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추억의 LP 여행] 한돌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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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5.03.08 19:31:36 | 수정시간 : 2005.03.08 19:31:36
  • [추억의 LP 여행] 한돌 下
    자연 속에서 노래를 캐며 이땅의 상처를 보듬다

    성남의 아버지 약방에 잡혀온 그는 무려 8년을 머물렀다. 당시 그의 동네엔 수많은 영세 공장들이 난립해 있었다. 어느날 야학에 다녔던 한 단골 여공이 야학선생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우울해진 사연을 들었다. 그는‘짝사랑도 아니고 서로 좋아했지만 남자가 장가를 가버려 벌어진 이런 사랑은 무슨 사랑일까’를 생각하다‘외사랑’을 떠올렸다.

    사전에도 없는 제목 때문에 노래가 발표되자 한글 협회로부터 문의전화를 받을 만큼 독특한 표현이었다.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70년대 후반이 되서야 가능했다. DJ친목회 총무 서희덕의 권유로 명동 카톨릭회관 여학생회관에서 정기적으로 열렸던 노래동아리‘참새를 태운 잠수함’무대에 다섯 차례 올랐다.

    그래서 1979년에야 데뷔음반 녹음에 들어가 일반판매에 앞서 홍보용으로 200장을 이듬해에 발표했다. 당시 MBC는 음반을 낸 신인 가수들의 오디션을 보았다. 가창력으로 승부하는 가수가 아닌 진정성을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 한돌은 3번의 오디션에 모두 미역국을 먹었다. 그래서 가창력 부족이란 이유로 음반이 방송 금지가 되면서 사장되어 버렸다. 그의 공식적인 음악활동은 시작부터 삐그덕 거렸다.

    80년대 초 어느날, 전북 김제에서 농사를 짓던 선배가수 김민기의 추수를 돕기 위해 내려갔다. 선배 어머니의 부탁으로 시장에 나가 고추시세를 알아보다 지게에 가득 담은 가지더미가 단돈 천원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막걸리 한잔 먹기도 부끄러웠다. 밭에 피어난 보라색 가지꽃을 몇일 간 쳐다보다 노래‘가지꽃’을 캤다. 이후 서울대 노래동아리 메아리의 문승현이 한돌의 노래로 아현동 애오개 소극장에서 농촌을 배경으로 한 새로운 형식의 노래 극‘가지꽃 공연’을 열었다. 많은 노동자들로 만석을 이룬 공연을 보러 서울로 올라온 한돌은 숫기가 없어 자신을 밝히지 못해 결국 입장을 못한 웃지못할 사연을 지니고 있다.

    대성음반의 문예부장이 된 서희덕은 84년 4월 기획사 뮤직디자인을 설립해 신형원의 독집을 발매했다. 이 음반은 한돌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던 신호탄. 단국대 출신 신형원이 부른 한돌곡‘불씨’와 ‘유리벽’은 다운타운의 음악다방은 물론 각 라디오 프로그램의 신청곡 1위로 등극할 만큼 뜨거운 반응을 몰고 왔다. 20만장이 넘게 앨범은 팔렸건만 가수 신형원은 TV에 얼굴조차 비치지 않아‘얼굴 없는 유령가수’로 신비감을 더해갔다. 87년엔‘개똥벌레’와 ‘터’등 발표하는 곡 마다 연 타석 히트를 터트렸다. 하지만 음반에 수록된 노래가 부끄러워진 한돌은 자신이 관련된 모든 음반을 없애버리기 시작했다.

    88년 8월 남산 숭의음악당. 한영애, 소울두울, 노찾사가 게스트로 참여해 첫 콘서트를 열었다. 이후 성음을 통해 그의 고유 로고인‘타래밭’음반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첫 작품은 89년에 발표한‘홀로 아리랑’. 이 노래는 남과 북의 배가 서로 만날 수 있는 지점이 되는 곳이 독도라는 생각에 통일을 그렸던 서사시였다. 90년, 서유석도 이 노래로 10년만에 재기음반을 발표했다.

    이후‘꼴지를 위하여’등을 수록한 독집과 청담초등학생들과 11곡을 담은 동요집‘하늘 아이들1’과‘몽실이와 하늘아이들’를 발표했다.“동요음반은 꿈의 시작이었다. 당시 노래를 잘하는 아이들보다 조금씩 음정이 틀리는 평범한 아이들을 모아 음반을 만들었다.”91년 3월 대학로 학전극장의 개관 공연을 연 그는 양희은의 동생 양희경의 독집에 이어 92년 9월엔 어린이 노래 이야기집‘이 땅에 사는 하늘 아이들-숨결刊’을 발간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94년엔 노래를 찾는 사람들과 이연실이 동참한 타래모음 3집‘내 나라는 공사 중’을 발표했다. 자연을 파헤치는 공사가 전국 방방곳곳에서 무분별하게 벌어지는 현실을 비판한 앨범이었다. 수록 곡‘고운동 달빛’은 사연을 지니고 있다. 지리산 양수댐 공사로 수몰을 앞둔 고운동의 소식을 접한 그는 지도를 보며 찾아 나섰다가 그만 길을 잃었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고운동 마을은 천국이었다. 이때의 느낌을 노래를 만들어 발표하자 환경 문제화되자 진주 MBC는 타큐멘터리를 제작해 방영을 했다. 또한 현대케이블TV는 전국을 돌며 노래작업을 벌어온 한돌을 95년 3월 1시간 다큐멘터리로 소개했다.

    이후 활동이 뜸해져 갔다.“노래란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나에겐 약초처럼 캐는 것이 되었다. 헌데 오래 전부터 노래가 아퍼 온 것 같다. 내 게으름 때문에 노래캐기가 황폐화되고 메말라 갔다”1999년 동요‘나뭇잎 배’에 대한 느낌을 쓴 그의 글이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국어 국정교과서에 수록되었다. 그 해 우울함을 달래기 위해 목포에서 임진각까지 23일간 700KM 도보여행에 나섰던 그는 12월에는 백두산을 찾았다.

    이때 추락사고를 당했다.“벼랑 아래로 10m쯤 떨어져 살기위해 기어오르는데 노래가 목숨을 구해주는 대신 노래케기에 게으름을 피운 나에게 경계심을 주고 떠난 것 같았다. 지금까지 발표한 모든 노래들은 노래도 아니란 생각에 작업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작년 3월 지리산 천황봉 등반때 하얗게 피어난 봄 눈을 보고 다시 희망을 얻었다.”8월 경 통일을 주제로 공연을 준비중인 그는 음악적 뿌리인 동요음반과 백두대간을 새롭게 풀어낸 새 노래‘한뫼줄기’등으로 신보제작을 염두에 두고있다. 또한 압록강, 두만강, 백두산을 다녀온 경험을 노래이야기로 풀어 출간도 준비중이다. 10여년의 긴 동면에서 깨어나기 위해 한돌은 지금 조용하게 봄 기지개를 켜고 있다.

    입력시간 : 2005-03-08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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