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가 있는 맛집(331)] 곰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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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18.07.06 06:29:46 | 수정시간 : 2018.07.06 06:49:47
  • 곰탕은 음식의 으뜸이자 시작…제사에 쓰이던 양반가의 음식 설렁탕은 서민들의 음식…역사 긴 곰탕보다 먼저 나타나고 널리 퍼져

    ‘하동관’창업주 김용택 25년, 인수한 장낙항 일가 50년 넘게 운영

    ‘나주곰탕’ 대도시 나주, 벼슬아치들이 소고기 소비하면서 곰탕 발전

    • 하동관 곰탕


    곰탕은 음식의 바탕이자 시작이다. 곰탕과 설렁탕의 차이를 묻는다. “곰탕은 고기 곤 국물이고 설렁탕은 뼈와 내장 곤 국물”이라고 설명한다.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렸다.

    곰탕의 의미는 크다. 곰탕은 모든 음식의 시작이다. 곰탕은 ‘대갱(大羹)’이다. 으뜸이고 가장 무거운 의미를 가진 음식이다. 제사에서도 의미가 있는 음식으로 여겼다. 곰탕은 설렁탕과 다르다는 표현은 일부만 맞다. 곰탕은 모든 음식 중 으뜸이다. 곰탕집은 설렁탕 집에 비해 드물다. ‘한반도 곰탕’ ‘곰탕집’의 의미를 살펴본다.

    ‘하동관’의 시작

    ‘하동관’은 1938년 문을 열었다. 창업주 김용택 씨는 인쇄업자였다. 창업주 김씨가 느닷없이 곰탕 전문점을 연 이유는 간단하다.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 하동관의 간판


    1937년 7월7일, 일본은 중국을 상대로 제2차 중일전쟁을 일으킨다. 1931년 노구교 사건으로 중국 침략을 시작한 일본이 중국을 상대로 전면전을 일으킨 것이 제2차 중일전쟁이다. 한반도는 식민지 상태였다. 모든 전쟁에는 군수물자가 필수적이다. 식량과 기름 등은 전시 작전 물자다. 국가에서 철저히 통제한다. 식민지 한반도는 전면적인 ‘국가 배급제도’를 따른다. 그러지 않아도 피폐한 한반도다. 전쟁이 터지니 당연히 모든 물자는 군대에 먼저 지급되었다. ‘전시 하의 식민지국가’. 민간의 삶은 한층 더 피폐해졌다.

    1938년, 한반도도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어수선한 상태였다. 인쇄업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산업이자 문화산업이었다. 인쇄업은 오늘날의 ‘출판+인쇄업’이다. 1930년대 인쇄업은 최첨단의 컨텐츠 산업이자 문화산업이었다.

    ‘전쟁 통의 문화산업’ 운영은 굶어죽기 딱 좋은 일이었을 것이다. 김용택 씨는 전격적으로 곰탕집 창업을 진행한다. 가족들을 제대로 부양하기 위해서다.

    문제는 가족들의 반대였다.

    ‘하루에 곰탕 3백 그릇만 판다’ ‘오후 3시면 문을 닫는다’는 하동관 특유의 경영방식은 곰탕집 창업에 대한 가족들, 특히 아들, 딸들의 반대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음식점 운영이 제대로 된 직업으로 인정받은 지는 그리 오래지 않았다. 1980년대까지도 ‘식당 주인’을 천대하는 분위기는 있었다. 하물며 1930년대 후반이다. 김용택 씨의 ‘창업’을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사람들이 바로 가족들 그중에서도 당시 경기 중, 고교, 경기 여중, 고에 다니던 아들, 딸들이었다. 심지어 자녀들 중에는 아버지가 붙여놓는 가게 간판을 떼서 패대기치고 부숴버리는 일도 있었다.

    “예쁜 양과자점도 아니고 곰탕집을 하다니 친구들 보기 창피해서 학교 다니기 힘들다”는 항의도 있었다.

    김용택 씨는 “하루 판매량을 300 그릇으로 한정하고, 자녀들이 하교하는 오후 3시 이후에는 곰탕집의 문을 닫겠다”는 말로 자녀들을 회유했다. 당시에는 식당에 별도의 식사공간이 없었다. 대부분의 음식점들은 가족들이 일상 생활하는 공간을 식당 공간으로 활용했다. 아들, 딸들이 하교하면 식당 일을 끝내고 일상의 생활공간으로 되돌려 놓겠다는 약속이었다.

    국내 최고의 곰탕 전문점 ‘하동관’의 시작이었다. 명동 부근 수하동이 하동관의 첫 창업터였다.

    • 2013년의 외부 모습이다. 70년이 아니라 이제는 80년이다.


    ‘하동관’, 왜 설렁탕 집이 아니라 곰탕집인가?

    지금도 서울 종로에 남아 있는 ‘이문설렁탕’의 창업은 1904년경이다. ‘하동관’보다 약 30여년 앞선다. 1930년대 이미 설렁탕 집들은 성업 중이었다. 경성(서울)에는 설렁탕 집이 상당수 문을 열었고 추어탕 전문점들도 문을 열기 시작했다. 길거리 허름한 식당들이 설렁탕, 개장국 등과 더불어 추어탕을 내놓았고 오래지 않아 추어탕 전문점으로 자리매김한다.

    곰탕은 역사가 오래된 음식이다. 설렁탕은 곰탕보다 한결 짧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왜 곰탕집은 설렁탕집보다 늦게 나타났을까?

    당시 ‘하동관’을 설명하는 문구에는 ‘북촌 마나님의 음식솜씨’라는 문구가 있다. 이 문구는 1963년 하동관의 주인이 바뀐 후에도 꾸준히 나타난다.

    북촌(北村)은 오늘날 삼청동 가회동 일대를 뜻한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 조선의 궁궐들이 지척에 있다.

    서울에는 북촌과 남산(南山)이 있었다. 북촌은 양반가들이 많이 살았던 동네다. 양반들 중에도 궁중을 출퇴근하는 고위직 관료들이 많았다. ‘북촌 마나님’은 지체 높은 반가의 마나님을 뜻한다. ‘하동관’의 곰탕은 북촌 양반가의 음식이라는 뜻이다.

    설렁탕은 상민(常民), 하층민의 음식이다. 소를 도축한 후 살코기를 관청이나 반가에 납품한다. 머리, 뼈, 내장, 선지 등 허드레 부위가 남는다. 이 허드레고기 및 부속물을 이용한 것이 설렁탕이다. 그중 소대가리를 삶아서 내놓는 것이 소머리국밥이고 선지를 중심으로 끓인 국이 바로 선짓국이다. 선짓국, 설렁탕, 소머리곰탕 등은 길거리 서민의 음식이다.

    곰탕은 다르다. 반가의 음식이다. 쉽게 먹기 힘들다. 오히려 먹어보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음식 문화는 쉽게 발전하지 않는다. 고기국물을 만져보지 못한 이들은 쉽게 곰탕집을 열기 힘들다. 곰탕은 설렁탕보다 원가도 비싸다. 고기 가격과 허드레고기 혹은 뼈의 가격이다. 원재료가 비싸고 구하기 힘들다. 쉽게 만들 수 있는, 혹은 만들어본 음식도 아니다. 서민들의 음식이었던 설렁탕 집이 많은 한편 곰탕집이 드물었던 이유다.

    고 김용택 씨가 세운 ‘하동관’은 평소 곰탕을 접해본 이들이 세운 음식점이다.

    • 하동관의 곰탕


    곰탕은 대갱이다. 음식의 으뜸이다

    고려 말기 문신 목은 이색(1328-1396년)은 <목은시고>에서 ‘대갱(大羹)’을 이야기한다.

    “식례의 기원은 대갱에서 시작된다(食禮之起由大羹)”. 식례는 음식, 음식 진설, 음식과 관련된 예의범절 등을 통칭한다. 음식, 음식 진설의 시작은 바로 대갱이라는 뜻이다. 대갱이 바로 곰탕이다.

    곰탕은 고기 곤 국물이다. 곰탕은 오래 전부터 귀하게 사용되었다. 제사상에 국물이 있음에도 늘 곰탕 류의 음식을 별도로 내놓는다. 대갱, 곰탕은 단순한 국물이 아니라 음식의 으뜸임을 뜻한다.

    조선 중기 문신 계곡 장유는 <오언고시>에서 “대갱의 담박한 맛 그 누가 알까/비리고 썩은 고기 허겁지겁 삼키누나”라고 했다. 즉, 대갱은 담박한 맛이지만 이게 가장 좋은 것이다. 대갱은 고기 곤 국물이고, 일체의 조미료를 넣지 않은 것이다. 당시의 조미료는 소금이나 매실즙 등이다.

    이정형이 지은 <대동야승_동각잡기>에도 “대갱은 원래 매실과 소금으로 조미하지 않고/지극히 묘한 이치는 뾰족한 붓과 혀로는 형용하기 어렵다”고 했다. 즉, 대갱이 매실, 소금 등으로 맛을 내지 않는 것처럼, 지극한 묘한 이치는 말과 붓으로 그리기 힘들다는 뜻이다.(大羹元不和梅鹽/至妙難形筆舌尖)

    중국의 <주례>에서도 “대갱(大羹)은 조미료를 가하지 않은 육즙(肉汁)”이라고 했다. 대갱은 고기 국물인데 조미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 설렁탕, 곰탕 가게를 가면 대부분 소금, 후추 그릇을 내놓는다. 각자 식성대로 먹으라는 뜻이다. 그러나 원래 대갱, 곰탕은 일체의 조미를 하지 않은 것이다.

    조선은 유교사회다. 유교사회는 연장자 우선 원칙이다. 계급별로 나누고 그중에서도 나이로 나눈다. 가장 최우선의 자리는 연장자의 것이다. 연장자 중 최고는 돌아가신 조상이다. 집집마다 최 연장자인 조상에게 내놓는 음식이 바로 제사음식이다. 제사음식에 대갱, 곰국, 곰탕이 빠지지 않는 이유다. 궁중의 제사도 마찬가지. 궁중음식을 이야기하는 기록에는 늘 대갱에 관한 언급이 있다.

    대갱은 음식의 으뜸이고 가장 귀한 음식이다. 설렁탕은 길거리 서민들의 음식이었다.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저자거리 식당의 음식’으로 설렁탕이 먼저 나타나고 널리 퍼진 이유다.

    서울과 나주식 곰탕

    1938년 ‘하동관’의 문을 열었던 창업주 김용택 씨는 1963년 ‘하동관’의 문을 닫았다. “가족들 부양, 자식들 학교 뒷바라지가 끝나면 가게 문을 닫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하동관’은 잠시 문을 닫은 다음 이듬해 김용택 씨의 친구인 고 장낙항 씨에게 인수된다. 지금 ‘하동관’의 주인은 장낙항 씨의 후손들이다. 장낙항 씨와 후손들이 ‘하동관’을 인수해 운영한 기간만 해도 이미 50년을 넘긴다. 김용택 씨가 운영한 기간이 25년, 장낙항 씨 가족들이 운영한 기간이 50년을 넘겼다. ‘하동관’의 역사는 이미 80년이다.

    ‘북촌 반가 출신의 여자’들은 창업주 김용택 씨의 부인 류희영 씨와 1964년 ‘하동관’을 인수한 장낙항 씨의 부인 홍창록 씨 그리고 홍창록 씨의 며느리이자 현재 ‘하동관’을 운영 중인 김희영 씨를 말한다.

    ‘북촌 반가의 여자’들을 말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곰탕이 설렁탕과는 달리 반가의 음식임을 뜻한다.

    호남 나주에서 ‘나주곰탕’이 나타난 이유도 간단하다. 나주는 전주와 더불어 호남에서는 가장 번성했던 도시다. ‘전라도’가 전주, 나주의 합성어다.

    나주는 호남지역의 물산들이 모여드는 대도시였다. 지금도 남아 있는 나주관아(羅州官衙)는 나주가 대단히 큰 도시였음을 보여준다. 대도시에는 높은 벼슬아치들이 있었다. 관청에서는 늘 귀한 쇠고기를 소비한다. 지방의 크고 작은 행사가 있고, 중앙벼슬아치들을 맞는 일도 잦았다. 쇠고기가 있는 곳에서 곰탕이 발전한다. 곰탕은 쇠고기가 있고 한편으로 이 쇠고기를 소비할 사람들이 있어야 발전한다.

    유교는 6가지의 가축을 먹도록 규정한다. 이른바 육축, 소, 말, 돼지, 양, 개, 닭이다. 이중 가장 귀한 것은 소다. 조선시대 기록에 대부분 쇠고기를 우육(牛肉)이라 하지 않고 금육(禁肉)이라고 표기한 이유다. 쇠고기는 쇠고기가 아니라 금지한 고기였다. 이 금지한 고기 중 살코기 부분에서 즙을 우려낸 것이 바로 곰탕이다.

    글ㆍ사진=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dasani87@naver.com

    [곰탕맛집 4곳]

    곰탕수육전문
    서울 마포 현석동에서 문을 연 곰탕, 수육 전문점이다. 문을 연 기간은 짧지만, 수준급의 음식을 내놓는다. 김치, 깍두기 등도 좋다. 일체 군더더기가 없는 곰탕.

    하얀집
    나주곰탕이다. 1910년 창업, 4대째 운영 중이다. 국물이 투명하고 고명으로 계란 지단 등을 사용한다. 고춧가루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 토렴방식이다.

    남평할매집
    3대 60년 전통의 곰탕 노포다. 곰탕 국물이나 수육 모두 수준급이다. 고춧가루, 잘게 썬 파, 계란지단 등을 사용한다. 전남 나주.

    노안집
    ‘3대 나주곰탕 원조집’을 자부한다. 토렴방식으로 내놓는다. 계란지단, 잘게 썬 파, 고춧가루 등이 고명으로 올라 있다. 국물이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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