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종가기행 32] 平康蔡氏 樊巖 蔡濟恭(평강채씨 번암 채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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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7.01.10 14:32:38 | 수정시간 : 2007.01.10 16:58:06
  • [종가기행 32] 平康蔡氏 樊巖 蔡濟恭(평강채씨 번암 채제공)
    세 번의 養子거친 손 귀한 집안 소장 유물 135점 수원시 기증
    7대종손 채수용(蔡洙用)씨, 종숙 부부 중심 번암선생 기념 모임 결성 등 현양 사업 본격화









    남인(南人)들의 정신적인 지주요, 정조 때 수원성 건설 책임자며 수년 동안 독상(獨相, 한 정승이 다른 정승의 업무를 겸함)으로 명성을 떨친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종손을 그의 종숙모(從叔母)를 통해서 만날 수 있었다. 번암 7대 종손인 채수용(蔡洙用, 1932년생) 씨는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중동의 아파트에 부인 고령 신씨와 살고 있다.

    필자는 번암 종가 소식을 지난해 10월 11일 종가 소장 유물을 수원시에 기증한 뉴스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보도된 내용은 ‘번암 채제공 선생의 6대 종손인 채호석(78, 서울 서초구 서초3동) 씨가 135점의 유물을 수원시에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다음날 수원시장 등 관계자와 유물을 기증하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선보였다. 그러나 채호석 씨는 종손이 아니다. 이는 언론의 오보다. 채호석 씨는 7대 종손의 종숙(從叔, 5촌아저씨)이다.

    채호석 씨의 부인 김양식(韓印문화연구원 원장, 1931년생) 씨를 서초구 사무실에서 만났다. 종손의 종숙모인 김 씨는 번암 채제공 선생의 유물과 자료를 모으고 선생을 현양하는 데 일생동안 노력했다. 그간 수집한 참고 자료철이 몇 권에 이르고, 자비로 관련 사료를 모으는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시집 와서 번암 상공 댁임을 알고 ‘평생 이 어른을 현양하며 살아야겠다. 그것이 내 운명이다’ 생각했습니다.”

    종가 소장 유물은 종손과 종부의 헌신적인 희생과 노력으로 유지, 보존된다. 형언키 어려운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세전(世傳) 유물에 대해 손을 대지 않는 것은 반가(班家)에서는 당연함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이를 처연(悽然)함으로 이해한다. 기증 유물 목록을 보니 10여 장에 이르는 국왕 정조의 친필도 남아 있었다. 경매하면 편지 한 장만으로도 적지 않은 돈을 받을 수 있음에도 그러한 일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지켰고, 이제 이를 사회에 희사한 것이다.

    번암 종가는 특히 손이 귀한 집이다. 7대를 이어오면서 세 번의 양자가 있었다면 달리 설명이 필요치 않다. 양자는 후사를 두지 못해 가문의 단절이 우려될 때 행해진다. 따라서 과정의 우여곡절로 인해 온전한 전통 계승이 되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다. 번암은 아들과 손자 양 대와 현손 대에 그러한 어려움이 있었고, 현 종손의 조부에 이르러 3대동안 종자(宗子)로 대를 잇고 있다.

    7대 종손 채수용 씨
    종손은 어려서부터 가난과 지병으로 정상적인 학업을 계속하지 못했다. 7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는 말을 듣고 초년 고생에 대해 더 묻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가난은 세습되었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해 산업화와 도시화의 혜택도 누리지 못했다. 그러던 중 세의(世誼)가 있던 강주진(姜周鎭, 전 국회도서관장, 1919년생) 박사가 종손에게 국회도서관 일자리를 마련해주어 20여 년간 근무했다. “고모댁이 있는 섬에서 요양 중이었는데, 강 박사께서 백방으로 번암 종손인 저를 찾아서 서울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이야기 많이 들었네, 그만 나하고 같이 근무하세’라고 해서 시작했는데, 건강 때문에 1년이나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 것이 20여 년 동안 국회에서 근무했어요.

    그런 고마운 분이 없어요. 제 은인입니다.” 성음이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강주진 박사의 은혜에 무한히 감사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세의란 사승, 혼인, 동방, 같은 당류, 동향, 동경(동갑) 등으로 맺어져 상당기간 지속된 우호적인 관계로, 개인 또는 가문이나 집단간에 오래 이어져 형성된다. 이들은 은혜를 골수에 새겨 잊지 않았다. 세의는 번암의 스승 국포(菊圃) 강박(姜樸, 1690-1742)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는 번암의 종조부인 채팽윤의 시맥(詩脈)을 계승한 이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강 박사가 세의를 말했다면 필시 그는 국포 강박의 후손일 것이다.

    종손에 있어서 종숙 내외는 든든한 후견자요 대변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종손 역시 그렇게 여기는 것 같았다. 매사를 종가를 지
    뇌문비
    킨다는 관점에서 사심 없이 일을 처리해왔기 때문이다. ‘지공무사(至公無私)’. 매우 공적이어서 조금의 사사로움도 없다는 이 말이 번암 종가 종숙 내외의 처사에 핍근(逼近)하다고 생각한다.

    종숙모 김양식 씨는 역주(譯註, 이종찬)된 <함인록(含忍錄)> 한 권을 내놓았다. 이 책은 부제로 채제공연행시(蔡濟恭燕行詩)라고 되어 있었다. 종숙모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와 동국대 대학원에서 인도철학을 전공한 원로 시인으로 <겨울로 가는 나무> 등 일곱 권의 시집과 다수의 번역서, 수필집을 냈다.

    이제 번암 종가에서는 그간 올곧은 정신 하나로 간직해온 힘겹고 무거운 짐을 수원시 화성박물관에 내려놓았다. 차후 종숙 내외를 중심으로 번암 선생을 기념하는 모임을 결성해, 보다 체계적으로 현양 사업을 펼 예정이라 한다. 2005년 문화재청에서 개혁정신과 혁신리더십의 스승으로 꼽은 조선 시대 학자 7인(정도전, 이이, 류성룡, 김육, 최명길, 채제공, 정약용)에 번암이 들어 있다. 번암 선생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봄직하다.

    체제공 연행시집 함인록
    청나라의 오만함 詩로 응징

    수원시에 유물을 기증하는 장면
    번암 채제공의 연행시집이다. 번암 채제공은 정조2년(1778년, 59세) 왕복 132일 일정으로 청나라에 사은사 겸 진주사(陳奏使)로 다녀오면서 노정에 따라 236수의 한시를 지었다. 이 책 이름은 원한을 삼키고 분통을 참아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처지를 그대로 담고 있다.

    사행은 56년간의 벼슬살이 중 가장 굴욕감을 느낀 때이기도 하다. 진주사는 청 왕실에 알린 정조 즉위에 대한 외교 문서가 격식에 맞지 않아 그에 따른 해명 차원에서 만들어진 사행. 병자호란이라는 민족적 굴욕을 가슴에 품고 있던 차에 이러한 외교적 마찰이 일어나 이를 원만히 풀 적임자로 번암이 뽑힌 것이다. 번암은 굴욕을 참고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렇지만 줄곧 그 불편한 마음을 토로할 곳이 없자 당초 자신만이 볼 목적에서 기행시를 지었다. 놀라운 점은 청나라에 대한 반감이 정도를 넘어섰다는 데 있다. 실승사(實勝寺)라는 제목의 시가 대표적이다.

    사월 정향꽃 가지 가득 피었어도

    나그넨 말없이 비석만 훑어본다.

    우리는 안다네, 바다 위 저 둥근달도

    이내 그 모습 이지러진다는 것을.

    실승사는 청나라 건륭황제의 원찰(願刹)로, 친필로 쓴 ‘해월상휘(海月常輝)’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이 시가 단순히 그 현판 구절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랑캐로서 한족의 문화를 말살했고, 조선을 침범해 굴욕을 안겼으며, 외교적으로도 이웃나라를 업신여기는 청나라의 오만함을 사행 길에서 한 편의 시로 응징한 것이다.

    ‘기고만장한 건륭황제, 당신도 머지않아 기우는 달 신세가 될 것이요’라는 그의 시 내용과는 달리 건륭황제는 이후 17년을 더 황위(재위 60년)에 있었다. 당시 사행 길에는 서장관으로 명문장가 심염조(沈念祖, 1734-1783)가, 종사관으로는 북학파 대가 박제가(朴齊家)가 수행해 유명한 북학의(北學議)라는 책을 남기기도 했다. 심염조는 그 휘하에 청장관 이덕무를 대동했다. 이덕무는 연암 박지원의 절친한 벗으로, 연암은 그의 문장을 높이 평가하여 한음 이덕형이나 문곡 김수항 정도의 성취가 있을 것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채제공 1720년(숙종46)-1799년(정조23) 본관은 평강,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 시호는 문숙(文肅)
    영·정조 때 탕평책 실행의 주역… 수원 화성 축조 총지휘

    조선의 개혁다운 개혁이라고 하면 탕평책(蕩平策)을 떠올릴 수 있다. 영조가 처음 시작한 탕평책은 정조에 의해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으나 미완의 개혁으로 끝났다. 영조가 탕평비(蕩平碑)를 세워 그 확산에 힘썼고 정조는 자신의 거처를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고까지 지어 결의를 다졌다. 탕평책의 핵심은 인재의 공평한 등용에 있었고, 덕분에 재야에 있던 소론과 남인 선비들이 다수 발탁되었다. 정점에 번암 채제공이 있었다. 그렇기에 번암의 부침은 탕평책의 성패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번암 자신도 학통으로 보면 미수 허목에 닿는 청남(淸南)의 후예이지만 이를 뛰어넘어 대통합을 이루려는 소명의식이 있었다. 그래서 포용과 공정함으로 매사를 처리하고자 했다. 그는 ‘서회(書懷)’라는 시에서 “내 몸은 서남노소국을 벗었고(身脫西南老少局)/내 이름은 이예호병 반열을 뛰어넘었네(! 名超吏禮戶兵班)”라 노래했다. 이 시구는 ‘서인, 남인, 노론, 소론이라는 당파적 굴레를 벗어버리려 했고, 조정에서는 이부, 예부 호부, 병부니 하는 구획마저 뛰어넘고자 했네’라는 의미다. 짧은 시구이지만 탕평책 전도사로서의 드넓은 포부가 잘 드러나 있다.

    탕평책 실시는 그러나 결국 기득권 세력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자리가 사라지는 손실을 의미했다. 거개가 노론 세력이었는데, 반감의 대상에 소론과 남인이 있었고, 이들의 존경을 받았던 번암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번암은 집요한 공격을 받았다. 공격이 얼마나 집요했는지는 국왕인 정조가 번암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이간하는 글이 상자에 가득해도/결코 나는 의심하지 않았네”라는 표현으로 짐작할 수 있다. 노론 세력은 정조와 번암의 개혁에 쉼 없이 제동을 걸었고, 만물을 포용하는 도량이 있었던 번암이 세상을 떠났을 때 마침내 총공세를 폈다.

    “채제공은 글을 쓰는 데는 소차(疏箚)에 뛰어났고, 일을 만나서는 권모술수를 좋아했다. 외모는 거칠게 보였으나 속마음이 실상은 비밀스럽고 기만적이었다. 늘 연석(筵席, 경연 석상)에 나아가서는 웃으며 말했다. 누구를 찬양하고 헐뜯거나 찬양하는 데 있어서 교묘하고 상(上)의 뜻을 엿본 뒤 물러나서는 상의 총권(寵眷)을 빙자하여 은밀하게 자기의 사적인 일을 성취시키곤 하였다. (중략) 서학(西學, 천주교)에 연연해 흐리멍텅한 태도로 은근히 사당(邪黨)을 비호하다가 끝내 하늘에 넘치는 큰 변이 있게 만든 사람이다”라 했다.

    이례적인 것은 이러한 평 뒤에 국왕의 전교(傳敎)가 실려 있는데 “내가 이 대신에 대해서는 실로 남은 알 수 없고 혼자만이 아는 깊은 계합이 있었다. 이 대신은 불세출의 인물이다”는 내용이 왕조실록에 보인다. 국왕은 번암은 대신(大臣)이라고 한 뒤 남은 알지 못하고 나만이 아는 ‘오계(奧契)’가 있다고 했다.

    ‘오(奧)’라는 글자는 ‘속’이라는 뜻으로 ‘속마음’을 말한다. 번암은 정조의 부친인 사도세자를 가르쳤고, 정조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세손의 사부(師傅)로서 깊은 교감이 있었던 관계다. 이러한 표현은 번암이 도승지로서 목숨을 걸고 사도세자의 폐위를 막은 데서 나온 것으로 본다. 후일 영조는 정조에게 “진실로 나의 사심 없는 신하요 나의 충신이다”라고 소개했다.

    정조와 번암은 부자유친(父子有親)에서 보이는 ‘친(親)’을 느끼는 사이였다고 생각한다. 국왕이 번암의 장례일에 지어 바친 글을 읽어보면 언외(言外)에 넘치는 친함을 느낄 수 있다. 그 글이 오석(烏石)에 새겨져 단청을 한 비각 속에 남아 지금도 길손에게 증거하고 있다.

    조정에 노성한 신하 없으니

    나라의 일 이제 어찌할 것인가.

    친히 기리는 글 지으니 오백여 마디

    평소의 일 두루 서술하니

    나의 글에 부끄러움 없네.

    아들 홍원에게 이르노니

    선친을 더럽히지 말지어다.

    마지막 구절인데, 번암의 그 훌륭했던 얼을 상주에게 어기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수년간 나홀로 정승지낸 獨相

    번암 하면 독상(獨相)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연보에 보면 3년 독상을 했다고 되어 있고 왕조실록에는 5년 독상이라는 구절이 보인다. ‘독상’은 왜 생겼을까? 이는 삼공(三公)과 같은 중임을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다고 여긴 때문이다. 하여튼 그는 상당 기간 동안 혼자 정승을 지내며 국정을 살폈음이 분명하다. 역대로 독상을 지낸 이를 살펴보니 세종 때 방촌 황희, 선조 때 소재 노수신, 현종 때 퇴우당 김수흥 정도가 있을 정도로 드물다.

    조선시대에는 세 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에 대해 최고의 존경을 표했고, 그들도 영예로 알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 성씨에는 정승이 몇 분이다’라는 것으로 가문의 위상을 말했다. 실제로 영남 남인들의 본거지인 경상북도에서 조선 시대에 정승을 지낸 이를 손꼽아보면 소재 노수신, 약포 정탁, 서애 류성룡, 낙파 류후조 등에 불과해 그 적은 수에 놀란다. 각 왕조마다 무수한 정승이 명멸해 갔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도 정승의 반열에 들지 못했다. 그런데, 번암은 영의정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여러 해 동안 동료 정승 임명 없이 단독으로 업무를 수행했다는 점이 놀랍다. 더구나 당시는 국왕이 망국적인 당파를 혁파하겠다고 탕평책을 펼쳐 정파 간의 이해가 첨예했을 때였다. 번암은 국왕의 탕평책을 받들어 노론과 남인을 넘나들며 조정하고 화해하며 그 운신의 폭을 넓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영남의 양심적인 사류 발굴과 그들의 숙원이었던 명예회복에 힘썼다.

    번암 집안은 명문이다. 번암 자신은 채씨를 ‘나라의 저명한 성씨(國之著姓)’라 규정했고, 이를 지속하기 위해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효도와 공손한 태도를 지니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 중심에 종고조(從高祖)인 채유후(蔡裕後, 1599-1660)가 있다. 채유후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들어갔고 대제학을 지냈으며 인조와 수정선조실록 편찬에도 참여했다. 특히 영조는 채유후의 문집(湖洲集)에 글을 적고 당시 승지로 있던 현손(玄孫)인 번암에게 글씨로 쓰도록 명했을 정도였다.

    채유후의 손자 대에 수찬을 지낸 오시재(五視齋) 채명윤(蔡明胤, 종조)과 대사간을 지낸 희암(希菴) 채팽윤(蔡彭胤, 종조)도 유명하다. 조부인 채성윤(蔡成胤)은 한성부윤을 지냈고 부친인 채응일(蔡膺一)은 진사시에 1등을 한 뒤 단성과 비안 고을 수령을 지냈다. 35세 때에 충남 청양에서 번암을 낳았다. 지금의 충남 청양군 화성면 구재리로 선생을 추모하는 사당이 남아 있다. 번암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의 누이를 며느리로 맞았다. 따라서 다산에게 번암은 사장(査丈)이 된다.

    막힘없는 문장으로도 명성

    번암 상공의 문집을 보면 ‘역시 채번암’이라는 생각이 든다. 막힘 없는 문장과 정채한 문채로 많은 글을 남겼기 때문이다. 번암이 지은 서문이나 행장, 신도비명 한 편으로 그간의 억울함을 풀기도 하고 문중의 위상이 달라지기도 했다. 그래서 앞다투어 글을 봉청했다. 필자의 17대조 문집 서문 역시 그러한 대접을 받고 있다. 입향조 문집에는 특유의 돈암 상공 필체가 그대로 남았다. ‘돈암집서(遯菴集序)’라는 제목으로 실린 서문을 다시 읽으면서 번져오는 가슴의 감동을 억누를 길 없었다.

    입향조는 단종을 지지해 성균관에서 나와 고향도 버린 채 산간 오지였던 충절의 고장 경북 순흥(順興) 땅으로 찾아들었다. 입향조 자신은 물론 숙종 대까지 숨죽이며 살았기에 유고를 잘 챙기지 못했다. 겨우 직접 지은 시 한수와 후대에 충절을 기린 글을 수습해 '일고(逸稿)'로 엮어 비로소 서문을 청했다. 가문의 성취로 보면 현격한 차이가 있었으나 충의의 정신만은 뒤지지 않는 터였다. 서문을 청한 10대손은 그러한 보잘 것 없는 문집을 내놓기에 면구했던 모양이다.

    그러한 기운을 간파한 번암은 웃으면서, “그대는 채미가(採薇歌)를 아십니까? 그 노래는 모두 44글자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그 빛은 태양과 달처럼 하늘에서 아름답게 빛나지 않습니까? 채미가가 짧다는 사람을 듣지 못했습니다”라 하면서 입향조의 시 두 수를 백이숙제가 불렀던 채미가(고사리노래)에 견주었다. 이는 최고의 찬사요 격려였다. 번암의 글 구성 수법과 의리를 드러내는 법식이 대체로 이러했다.

    번암의 이러한 태도는 매사에 선(善)을 다하라는 다짐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번암의 당호는 ‘매선당(每善堂)’이었다. 다행히 다산 정약용이 쓴 매선당의 기문이 남아 있어 그 유래를 알 수 있다. 다산이 문과에 급제한 뒤 번암 상공 댁을 찾았고, 그곳에서 매선당이라는 현판을 보았다. 유래를 묻자 번암은 “이것은 내 아버님께서 남겨주신 뜻일세. 선고께서 임종하실 때 내 손을 잡고 ‘너는 매사에 선(善)을 다하라’라 말씀하시고 돌아가셨네”라 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비로소 번암의 적선(積善)이 유래가 있는 말임을 알았다. 다산은 기문에서 중용 구절을 인용해 매사에 완벽한 선을 굳건히 지켜 실천할 것을 주문했다.

    번암은 수원화성 축조와 사도세자의 능(顯隆園) 건설의 총책임자였다. 당시 번암은 70세의 노구로 좌의정 자리에 이른 원로 대신이었다. 그만큼 성 건설은 중요한 일이었다. 수원화성은 2년 6개월 만에 완성되었는데, 번암을 비롯한 다산 등이 참여한 성 축조에는 거중기 등 과학 기술이 동원되었다. 1796년 9월에 완성된 수원화성은 종묘, 창덕궁 등과 함께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1798년 정계에서 은퇴한 번암은 80세를 일기로 1799년 1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왕명으로 문숙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오늘날의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에 장사지냈다. 사후 즉시 왕명으로 문집 간행이 추진되었고 천주교를 비호했다는 노론 벽파의 탄핵을 받아 관작을 추탈당했다.

    평소 양심적인 세력으로 지지해주었던 남인 선비들에 의해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순조24년(1824)에 서애 류성룡의 8대손인 학서(鶴棲) 류태좌(柳台佐, 하회 본가 후손들은 ‘태’자를 너라는 의미의 ‘이’자로 읽는다) 등의 주도로 안동에서 번암집이 간행되었다.

    시공을 넘나드는 아름다운 세의(世誼)를 확인하는 셈이다. 목판은 이후 안동시 서후면 소재 봉정사에 보관되었며, 다시 안동 김씨 소산종중에 의해 점유되었다가 근자에 번암 문중이 인수해 안동시 소재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 보관했다. 유물 대부분이 수원시에 기증된 것에 비해 목판은 안동에 남아 200년 전의 세의를 매개하고 있다.

    다음호엔 원주 원씨(原州元氏) 원릉군(原陵君) 원균(元均) 종가를 싣습니다.


    입력시간 : 2007/01/10 14:33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
    사진=남정강 한얼보학 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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