던 것일까. 1년 전 태풍 루사와 함께 사상 유례 없는 폭우가 쓸고 지나갔던 령(嶺) 동쪽. 그곳은 아직도 수마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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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릉 톨게이트를 빠져 나가는 순간, 길이 있던 곳에 길이 없기도 하고, 물 대신 모래와 돌들로 채워진 하천은 흔적만 남아 있다. 허리 곳곳이 비에 쓸려 내려간 산은 군데군데 벌거숭이다. 주민들의 얼굴 표정 하나 하나엔 수심이 그득하다. 영동 지방은 그렇게 ‘지난해 여름’의 상처를 제대로 씻어내지도 못한 채 또 다시 보름 후쯤으로 예고된 ‘올해 여름 장마’를 맞고 있다.








    저수지가 사라진 장현 마을





    학산교라는 작은 다리를 건너 자동차로 10여분. 강릉 장현동으로 가는 길이다. 주인 잘못 만난 차가 몸살을 앓는다. 포장이 안 된 도로는 울퉁불퉁한 돌로 뒤덮여 있다. 덜컹 덜컹. 그나마 지날 수 있는 게 다행이다.



    마을 어귀에 농부 대여섯명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다. 무얼 하는가 했더니 모를 심어놓은 논 바깥 쪽에 옹벽을 세우는 중이다. 옹벽 높이가 2m는 족히 넘어 보인다.



    “이 논이 지난해 다 물에 잠겼지 않소. 올해는 겨우 모를 다 심어 놓았으니 이제 수해에 대비하는 거요.” 옹벽 작업을 하고 있는 포크레인 기사에게 이것저것을 주문하던 50대 아저씨가 지난해 물이 넘친 곳을 손짓으로 일러 주며 친절히 설명한다. 그는 “이렇게까지 높고 튼튼하게 옹벽을 설치했는데도 문제가 생기면 할 수 없는 거다”고 했다.



    마을을 가로 지르는 섬석천은 곳곳이 파헤쳐진 채 인부들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장마가 코 앞인데 제방 공사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하천 바로 앞에서 이발소를 운영한다는 권영주(67)씨는 목청을 높였다.







    “장마 전까지 제방 공사가 안되면 또 물난리가 나는 거지, 뭐. 농지고 집이고 작년처럼 모두 물에 잠기지 않겠어?” 수해 이후 줄곧 컨테이너 생활을 하다 불과 1개월 전, 겨우 새 집을 지은 터였다. 권씨는 “있는 돈 톡톡 털어 간신히 집 지어 놓았는데 또 수해가 나면 누가 보상을 해줄 거냐”고 따져 물었다.



    제방보다도 마을 주민들을 더 근심스럽게 하는 것은 저수지였다. 지난해 장현 마을에 물 난리가 난 것도 저수지 둑이 터지면서 였다. 지난해 말 복구 공사에 들어간 장현 저수지 공사는 준공일이 2004년 말.



    지금까지 공정률이라고 해봐야 겨우 9%에 불과했다. 공사 현장에서 만난 ㈜대광 양광식(38) 차장은 “원래 저수지가 210만톤의 물을 저수하는데 지금은 저수 능력이 거의 없다”며 “비가 조금만 와도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다”고 했다. “임시 방편으로 저수지 아래 물을 빼 주는 구조물 공사라도 해놓아야 하는데 마음만 바쁠 뿐”이다.




    “해야 할 공사가 한둘이 아닌데…”





    장현에서 동해시 쪽으로 7번 국도를 따라 이동하다 보면 수해복구 공사 현장임을 알리는 푯말이 곳곳에 눈에 띈다. 지난해 수해 최대 피해 지역 중 한 곳인 강동면 모전리. 산과 마을 사이로 흐르는 군선천은 곳곳이 ‘공사 중’이다.



    마을로 들어가는 임시복구 도로는 비가 조금만 내려도 곧 유실될 듯 불안하다. 하지만 언제 공사를 끝내려 하는 지 인부들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천 한 가운데 포크레인 한대가 천천히 돌을 파내고 있을 뿐이다. 집 앞 텃밭에 심어놓은 고추를 줄로 묶고 있던 김연래(62)씨는 일손을 놓지 않은 채 묻는 말에 심란한 말투로 툭툭 대답을 던진다.



    “공사가 어디 그리 빨리 끝날려구요. 올 봄에도 비가 많이 와서 공사를 시작도 못했드랬어요. 제방 공사나 도로 복구 공사는 올 가을이나 지나야 끝난다고 하더구만요.”







    옥계면 북동리도 사정이 별반 나을 게 없다. 폐교된 북동초등학교의 을씨년스런 외관은 수마가 할퀴고 간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를 새삼 확인시켜 준다. 토박이 신승경(56)씨는 장마 걱정에 마음이 편할 날이 없다.



    직장 생활을 하다 지난해 처음으로 농사일을 시작했는데 수해로 쌀 한 톨 건지지 못한 터였다. “올해도 비가 많이 온다지 않소. 하루 빨리 개울이 복구돼야 하는데. 잘은 모르지만 우리 눈으로 봐서는 영 진도가 안 나가는 것 같습디다.” 그는 “항간에서는 자재가 달리기도 하고 인력도 달리기도 해서 공사를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 했다.



    이장 박인재(42)씨의 마음은 더욱 급하다. 작년 수해로 못 쓰게 된 집을 새로 짓는 일은 뒷전이다. 북동리 80여 가구를 대표해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공사 현장을 돌아다니며 독촉을 하고 있는 중이다. “어디 제방 공사 뿐이랍니까. 교량 옹벽 소하천 농수로 등 해야 할 공사가 한 둘이 아닙니다.” 박씨는 “공무원들이 성실히 도와준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올 여름을 무사히 나기 위해서는 최소한 소하천 공사라도 장마 전에 마무리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바닥 높아진 남대천





    다음 날. 밤새 내린 비로도 부족했는지 빗방울이 제법 굵어졌다. 주문진읍 교항리와 주문리를 잇는 신리교가 있던 자리 옆 쪽으로 주민들이 우산을 쓰고 임시로 설치된 가교를 오가고 있다. 이대로 비가 조금만 더 내리면 가교마저도 곧 물에 잠겨버릴 듯하다.



    하지만 신리교 공사는 기약이 없다. 하천 아래 쪽으로 수도관 파이프가 지나고 있어 차질을 빚기도 하고, 소음이나 건물 균열을 항의하는 민원이 쏟아져 공사가 중단되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 해도 준공일이 내년 6월이니 올 장마는 꼼짝없이 이대로 나야 할 판이다.



    “가교마저 물에 잠기면 큰 일이래요. 저쪽 해안 우회도로로 걸어 다녀야 할 처진데 족히 30분은 넘게 걸릴 겁니다.” 주민 유정수(55)씨는 “그래도 작년 처럼이야 올라고. 비가 조금만 내리기를 바라는 수밖에…”라며 말끝을 흐렸다.



    주문진에서 북쪽으로 30㎞를 달리면 남대천 상류, 양양이다. 언뜻 보기에도 남대천 하상(河上)이 많이 높아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저 보소. 하상이 1m는 높아졌어요. 이대로 장대비가 쏟아지면 남대천이 넘치는 건 시간 문제 아니겠습니까.” 주민 이근만(56)씨는 “도대체 언제 하천 바닥의 돌과 모래를 건져 올릴 지 모르겠다”고 했다.



    남대천을 따라 난 마을 길은 빗물로 뒤범벅이 돼 있다. 산 비탈 아래 민가에서 만난 권혁만(68) 할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산 사태가 나고 집이 3분의 1 이상 물에 잠겨 아직 수리를 하고 있잖소. 할 수 없이 지금은 건넌 마을에 전세를 살고 있소.” 시나 군에서 1순위로 농경지 복구에 나선 탓에 대부분 농가가 모내기는 마쳤지만 권 할머니는 올해 모조차 심지 못했다고 했다.



    “논 복구는 다 됐는데 배수로가 안 나서 물을 댈 수가 있어야지. 그렇게 독촉을 했는데도 엊그제야 겨우 배수로가 들어왔잖소.” 권 할머니는 “제방 공사도 안됐지, 사방 공사도 안됐지 집이 다 수리가 돼도 겁이 나서 들어와서 살 수 있을 지 모르겠다”고 했다. 집 위쪽으로 아직 사방 공사가 끝나지 않은 산 비탈에서 빗물에 씻긴 돌들이 조금씩 굴러 내려오고 있었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입력시간 : 2003-10-02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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