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노무현의 도박] '재신임' 정면돌파 자충수인가? 승부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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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15 17:09:52 | 수정시간 : 2003.10.15 17:09:52
  • [노무현의 도박] '재신임' 정면돌파 자충수인가? 승부수인가?
    국정혼란 감수한 초강수, 노무현식 정치 시험대에





    10월10일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 정치사에 전무후무한 폭탄발언을 내놓았다. 느닷없는 대통령의 재신임 발언. 국민 모두가 쇠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여당인 통합신당은 물론 내각 및 청와대 비서진 등 친노 진영부터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30%대의 낮은 지지율을 보이는 노 대통령에 대해 이분법적 선택을 요구할 경우 반대세력들은 당연히 ‘불(不)’ 쪽으로 설 것이기에 이런 승부수는 당연히 ‘자충수’라는 평가가 다수였다.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끝나자 마자 발언 번복 가능성을 우려해 서둘러 국민투표가 유일 해법이라고 압박하고 나섰다. 대선 패배의 후유증을 1년 만에 털어낼 수 있는 호기가 왔다며 내심 쾌재를 부른 것. 한 의원은 “불신임 이후를 대비해 미국에 있는 이회창 전 총재를 데려와야 한다”는 성급한 대안까지 쏟아냈다.

    그러나 다음날인 11일 정가 분위기는 전날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내각과 청와대 비서진이 전원 사의를 표명한데 대해 노 대통령은 재차 기자회견을 열고 사의를 즉각 반려한 뒤 재신임을 묻는 방법으로는 국민투표가 가장 분명하다고 못박았다.

    또 전날에는 재신임 이유를 측근의 비리 의혹에 따른 축적된 정권 불신을 들었지만, 이날은 국정혼란의 주된 원인을 기득권층의 저항이라고 설정한 뒤 재신임은 정치개혁을 위한 불가피한 제안이라고 슬쩍 말을 바꾸며 공세로 전환했다.

    국민투표를 회피할까 봐 걱정하던 한나라당은 오히려 신중론에 무게를 실었고, 전날까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신당은 부패정치를 척결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며 노 대통령 발언을 옹호하고 나섰다.

    이같이 180도로 뒤바뀐 정가의 움직임에는 여론조사기관의 가상 표 대결 결과가 크게 영향을 미쳤다. 6개 기관에서 발표한 조사 결과는 모두 오차범위 수준을 조금 넘는 선에서 재신임 의견이 더 많았다.

    노 대통령은 13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더욱 공세적으로 나왔다. 투표시기는 12월15일 전후로 하되 재신임시에는 내각 및 청와대 개편을 통한 국정개혁의 계기로, 불신임시에는 대통령 사퇴와 함께 내년 4월 17대 총선에서 새로운 대통령 선거를 병행 실시하겠다는 ‘로드맵’을 내놓았다. 또 측근 비리에서 점화된 정권의 도덕성 문제보다는 부패로 얼룩진 정치권 전체에 대한 국민심판으로 무게중심을 옮겨 놓았다.

    상황이 예상밖의 방향으로 흐르자 노 대통령의 폭탄 발언은 특유의 럭비공 같은 성격에서 촉발된 돌발상황이 아니라 치밀한 사전점검을 거친 시나리오라는 가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는 바로 정국위기의 정면돌파를 위한 ‘노무현식 셀프 쿠데타(self-coup)’라는 것이다.


    여론조사에서는 盧, 辛勝



    언론사와 여론조사기관의 조사결과를 보면 3.3~13.2%포인트 차이로 모두 재신임쪽 견해가 다수였다. 중앙일보 조사가 47.7%(재신임)대 44.4%(불신임)로 간극이 가장 좁았고 한국일보ㆍ미디어리서치 조사가 52.4%(재신임)와 39.2%(불신임)로 격차가 가장 컸다.

    한국일보 조사에 따르면 연령대로 볼 때 40대를 제외하고는 20~30대와 50~60대이상에서 모두 재신임 의견이 높았고, 지역별로도 전국에서 재신임 의견이 고르게 높았다. 특히 호남과 충청지역은 두배에 가까운 차이로 재신임이 많았다.

    그러나 노 대통령에 대한 국정수행 지지도를 묻는 질문에는 “잘하고 있다”가 32.1%에 그친 반면 “잘못하고 있다”는 두배가 넘는 65.1%에 달했다.

    즉 “노 대통령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임기는 끝까지 마쳐야 한다”고 보는 이들이 많은 것. 대체로 반노 견해가 많은 60대 이상에서도 51.0%(재신임)와 36.9%(불신임)의 압도적 차이를 나타낸 것과, 한나라당 아성지역인 영남권에서도 재신임 의견이 높았던 점도 이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특이점은 호남과 충청권의 재신임 강도이다.

    먼저 호남은 65.5%대 31.0%로 ‘더블스코어’를 넘기며 재신임에 무게를 뒀다. 민주당과 통합신당의 분열로 이 지역의 노 대통령 지지도가 30% 이하로 떨어진 것에 비하면 의외의 결과다. 이런 결과에는 역시 영ㆍ호남 지역감정이 작용했다. 만약 불신임 의견이 높아 대통령이 하야하거나 정권의 핵심기반을 다른 정당으로 넘기는 상황이 올 경우 ‘적군’ 격인 한나라당이 집권에 버금가는 권력점유 상황이 올 것을 우려했다는 것이다. “노무현도 싫지만 한나라당은 더 싫다”는 묘한 심리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충청권의 재신임 의견에는 실리적인 면이 작용했다. 행정수도 이전 문제로 충청권이 부동산 황금시장으로 각광받기 시작하는데 만약 노 대통령이 불신임되면 이 같은 장밋빛 환상이 깨지게 될 것을 우려해서다. 노 대통령이 직접 국민투표 방안을 언급한 배경에는 이런 결과를 사전에 간파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盧, 이길까? 질까?



    노무현 대통령이 재신임을 묻겠다는 기자회견을 하는 동안 문제인 민정수석, 김세옥 경호실장, 문희상 비서실장(왼쪽부터)이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오대근 기자

    그러나 재신임 국민투표시 지금의 여론조사 결과가 재현된다는 보장은 없다. 불과 기자회견 1~2일만에 치러진 조사결과이며 가부(可否) 차이도 얼마 되지 않는다. 여기에다 국민투표가 실시될때까지 2개월동안 어떤 변수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가 아들 결혼식으로 10월22일 귀국하는 것도 하나의 중요 변인(變因)이다.

    결과는 두 갈래다. 노 대통령이 이기거나 질 경우다. 재신임을 받으면 노 대통령은 검찰 수사가 진행중인 SK와 관련한 최도술 전 총무비서관의 정치자금 수수 문제에서 상당부분 자유로워진다. 현 정부의 개혁정책도 보다 탄력성을 받아 내각과 청와대 비서진의 전면 개편을 통한 국정쇄신을 기할 수 있게 된다. 더불어 통합신당도 내년 총선에서 약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불신임이 우위에 설 때다.

    아직은 재신임론이 우세하지만 앞날은 그리 녹록치 않다. 당장은 동정론이 많이 포함돼 있으나 대통령의 진퇴여부가 국가 전체의 뜨거운 감자로 서서히 대두되면서 상황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지금 같은 상태로 4년여를 지속시키는 게 과연 바람직한지 아닌지를 냉철히 판단해야 하는 시점이 올수록 결과는 더욱 예측불허가 될 가능성이 많다.

    재신임이 됐다 해도 정국이 안정되는 것도, 또 노 대통령의 측근과 관련한 비리의혹 수사가 마무리되는 것도 아니다. 국민적 환기는 한순간 이뤄지겠지만 그것도 잠시뿐이다. 또 다른 정국 격랑은 계속 밀려들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현 정권에 대한 대안이 설득력 있게 제시될 경우 국민의 선택은 그 쪽으로 확 쏠릴 수도 있는 것이다.

    불신임으로 결정된다면 노 대통령은 2월 중순경 하야한 뒤 이후 2개월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4월 총선과 함께 새 대통령을 선출하는 대통령선거를 치르게 된다.

    노 대통령 주변에서는 “대선 후보 경선에서도 예상외로 1위를 했고,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도 여론조사 방법을 전격 수용하면서 이겼다”며 “이번 승부도 TV토론 등을 통해 국민 이목을 집중시키면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12일 광주 노사모에 지지자 재결집을 의미하는 친서를 보내는 등 사실상의 재신임 운동에 들어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재신임 국민투표 못치를 수도



    우리의 정치구조사상 전국적인 투표는 지역구도의 패키지식으로 흐르는 게 다반사다. 이번 국민투표도 예외일 수 없다. 이 경우 가장 관심을 끄는 지역은 노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 기여를 해줬으나 신당 태동 및 DJ와 전 정권 실세들에 대한 푸대접 등으로 더욱 소외감을 느끼는 호남민심이다.

    한나라당이 불신임에 무게를 두고 통합신당이 재신임 쪽에 서 있어 정당간 캐스팅보트의 열쇠는 민주당이 쥐고 있다. 이들 선택에 호남민심이 영향을 받는다고 보면 사상 처음으로 캐스팅보트 역할을 호남이 맡는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 불신임이 되면 정권을 통째로 한나라당에게 넘겨줄 수도 있다. 호남민심도 이를 우려해 현재까지는 60%가 넘는 재신임 찬성률을 보인다. 또 국민투표를 통해 노사모 등 노 대통령 지지자들이 다시 결집하게 되면 안방인 호남까지 오히려 신당기운이 밀려들 수 있다.

    ‘산토끼 잡으려다 집토끼마저 내주는’ 형국이 올 수도 있는 것. 이에 박상천 대표 등 당 지도부는 아예 국민투표 자체를 거부할 심산이다. 민주당은 국민투표 실시여부는 국회에서 결정해야 한다며 4당 대표회담을 제의하는 등 실시 거부 쪽에 마음을 두고 있다.

    한나라당도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적극 환영했지만 노 대통령이 말을 바꾸면서 한나라당의 입장도 수정되고 있다. 여기에는 ‘지는 게임’으로 나오는 여론조사결과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최병렬 대표는 “측근 비리에 대한 재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는 받아들이지만 정치권 전체를 결부한다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못박았다. 노 대통령의 정치 술수에 말려들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런 이유에서 재신임 국민투표가 자칫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반대로 실시되지 못할 수도 있다. 여론추이가 가장 중요한 변수겠지만 재신임 쪽으로 굳어질 경우 이들 정당은 굳이 투표에 찬성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의도 정가에서는 때아닌 ‘빅딜’이야기가 솔솔 퍼지고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전략적 제휴 시나리오다. 권력분점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없지만 차기 정부의 내각 공동구성 등 양측이 선호하는 조건을 고리로 손을 잡는다면 결과는 노 대통령의 ‘셀프 쿠데타’는 실패로 끝날 수도 있다. 아직까지 영ㆍ호남의 대주주인 김영삼ㆍ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염영남기자 liberty@hk.co.kr


    입력시간 : 2003-10-15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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