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이은주, 모두의 가슴에 묻힌 스물 다섯 순백의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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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5.03.03 10:36:33 | 수정시간 : 2005.03.03 10:37:47
  • 이은주, 모두의 가슴에 묻힌 스물 다섯 순백의 영혼
    영화처럼 마감한 짧은 생, 죽음 택한 원인은 영원한 미스터리





    “난 참 복이 많은 아이 같아. 생각해 보면 모두 즐거웠던 기억들 뿐이야 …나 떠나면 내 장례식,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멋지게 해 달라고 했거든.”

    영화 ‘연애 소설’에서 이은주가 죽음을 앞 두고 사랑하는 연인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의 일부다. 아무도 예기치 못 한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영화 속 편지의 내용이 마치 그녀가 현실 속에서 남긴 마지막 유언 같기만 하다”며 눈시울을 붉힐 뿐이다.

    영화배우 겸 탤런트 이은주. 그녀는 지상에서 영원으로 기화되고 싶었을까. 스물 다섯 해의 짧은 삶을 영화처럼 마감하고 싶었을까. 얄궂게도 자신의 출연작 ‘번지 점프를 하다’에서 죽음을 맞이한 2월 22일, 그녀는 영원히 세상을 등졌다.

    만인의 연인이자 우상인 대중 스타의 자살은 그 주변 사람들은 넘어 수 많은 대중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는 법. 그녀가 출연한 작품들을 보면서 영화에서처럼 멋진 여자 친구의 등장을 남몰래 기다리기도 했던 팬들은 놀람 이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지난 해 MBC드라마 ‘불새’와 영화 ‘주홍 글씨’로 드라마와 영화에서 최고의 배우로 주가를 높여가는 상황에서 극단적인 방법으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그녀는 안타까운 신화로 자신을 고정시키고 싶었을까.

    ‘모든 자살은 타살이다’라는 말이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켕은 역저 ‘자살론’에서 “자살이야말로 한 사회의 특징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한 바 있다. 자살은 엄연히 사회 현상이며, 자살의 원인 역시 사회적이라는 통찰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정상을 향해 질주하던 꽃다운 여배우를 자살의 길로 인도했을까?

    그 날 오후 1시 10분께 이은주는 경기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모 아파트 드레스 룸에서 옷걸이에 허리 벨트로 목을 매 숨진 채로 오빠에 의해 발견됐다. 경찰에 따르면 그녀는 오전 6시까지 함께 사는 오빠, 어머니와 얘기를 나눴다. 그러나 오후 1시가 넘도록 인기척이 없는 것을 이상히 여긴 오빠가 이은주의 방에 들어 갔다가 끔찍한 광경을 접한 것.



    "노출연기 때문에 괴로워했다"
    발견 당시 이은주의 방 침대 주변에는 연필깎이 칼과 핏자국이 있었으며 그녀의 손목에는 자살하려 했던 주저흔이 남아 있었다. 현장에는 손목에서 흐른 피를 찍어서 쓴 듯한 “엄마, 오빠 미안해”라는 혈서와 함께 “일이 너무도 하고 싶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누구도 원망하고 싶지 않다” 등의 내용이 담긴 세 장의 유서가 남겨져 있었다.

    알려진 바 이은주의 죽음은 대체로 그 동안 우울증에 시달리며 심한 정신적 혼란을 겪어 왔던 것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1월 24일 경기도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불면증을 호소하며 검진을 받았고, 2월 3일 우울증에 따른 불면증 진단과 함께 수면 다원 검사 등 치료를 권유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이와 관련해 이은주의 오빠는 경찰 조사에서 “지난 해 10월 개봉된 영화 ‘주홍글씨’의 노출 연기 이후 심한 불면증과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평소 이은주와 친분이 두터웠던 로커 전인권 역시 “(영화에서) 벗는 것 때문에 괴롭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밝혔다.

    이은주의 유서도 이 같은 의혹을 뒷받침해 준다. “근본적인 원인 …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 없었을 텐데. 왜 내게 그런 책을 줬는지. 왜 강요를 했었는지. 왜 믿으라고 했었는지”라는 내용이 단서로 포착된다. ‘책’이라는 단어는 영화계에서 통상 시나리오를 일컫는 말이다.

    영화 ‘주홍 글씨’에서 이은주는 전라로 등장하는 정사 신을 촬영했으며 트렁크에 갇혀 피가 범벅된 상태에서 죽음을 맞는 장면을 연기했다. 한석규와의 불륜, 엄지원과의 동성 연애 등 결코 쉽지 않은 인물 표현을 녹여 내기도 했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뤄볼 때, 그녀의 죽음과 이 영화?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새삼 여배우의 노출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세태에 경종을 울리는 대목이다.

    그러나 고인을 아는 일각에서는 “또래 배우들에 비해 남다른 연기력과 프로 근성을 지녔던 그녀가 단지 노출 장면 때문에 자살을 결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영화 ‘주홍 글씨’의 노출 문제로 괴로워했다는 일부 보도가 나왔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캐릭터 설정에 힘들어 하긴 했지만 이는 연기자로서 고민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이은주의 소속사 ‘나무액터스’ 김탄 부사장은 못박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가 작품 속 캐릭터에서 빠져 나오지 못해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추측은 무성하다. 더불어 이은주는 유난히도 작품 속에서 줄곧 죽는 역할을 맡아 왔다는 점도 기묘한 여운을 남겼다. 그녀는 영화 ‘오! 수정’, ‘번지 점프를 하다’, ‘연애 소설’, ‘하늘 정원’, ‘태극기 휘날리며’, 그리고 마지막 작품이었던 ‘주홍 글씨’ 등에서 매번 죽음을 맞았다. 아닌게아니라 이은주는 2003년 10월 영화 ‘하늘 정원’ 개봉을 앞 두고 주간한국과의 인터뷰에서 “이들 작품을 하면서 죽음에 대해 보다 깊게 생각하게 됐다”며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잊지 않도록 가능한 한 많은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고백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다면 죽음을 다룬 작품의 몰입과 실제 죽음이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극히 미미하다는 게 정신과 전문의들의 견해다. 윤세창 성대 의대 정신과 교수는 “이은주 씨가 극중에서 대부분 죽는 배역을 맡았지만 이 같은 역할이 현실적 삶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면서 “극중 배역과 현실 속 삶을 혼돈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반면 인기 스타로서 겪었던 스트레스가 자살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진단된다. 스타는 숙명적으로 대중에게 비춰지는 이미지와 실제 삶과의 괴리에서 초래될 수 밖에 없는 굴레를 지니고 있다는 것. 윤 교수는 “일상 생활 속에서 또는 여배우로서 겪었던 스트레스가 결국 자살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인기에 대한 강박관념이 부른 우울증
    일반적으로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스타들은 극심한 우울증에 빠져 드는 경향이 높다고 한다. 이은주에 앞서 1996년 1월에는 두 명의 가수가 이 같은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비극의 주인공이 됐다. 하이틴 스타 서지원이 1월 1일 유서를 남긴 채 약물을 과다 복용해 사망했고, 며칠 후인 1월 6일 김광석이 자택에서 목을 매달아 숨졌다. 가장 최근에는 2003년 4월 1일 홍콩 스타 장궈룽(張國榮)이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에서 투신 자살해 전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던졌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그녀의 허망한 죽음을 둘러싼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하나 뿐인 오빠, 나보다 훨씬 잘났는데 사랑을 못 받아서 미안해. 가장 많이 사랑하는 엄마,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 내가 꼭 지켜줄게.” 이은주가 가족에게 애틋한 메시지를 전한 유서의 대목이 역설적으로 가족 갈등에 관한 조심스러운 추측도 낳고 있다.

    여성포털 젝시인러브(www.xy.co.kr)의 김덕일 결혼과 가족관계 연구소 소장은 “일반적으로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해서 죄송하지만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해 죄송해 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이은주 씨는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한다는 정도 이상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진단한다. 어머니와 건강한 범위 이상의 심리적 밀착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아버지와는 그다지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음이 엿보인다는 것.

    이러한 부분을 들어 많은 사람들은 이은주의 우울증이 연기나 스타로서의 고민을 넘어 또 다른 사생활적인 면이 개입된 복합적인 것일 수 있다는 분석을 내 놓고 있다. 특히 유서의 “매일 같이 되뇌입니다. 일년 전 오늘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자존심도 바닥을 쳤고 … 더 이상은 그러지 싶지 않습니다”는 대목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결정적 원인이 이은주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가지 않았겠느냐는 의문을 낳고 있다.

    2월 24일 이은주는 한 줌의 재로 돌아갔다. 그러나 촉망받는 연기자였던 그녀의 죽음을 가져 온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둘러싼 의혹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분명한 건 이 한 가지. 너무나 비극적이어서 강렬했던 그녀의 캐릭터와 연기 혼은 이제 작품 속에서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배우 문근영이 24일 영결식장【?애절하게 낭독한 추도사는 구절은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을 시리도록 아프게 한다. “10년간 아홉 작품에 생명을 불어 넣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그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차분한 목소리와 우아한 몸짓의 그녀는 언제나 작품에 푹 빠져있던 진정한 연인이었습니다.”

    이제 그녀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추억을 향해 번지 점프를 감행한 걸까. 가녀리지만, 불꽃 같은 연기 열정을 사랑하는 팬들의 심장 속으로.



    배현정 기자 hjbae@hk.co.kr


    입력시간 : 2005-03-03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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