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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06 09:51:00 | 수정시간 : 2003.10.06 09:51:00
  • [바람난 사회] 당당해진 바람, 반란을 꿈꾼다
    양지로 나온 외도와 불륜… 윤리붕괴냐? 사회현상이냐?







    바람은 금기 항목이었다. 그저 술 자리에서 친구들에게 남자들의 능력을 과시하고자 하는 정도의 안주 거리이거나, 찜질방에서 뻔뻔한 40대 아주머니들의 수다 거리에 불과했다. 탁 트인 공간에서 바람을 공론화하는 것은 일부일처제, 결혼, 가족 제도 등 사회가 강제하는 규범에 대한 도발이었다.



    요즘의 분위기는 그러나 심상찮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바람’이 얘기 된다.



    가상의 문화 콘텐츠 속에서, 또 우리가 실제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이들은 더 이상 어두운 곳으로 숨지 않는다. 아주 당당하게 말한다.



    “정직해 지자. 눈치 보지 말자. 이제부터는 소신껏 살자.” 과연 지금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심장한 변화가 불어 닥치고 있는 것일까.




    불륜은 없다





    육체적 관계가 없었으니 순수한 로맨스일 뿐이라고, 분명 불륜은 아니라고 항변한다. (드라마 ‘앞집 여자’의 상태) 아내가 임신을 했단다. 자신의 아이가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별로 망설이지 않고 말한다. 잘 키울 수 있다고. (영화 ‘바람난 가족’의 영작) 정신적 사랑이 결국은 육체적 사랑으로까지 번진 순간, 그는 여자에게 말한다. “당신을 안은 것이 욕망 때문이 아니어서 부끄럽지 않다”고. (드라마 ‘연인’의 종기)



    분명 ‘바람’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1960년대에도 70년대에도 또 80~90년대에도 바람은 있었다. 그런데 최근 불고 있는 ‘바람’은 분명 예전과 다르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했다. ‘불륜(不倫)’. 국어 사전식 정의에 따르자면 ‘인륜에 어긋남’이란 뜻을 가진 이 가혹한 단어는 내가 아닌 다른 모든 사람들의 외도에 대해 적용될 수 있는 ‘공식적’ 표현이었다. 사랑이라는 인간의 자유 감정에 대해 엄격한 윤리적 잣대와 규범을 가차없이 들이 댄 결과다. 그래서 드라마, 영화 속 외도는 늘 불륜이라는 굴레가 덧씌워진 채 어둡고 부정적으로 그려질 수 밖에 없었다.



    헌데 요즘 불고 있는 ‘바람’은 음침하지 않다. 가볍고 경쾌하다. 자신의 외도 때문에 심각한 죄의식에 빠져들지도 않고, 배우자의 외도 때문에 울며 불며 악을 쓰지도 않는다. 시쳇말을 빌자면 ‘쿨(cool)’하다.




    보편화된 기혼남녀의 외도





    인식의 변화에 따라 바람은 확산 일로다. 다른 이들의 이목 때문에, 또는 스스로의 죄책감 때문에 ‘뒤늦게 찾아온 사랑’을 외면했던 이들이 이제는 ‘자아 발견’이라는 포장을 둘러 쓰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찾아 나가기 시작했다. 결혼 생활 10년이 다 돼 가도록 외박 한 번 하지 않았다는 30대 중반의 직장인 K씨.



    그는 “지금까지는 정말 가정에만 충실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서는 정말 아름다운 사랑을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아내들’이다. 바람은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고리타분한 등식을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바람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여기엔 여성의 사회 진출 증가와 함께 인터넷 채팅, 휴대폰 문자 메시지, 이메일 등 바람을 위한 도구들이 급속히 늘어난 것도 한 몫을 하고 있다.



    ‘한국 남성의 전화’ 이 옥 소장은 최근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한다. “사회가 발전하고 경제 수준이 높아지면 심리적으로 본인의 삶을 추구하게 된다. 최근 들어 특히 여성의 외도가 크게 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성 외도의 증가가 곧 기혼 남녀 간의 외도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



    이혼에 대한 한없이 가벼운 상상도 최근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바람의 진원지일 수 있다. ‘이혼남’ ‘이혼녀’라는 ‘주홍 글씨’는 이제 대수롭지 않은 이력에 불과할 뿐이다. 최근 결혼 3년 만에 이혼을 한 30대 초반의 여성 K씨는 “아이에게 미안한 것은 사실이지만 불편한 결혼 생활을 계속하는 것 보다는 榮聆?내 인생을 찾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이혼 건수는 14만5,300건. 하루 평균 398쌍이 이혼을 했다. 인구 1,000명당 이혼 건수를 뜻하는 조이혼율은 3.0건으로 10년 전인 92년(1.2건)에 비해 2.5배나 늘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미국(4.0건)에 이어 이혼율 2위라는 불명예는 더 이상 우리나라가 결코 봉건적 가족 제도에 얽매여 있지 않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서울가정법원 홍중표 부장판사(가사4부)는 “이혼 재판 사건 중 거의 대다수가 배우자의 외도 행위를 주장하고 있다”며 “그만큼 이미 우리 사회 곳곳에 기혼 남녀의 바람이 보편화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라고 말했다.




    가족 제도 해체의 서막인가





    이혼의 증가, 독신(또는 싱글즈)의 확산, 동거 문화의 유행, 그리고 바람 열병까지. 최근 일고 있는 일련의 변화들은 범상치 않다. 학계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전통적인 가족 제도의 해체, 혹은 붕괴가 시작된 것이다”라고 조심스럽게 진단한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배우자의 또 다른 사랑을 바라 보는 데는 윤리적 잣대만이 가장 유용한 도구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파렴치하게 바람을 피울 수 있어?”, “배우자와 자식들이 겪을 고통을 생각해 봤어?” 등의 도식적인 도적적 훈계는 실제 현실과는 너무 괴리가 있다는 것이다.



    문화평론가 김동식씨는 “윤리적 관점에서는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며 “기존 가족 관계 내에서 새로운 인간 관계를 만들어 가는 흥미진진하면서도 위험천만한 실험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평했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도 “성이 사회 규범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 선호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성에 대한 것은 내가 판단하고 내가 하는 것이지 국가나 사회가 규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다”고 말한다.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인류학자 필리프 브로노가 쓴 ‘커플의 재발견’이라는 책에서도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고 있는 변화를 짚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일부일처제를 반(反) 자연적인 제도로 규정하는 그는 독자들에게 “당신에게 맞는 커플의 형태를 발견하라”고 주문한다.



    그는 한 예로 이렇게 제시한다. 신혼 때는 부부가 함께 가정을 꾸리지만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별거에 들어가 1주일에 2~3회 정도만 만남을 가지라는 것, 그래서 나머지 생활에 대해서는 서로의 독립성을 보장해 주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최근의 변화가 가족 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다. 이혼을 선택한 사람들이 다시 재혼을 하기도 하고, 한 때 심한 바람 열병을 앓던 이들이 얼마 후 제자리로 돌아오기도 하는 것은 역시 가족 제도의 경제성 혹은 합리성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황 교수는 “현재의 변화는 결혼 혹은 가족 제도가 개인들에게 너무 많은 희생을 강요한다는 판단 아래, ‘덜 희생하는 방향’을 찾아 나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며 “하지만 반대로 결혼이나 가족 제도에 유용성이 있다는 판단이 선다면 다시 제 자리를 찾아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미국, 프랑스 등 우리 보다 훨씬 먼저 자유분방한 성을 경험했던 나라들이 지금은 다시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가족 제도로 회귀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 어쩌면 이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을 지 모른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입력시간 : 2003-10-06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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