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왕단, 베이징대 총장을 꿈꾸는 '아웃사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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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7.03.06 20:56:48 | 수정시간 : 2007.03.06 20:57:46
  • 왕단, 베이징대 총장을 꿈꾸는 '아웃사이더'
    중국 5세대 '떠오르는 별' 누구인가 <24>
    天安門시위 이끈 주역, 1998년 미국추방 뒤 '권토중래' 노리는 반체제운동의 핵심





    “제1세대에 진입, 스스로 제2세대로 칭하고 제3세대를 통치한다.”

    6·4 유혈진압 후 장쩌민(江澤民)을 총서기로 선택한 덩샤오핑(鄧小平)이 “1세대의 핵심은 마오쩌둥(毛澤東)이고 2세대의 핵심은 나였다. 3세대는 장쩌민을 중심으로 단결하여야 한다”고 말한 뒤 라오바이싱(老百姓) 사이에서 떠 돈 말이다.

    이를 원용하여 왕단(王丹)을 표현한다면 이렇지 않을까. “2세대에 대항하여 반체제에 진입했고, 3세대에 반체제의 중심으로 성장했으며, 4세대에 반체제의 핵심에 올랐다. 그리고 5세대에 반체제를 지도하려 한다.”

    왕단은 그간 소개한 ‘5세대 인물군’과는 달리 체제 밖의 사람이다. 대부분 50년대생인 체제 내 5세대 인물들에 비해 그는 69년 생으로 10여 세 연하다.

    하지만 리커창(李克强)을 포함한 5세대 주요 인물들이 모두 무명이었을 당시인 1989년부터 그는 국제적으로 손꼽히는 저명 중국인이다. 노벨평화상 후보로만 3차례 올랐다. 앞으로도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는 89년 톈안먼(天安門) 시위 당시 우얼카이시(吾爾開希), 차이링(柴玲)과 함께 텐안먼 광장의 100만 시위대를 이끈 최고지도자 3명 중의 한 사람이다.

    우얼카이시가 톈안먼 시위의 ‘첫 도발자’라면 차이링은 ‘꽃’이었고 왕단은 ‘해방구의 기획자’였다. 우얼카이시가 위구르인으로 소수민족의 상징성을 지녔다면 청바지 차림의 23세 유부녀 대학원생 차이링은 중국 신세대와 여성을 대변했다. 베이징대의 왕단은 ‘반골 지성’을 대표했다.

    왕단은 천안문 광장에 ‘민주의 여신’상을 세웠고 60년 전 5·4 운동 당시 선배들이 흔들었던 ‘德先生’, 즉 ‘데모크라시’를 다시 내걸었다. 중국의 미래가 서구적 민주주의임을 주장한 것이다.

    5·4와 마찬가지로 89년 톈안먼 광장의 대학생들도 너무 앞질러 나갔다. 하지만 왕단은 1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89년 구호를 변함없이 외치고 있다. 89년으로부터 멀어져 갈수록 우얼카이시와 차이링의 모습은 엷어져가는 반면 왕단의 그림자는 날로 짙어져 가고 있다. 그는 현재 중국헌법의 민주적 개정을 요구하는 ‘중국헌정협진회의’의 의장이다.

    홍콩 거주권 신청 계획으로 중국당국 긴장

    98년 미국으로 추방된 왕단은 최근 홍콩에 거주권을 신청할 계획임을 밝혀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UCLA에서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학위논문을 작성 중인 그는 자신의 목표는 고국에 다시 돌아가 모교인 베이징대의 총장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나를 퇴학시킨 사람들을 쫓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의 진정한 목표가 사적 보복에 있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후즈(胡適) 노선을 실천에 옮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후즈는 리다자오(李大釗)와 더불어 5·4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베이징대 교수였다. 리다자오가 마르크시즘을 중국 미래의 대안으로 제시했다면 후즈가 지향한 것은 존 듀이의 프래그머티즘에 바탕한 미국식 민주주의였다.

    정치적 갈림길에서 후즈는 장제스(蔣介石)을 선택했지만 리다자오 밑에서 사서(司書)로 일했던 마오쩌둥의 집권으로 그 꿈을 구현할 수 없었다.

    톈안먼 시위 당시 민주의 여신상을 세워 자신의 노선을 후즈에 맞추어 놓은 왕단은 그 목표 실현을 위한 징검다리로 베이징대 총장 자리를 목표로 세운 것이다. 쑨원(孫文)의 별명은 ‘손대포’였다. 실현성 없는 주장을 편다는 이유에서였다. 왕단의 이 같은 야망은 현재의 제반 사정을 고려하면 ‘왕대포’라는 별명을 붙일 만하다. 하지만 손대포가 꿈을 이뤘다. ‘왕대포’ 역시 그 꿈을 이룰지 지켜볼 일이다.

    왕단은 69년 베이징에서 태어나 자랐다. 본적에 대해서는 산둥성(山東省)이라는 기록과 지린성(吉林省)이라는 기록이 병존한다. 87년 베이징대 정치학과에 입학했으나 다음해 역사학과로 전과하여 중국사를 전공했다. 톈안먼 시위 이전 학내 운동권의 중심이 되었으며 ‘신오사(新五四)’를 편집했다. 이는 ‘5·4’ 와 ‘톈안먼 시위’의 접목의 기반이 되었다.

    왕단은 톈안먼 시위 초기 우얼카이시와 함께 시위대를 지도했다. 우얼카이시가 ‘보위천안문광장지휘부’의 총지휘자였고 그가 부총지휘자였다. 둘이 수배되는 바람에 차이링에게 총지휘자의 직위를 맡겼지만 실질적인 지도자는 왕단이었다. 6·4 유혈진압 후 왕단이 수배자 21명 명단의 맨 첫머리에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유혈진압 후인 7월 2일 베이징에서 체포되었고 91년 ‘반혁명 선전선동죄’로 4년형을 선고받았다. 93년 2월 석방된 뒤 계속 반체제 활동을 주도하다 95년 5월 21일 재차 체포되었다.

    11년형이 선고되었는데 죄목은 ‘정부전복음모죄’였다. 98년 4월 19일 석방되어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하버드대학 동아시아학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활발한 기고 및 저술활동으로 단연 중국의 해외망명객을 대표하는 존재로 부상됐다.

    왕단을 ‘기화(奇貨)’로 여기며 지원활동을 펴온 대만 정보당국은 2004년 중국 반체제 인사들을 품평하는 기밀문서에서 왕단에 대해서 “좀 더 성숙되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적었다. 약관을 갓 넘긴 21세 때 천하를 뒤흔들었던 그도 이제 불혹을 한 해 남겨 두고 있다.


    입력시간 : 2007/03/06 20:57




    이재준 객원기자 중국문제 전문가 webmaster@chinawa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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