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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06 10:46:42 | 수정시간 : 2003.10.06 10:46:42
  • [여성1호] "여성 1호" 환호뒤의 씁쓸함
    할당·배려로 의미 축소, 동등한 기회 제공의 틀 마련

    “대통령이 될 거예요.” “늠름한 장군이 되고 싶어요.” “판ㆍ검사가 될래요.”



    장래 희망을 물었을 때 이런 답변은 늘 남자 아이들의 몫이었다. 여자 아이들의 답변은 달랐다. 선생님, 스튜어디스, 간호사, 그것도 아니면 현모양처 정도였다. 대통령이나 장군, 판ㆍ검사는 남자들을 위한 것이라고만 배웠다. 그런 직업에 대한 성 역할 학습이 파괴되기 시작한 것은 아주 근래 들어서 였다.



    여성 헌법재판관이, 장군이, 그리고 총리(서리)가 탄생했다. 이제 여성들에게 미답의 영역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여자 아이들도 스스럼없이 말한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또 장군이 되고 판ㆍ검사가 되겠다고. “그런 건 남자들이나 하는 거야”라며 핀잔을 주는 고리타분한 어른들도 더 이상은 없다.



    분명 세상은 변했고, 여권은 신장됐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남는다. 과연 ‘여성 1호’에게 쏟아지는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숱한 여성들에게 희망적인 것일까.










    저변 확대는 요원하다





    ‘국내 첫 여성 자동차 검사원 탄생’ ‘인천 첫 여자 소방파출소장 탄생’ ‘제과 제빵 여성기능장 첫 탄생’ ‘국내 첫 女 아이스하키 심판 탄생’ ‘건강보험공단 첫 여성 지사장 임명’ ‘사상 첫 장관 수행 여성 비서 탄생’ ‘농협에 첫 여성 조합장’ ‘중앙부처 기술직공무원 첫 여성 과장 탄생’….



    주요 일간지 ‘사람면’을 심심찮게 도배하는 숱한 ‘첫 여성 탄생’의 기사들은 아직까지 양성 평등을 위해 가야 할 길이 얼마나 멀고 험한 지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아직도 여성들에게 벽은 높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고, 이를 홍보의 대상으로 활용하겠다는 얄팍한 계산이 깔리기도 한다.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아니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되는’ 공식을 철저히 따르고 있는 셈이다. 지금 이 순간, 평범하게 살아가는 대다수 여성들은 ‘사람이 개를 무는’ 희귀한 뉴스를 접하며 여전히 ‘개에게 물려야 하는’ 자신의 현실을 한탄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라는 얘기다.



    핵심 요직의 ‘여성 1호’를 접하는 사람들은 “아, 또 그 사람”이라는 탄식을 내뱉게 된다. 사법부 내 ‘여 판사 3인방’으로 통하는 전효숙 헌재 재판관, 이영애 서울고법 부장판사, 김영란 대전고법 부장판사. ‘최초 고법 형사부장’ ‘최초 고법 부장’ ‘최초 지역 선관위장’ ‘최초 헌재 재판관’ ….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여성 1호’의 기록을 갈아치운 것은 이들 몇몇일 뿐이었다.



    강금실 법무장관이 ‘형사부 여성 첫 단독판사’ ‘민변 첫 여성 선출직’에 이어 ‘여성 첫 법무장관’까지 혼자서 숱한 기록을 독식한 것을 비롯해 전재희 한나라당 의원(첫 행시 합격, 중앙부처 첫 국장, 첫 시장) 장명수 한국일보 이사(최장수 기명 칼럼, 첫 주필, 언론사 첫 사장) 등 1호의 자리는 늘 소수의 여성들이 독점했다.



    여성민우회 최명숙 사무처장의 말에는 뼈가 있다. “물론 여성 개척자들의 의미를 폄하할 이유는 없습니다. 핵심은 1호의 탄생이 저변 확대로 이뤄지느냐 입니다. ‘누가 1호냐’는 사람의 문제로 바라보지 말고 2호, 3호가 탄생하는 기간이 얼마나 줄어 드느냐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팍팍한 현실 속 여성들





    이른바 ‘맞벌이 주부’ L(38)씨. 남편과 똑 같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 ‘맞벌이 주부’라는 도무지 양립하기 힘든 조합의 호칭을 달고 다녀야 하는 사회 통념 자체가 불만스럽다.



    “왜 슈퍼우먼 콤플렉스라고 하잖아요. 여성들이 콤플렉스를 느끼는 것이 아니고 사회가 강요하는 것 아닌가요? 직장에서는 남성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을 해야 하고, 가정에서는 온갖 집안 일을 다 떠맡아야 하잖아요.” 그녀는 여권 신장이란 여성의 사회 진출이 다소 많아졌다는 것일 뿐 여성들의 삶 자체를 더욱 팍팍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어디 그것 뿐인가요. 육아의 책임은 모두 여자에게 떠맡겨 놓고서도 회사에서는 마치 선심성 배려라도 하는 듯한 눈치를 주죠.”



    각종 통계는 우리 주변 여성들의 현실을 가감 없이 볼 수 있는 바로미터다. 유엔개발계획(UNDP)이 매년 산출하는 여성권한지수(GEM)에서 우리나라는 올해 전 세계 70개국 중 63위를 차지했다. 우리나라 보다 아래 쪽에 있는 나라는 캄보디아 터키 방글라데시 예멘 등 이슬람 국가가 대부분이다. 이 뿐이 아니다. 5급 이상 전체 공직자 중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4.8%로 유엔 권고치(30%)에 턱없이 미달하고 있다.



    설문 조사 결과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인터넷 채용정보업체 잡링크가 여성 직장인 2,000여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한 결과 조사 대상 72.5%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직장에서 승진이나 연봉에서 차별을 받아 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또 여성의 직장 생활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결혼과 육아문제’(46%) ‘사회적 편견’(25.4%) ‘불평등한 근로조건’(19.2%) 등을 꼽았다. 여전히 아직 여성 문제는 민주화 사회의 마지막 프론티어(전선)로 남아있는 셈이다.




    여성 할당의 명과 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고위직 진출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여성 할당제’ 등을 통한 정책적 배려의 성격이 다분하다. 일반 기업이나 금융계 등 민간 부문에 비해 공무원 등 관계의 여성 고위직 진출이 훨씬 활발한 것도 이 때문일 수 있다.



    물론 지금껏 남성들이 여성에 비해 많은 혜택을 받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을 할 수 있도록 배려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손봉숙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이사장은 “만약 지금부터 남성과 여성에게 동등한 기회를 줄 테니 자유 경쟁을 하라고 하면 그건 공정한 게임이 되지 못한다”며 “동일선상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여성들에게 일시적이나마 기회를 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저변 확대는 도외시한 채 구호성에 그치는 외화 내빈의 여성 정책으로는 양성 평등 사회를 기대하기 힘들다. 올 2ㆍ27 내각이 발표되자 환경부 내부에서는 “또 여성 장관이냐”며 자조 섞인 반응이 나왔다. 손 숙, 김명자 장관에 이어 한명숙 장관까지 3대째 연속으로 여성 장관을 모시게 된 것에 대한 직원들의 불만이었다. 한 관계자는 “물론 여성 장관 그 자체가 싫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성 비율 조정용 부처라는 오명을 벗지 못했다는 점에서 씁쓸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정부 한 관계자는 “무슨 위원회를 구성한다든지 자문위원을 선정할 때 요즘은 반드시 여성을 일정 비율 이상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문이 뒤따른다”며 “그래서 여성 진출이 거의 이뤄지지 않은 분야의 경우 절대적 기준치에도 못 미치는 인물을 어쩔 수 없이 택해야 하는 경우까지 있다”고 했다.



    여성계는 이런 부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여성 1호’의 역할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고 한 목소리를 낸다.



    “역시 여자라서 안돼” “능력도 없으면서 자리만 요구한다” 는 등의 비판과 함께 사회가 다시 과거로 역행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이 능력을 당당히 인정 받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아가 혜택 받은 그들이 직접 나서서 소외된 여성 다수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데 밑거름이 돼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1호 여성들에게 주어진 무거운 책임이기도 하다.



    이영태 기자 ytlee@hk.co.kr


    입력시간 : 2003-10-06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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