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이승엽, 한국 야구사 빛낸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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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3.10.10 14:53:50 | 수정시간 : 2003.10.10 14:53:50
  • 이승엽, 한국 야구사 빛낸 영웅
    아시아 홈런킹 등국으로 메이저리그 진출에 청신호





    한민족의 하늘이 열렸던 날인 개천절 아침, 단잠에서 깨어난 ‘국민 타자’ 이승엽(삼성)은 자신의 방망이로 힘차게 열어 젖힌 아시아 홈런사의 새 지평이 아직 실감나지 않는 듯 큰 눈망울을 자꾸만 껌벅였다. ‘정말 내가 해낸 것이 맞을까’ 라고 속으로 연신 되뇐 것일까. 전날 달구벌 밤하늘로 쏘아올린 56호 홈런은 분명 생시의 일이고, 이제는 한국 야구의 신세계를 개척한 또 하나의 ‘가을의 전설’이다.

    롯데 자이언츠와의 시즌 최종전 2회말 첫 타석에 들어선 이승엽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돼 있었다. 아시아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세울 수 있는 마지막 경기. 홈런이라면 이력이 났지만, 이토록 부담스러운 순간만큼은 솔직히 맞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막다른 골목에 몰릴수록 더욱 강해지는 이승엽의 방망이는 결국 드라마를 연출해내고야 말았다. 바깥쪽 꽉 차게 들어 오는 상대 투수 이정민의 3구째 직구를 깨끗이 밀어 쳐 가운데 펜스를 빨랫줄처럼 넘겨버린 것. 2003년 10월 2일 오후 7시를 막 넘긴 시각, 새 역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경기가 끝난 뒤 이승엽은 “홈런임을 확인하고 베이스를 도는 동안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아마도 그의 머리 속에는 프로 데뷔후 대기록을 달성하기까지 아홉 시즌 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있지 않았을까.


    투수 이승엽, 눈물의 타자 전업



    지난 95년에 고졸 루키로 프로에 뛰어 든 이승엽은 출발부터 주목의 대상이었다. 경북고 시절 일급 좌완 투수에다 장타력을 겸비한 타자로 이름을 날렸던 터라 연고 구단인 삼성 라이온즈와 한양대 야구부의 ‘이승엽 쟁탈전’은 그야말로 세간의 이슈가 될 정도였다.

    아버지 이춘광씨의 바람대로 대학 진학을 결심했던 이승엽은 그러나 수능 시험에서 ‘자진 낙방’을 선택, 극적으로 삼성 라이온즈의 품에 안기게 된다. ‘국민타자’로 성장하라는 하늘의 계시였을까.

    이후 특급 왼손 투수로 프로 무대를 누비고 싶었던 이승엽은 첫 시즌을 맞기도 전인 미국 전지 훈련에서 뜻밖의 사건을 맞는다. 고교 시절 무리한 투구로 생긴 왼 팔꿈치 부상으로 타자 전업이 불가피한 상황에 처했던 것.

    이승엽은 눈물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의 타격 자질을 간파하고 전업을 설득했던 코칭 스태프는 몰래 쾌재를 불렀다. 이승엽 신화는 아이러니칼하게도 그 같은 ‘행운의 불행’에서 비롯됐던 것이다.

    타자 전업의 결과는 본인도 놀랄 만큼 성공적이었다. 천부적인 야구 재질과 몸의 유연성, 그리고 부단한 노력은 ‘타자 이승엽’을 서서히 그라운드에 각인시키기 시작했다. 121경기에 출장했던 95년 첫 시즌 이승엽은 타율 0.285, 홈런 13개, 타점 73점으로 3대 공격 부문에서 수준급의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같은 팀의 선배로서 그 해 대활약을 펼쳤던 ‘중고 신인’ 이동수에게 비록 신인왕 타이틀은 양보했지만 이처럼 이승엽의 첫 해 성적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기대 이상의 것이었다. 95년 시즌에 이승엽의 개인 통산 4호 홈런의 제물이 됐던 ‘불사조’ 박철순(전 OB)은 훗날 “제대로 코너 워크가 된 공을 받아 쳐 펜스를 넘긴 신인 이승엽을 보면서 대타자로 성장하겠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비단 박철순 뿐만 아니라 그 해 이승엽의 홈런 제물이 됐던 투수들의 면면은 이강철 이대진(이상 당시 해태), 윤학길(전 롯데), 정삼흠(전 LG) 등으로 당대를 풍미했던 투수들. 루키로서 그런 대투수들을 상대로 홈런 맛을 한번씩 봤던 만큼 이승엽의 첫 시즌은 성공 예감의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프로 입단 후 두 해째를 맞이한 96년 시즌에도 이승엽은 변함없는 타격 솜씨를 선보이며 프랜차이즈 스타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흔히 신인급 선수들이 겪기 쉬운 ‘2년차 징크스’가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타율도 3할대로 끌어올리며 ‘정확한 타자’로 평가받게 된다. 다만 홈런수가 약간 줄어 들어, 프로 생활 중 유일한 한 자리수 홈런에 그친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이승엽은 중장거리포를 갖춘 교타자를 지향했던 터라 기량이 후퇴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투수 이승엽’이 타자로 변신하는 계기를 만들어준 이들이 95년 당시 삼성 사령탑을 맡고 있던 우용득 감독과 박승호 타격코치라면, 그가 최고의 홈런타자로 거듭나도록 디딤돌을 놓은 이들은 후임 백인천 감독과 박흥식 타격코치라고 할 수 있다.


    평생 스승 백인천과의 만남



    96년 시즌이 끝난 뒤 백 감독은 이승엽에게 “3할을 치는 교타자와 홈런을 펑펑 쳐대는 거포 중에 무엇을 선택할 것이냐”는 화두를 던졌다. ‘새끼 사자’의 숨은 잠재력을 발견한 ‘4할 타자’ 백 감독이 내심 이승엽의 장거리포 전환을 염두에 두고 건넨 질문이었던 것. 영리한 이승엽은 주저하지 않고 ‘평생 은사’의 뜻을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이승엽은 백 감독과 박흥식 코치로부터 파워 히터가 되는 비법들을 하나씩 둘씩 전수받는다. 한동안 이승엽 타격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외다리 타법’이 빛을 본 것은 바로 그 과정이었다.

    야구 선수로서 그리 크지 않은 체구와 부족한 파워를 보완하는 무기로 선택한 외다리 타법은 이승엽 특유의 선구안, 유연성과 멋진 조화를 이루며 ‘라이언 킹’의 탄생을 그라운드에 선포했다. 실제로 이승엽은 외다리 타법으로 무장하고 나선 97년 시즌 홈런 32개를 터뜨리며 신세대 홈런왕으로 등극했을 뿐 아니라, 역대 최연소 MVP(종전 기록 23세. 한화 장종훈)에도 오르는 등 겹경사를 누렸다.

    그해 이승엽이 거둔 수확은 21세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눈부셨다. 홈런왕은 물론이고 타점왕, 최다안타왕, 타율 2위 등 타격 주요 부문을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본격적인 이승엽 시대의 개막을 알린 원년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승엽이 항상 탄탄대로를 걸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 석자를 야구팬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킨 이듬해 ‘1차 홈런대전’에 뛰어들어 작지 않은 패배감을 맛보게 된다. 당시 그를 때려눕힌 ‘적장’은 역대 최고의 용병으로 꼽히는 타이론 우즈(전 두산).

    시즌 내내 우즈와의 레이스에서 우위를 보이며 2년 연속 홈런왕에 오를 것이 확실시 되던 그 해 8월 이승엽은 갑작스런 슬럼프에 빠져들어 연신 솜방망이만 휘둘러댔다. 그런 사이 우즈의 맹추격이 시작됐고 결국에는 막판 역전을 허용하고 만다. 평소 “한국 타자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외국인 타자에게 홈런왕 자리를 내줄 수는 없다”고 사자후를 토하곤 했던 이승엽으로선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람은 누구든 아픈 만큼 성숙한다. ‘1차 홈런 대전’의 패배는 라이언 킹을 더욱 강한 타자로 만드는 ‘보약’이 됐다. 절치부심한 이승엽은 이때부터 웨이트 트레이닝을 밥 먹듯이 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99년 전국에 홈런 신드롬을 불러 일으키며 ‘국민 타자’ 반열에 올라선 것은 이처럼 한번의 좌절에서 더 큰 것을 배우는 ‘승부사적 기질’이 발휘된 결과였다.


    '한국야구의 별' 로 뜬 국민타자



    99년 54홈런, 123타점으로 두 부문 신기록을 달성한 이승엽은 상이란 상은 모조리 쓸어 담으며 전체 스포츠계를 통틀어 우뚝 선 최고 스타가 됐다. 하지만 아무리 화려한 오늘을 구가하더라도 그는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 선수다. 왕정치(오 사다하루. 현 다이에 호크스 감독)가 64년에 세운 55홈런 기록은 여전히 그가 깨뜨릴 목표로 남았고, 국민들 역시 ‘국민타자’인 이승엽이 대업을 이뤄줄 것을 늘 소망했다.

    2000년 잠시 스포트라이트를 다른 선수들에게 내줬던 이승엽은 이듬해부터 다시 대포에 기름칠을 해 왕좌를 탈환했고, 지난해와 올해에는 심정수(현대)라는 걸출한 라이벌과 함께 숨막히는 ‘2차, 3차 홈런 대전’을 펼친 끝에 3년 연속 홈런왕 수성에 성공했다.

    아울러 전국을 집단 홈런최면에 빠뜨리며 극적으로 달성한 ‘아시아 한 시즌 최다홈런’ 기록은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다그치는 이승엽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전리품’이었다.

    홈런 신기록에 대한 국민들의 염원을 좌절시키지 않고 마침내 아시아를 넘어선 ‘국민타자’ 이승엽. 그는 이제 세계 최고의 무대인 메이저리그 정벌에 나선다. 56호 홈런을 쏘아올리며 달구벌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었던 직후, 신기록 수립의 흥분이 채 가시지도 않은 터에 그는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다짐을 국민 앞에 내놓았다.

    때문에 내년 시즌부터 야구팬들은 더 이상 국내에서 이승엽을 볼 수 없다. 이승엽 신화 1장이 막을 내린 셈이다. 하지만 ‘쉬지 않는 청년’ 이승엽은 더욱 드라마틱한 재미의 신화 2장을 미국에서 보내줄 것이다. 지금껏 그에게 후퇴는 없었으니까.



    김윤현 기자 unyon@hk.co.kr


    입력시간 : 2003-10-10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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