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가 있는 맛집(283)] ‘경인면옥’ 함종욱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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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17.07.08 08:59:43 | 수정시간 : 2017.07.08 08:59:43
    北 출신 3형제, 3대 전승 70여년 업력…‘바뀌면서도 바뀌지 않는’음식

    1944년 ‘종로평양냉면옥지점’ 으로 개업…1946년 인천에 ‘경인식당’ 열어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몽향 여운형 딸이 식당 근황 물을 정도로 유명세

    1ㆍ2대 음식 전통 지키며 조금씩 개선…좋은 재료로 맛 내 ‘역사’이어가

    서울과 인천을 묶어서 ‘경인(京仁)’이라 부른다. ‘경인면옥’은 인천에 있다. 뿌리는 서울이다. 1944년. 북한 출신 3형제가 서울 종로에서 음식점 문을 열었다. 가게는 번성했다. 그중 셋째가 인천에 새롭게 음식점 문을 열었다. ‘경인면옥’이다. 셋째의 손자 함종욱씨를 만났다. 함용복(창업주)-함원봉-함종욱으로 이어지는 ‘경인면옥’ 70년의 역사를 듣는다.

    노포로서의 ‘즐거운 괴로움’

    “가끔 수십 년 만에 오시는 손님들이 계십니다. 몇 해 전에는 40년 만에 오신 손님이 계셨습니다. 인천 사시다가 이민을 가셨는데, 이 분이 냉면을 다 드시고 나서 ‘맛이 달라졌다’고 하시는 거예요.”

    3대 사장 함정욱 대표는 당황스러웠다. 1969년생, 올해 49세다. 40년 전이면 함 대표가 불과 아홉 살 꼬마였을 때다. 지금도 음식은 할머니가 만든 그대로다. 세부적으로 달라졌겠지만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메뉴도 별로 바뀌지 않았다. 만드는 법도 마찬가지.

    40년 전이면 할머니가 살아계셨을 때다. 할머니가 만진 음식을 드셨을 것이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단골손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분들이 다녔던 시기가 다 다릅니다. 가게에서는 같은 방식으로 내놓지만 시대별로 양념용 각종 재료들도 달라졌고 장(醬)도 달라졌고, 조금씩 음식 맛도 달라졌겠지요. 우리는 같은 음식을 내놓는다고 하는데 손님마다 처음 맛본 시기의 음식을 고집하십니다. 그 음식이 아니면 ‘달라졌다’고 하시는 거지요.”

    단골손님, 즐겁고도 괴로운 존재다.

    메밀의 함량을 10% 높였더니

    20kg 기준 밀가루의 가격은 대략 2만원. 수입 메밀은 대략 11만원 선. 국산 메밀가루는 22만원 선. 업소로서는 메밀가루 비용이 상당히 부담이 된다.

    “꾸준히 65% 메밀 면을 내고 있습니다. 얼마 전 메밀 함량을 10% 높여 보았습니다. 메밀 75%에 밀가루와 전분 25%를 섞었지요. 평소에는 대략 ‘감’으로 섞지만 그날은 저울로 일일이 재서 넣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

    “아니나 다를까, 손님들 몇몇 분이 항의를 하시더라고요. 맛이 달라졌다, 심지어는 음식 맛이 아니라고, 이게 뭐냐고 불평하시는 분도 계시고. 바로 원래대로 돌아왔습니다. 지금도 저희 가게는 65% 메밀 면을 내고 있습니다.”

    한 가지 달라진 것은 수입산의 원산지다. 원래는 중국산 메밀을 사용하다가 최근에 미국 산으로 바꿨다. 이유는 간단하다. 중국산 메밀에서 자꾸 벌레가 나왔다. 10박스 정도를 뜯으면 한두 박스에서 날벌레가 나왔다. 위생 문제는 심각하다. 벌레가 나오면 가게로서는 사용하기 힘들다. 미국 산으로 바꿨다.

    북에서 온 3명의 사업가

    음식점으로 돈을 벌겠다고 3명의 형제가 서울로 왔다. 특이한 경우다. 고향은 평안도 신의주. 여러 형제 중 일부는 고향인 신의주를 떠나 잠깐 함경도로 간다. 어떤 이유, 경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함경도에서 양과자 가게를 운영했다는 사실은 전해진다.

    3형제는 ‘음식점 기획자’ ‘사업가’였을 것이다. 양과자점과 냉면집. 해방 전 이미 음식점 사업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이들이 일제강점기 ‘경성(京城)’으로 왔다.

    종로2가 화신백화점 언저리에서 음식점을 연다. 희미한 옛 사진을 보면 창업하던 날 현수막이 보인다. 세로로 ‘종로평양냉면옥지점(鐘路平壤冷麵屋支店)’이라고 쓰여 있다.

    지금 성업 중인 냉면집 상당수는 북에서 온 실향민들이나 그 후손들이 창업했고 후손들이 운영하고 있다. 한국전쟁 때 남쪽으로 온 실향민들이다.

    그렇지 않은 가게도 있긴 하다. 서울 을지로 ‘우래옥’의 경우는 한국전쟁 전에 ‘서북관’이란 이름으로 창업했고 창업 후 다시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 온 경우다. 가게 이름 ‘우래옥(又來屋)’도 ‘다시 돌아 왔다’는 뜻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또 오시라’고 붙인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경인식당’ ‘경인면옥’의 창업은 ‘우래옥’보다 빠르다. 1944년. 해방 1년 전 3월의 일이다.

    가게는 번성했다. 일제강점기 말기다. 음식점들은 그 시대 유행하는 음식을 죄다 모은 ‘종합선물세트’ 같은 형식이었다. 냉면집의 메뉴가 불고기, 수육, 갈비탕, 설렁탕 등을 모두 포함했다. 어복쟁반을 내기도 하고 몇몇 가게에서는 비빔밥을 내기도 했다.

    초기의 ‘종로평양냉면옥지점’도 그러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음식을 모두 내놓았던 흔적은 지금 ‘경인면옥’의 메뉴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비빔밥도 내고 갈비탕도 낸다. 냉면전문점이면 냉면만 제대로 해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은 지금에나 가능하다. 지금도 남아 있는 서울의 노포들은 여전히 냉면과 갈비, 불고기를 같이 내놓는다.

    화신백화점 부근의 ‘그 냉면집’ 아직도 있느냐?

    ‘경인면옥’ ‘경인식당’으로는 훈장 같은 이야기도 한 토막 전해진다.

    2000년 고 김대중 대통령과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에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이 무렵 남쪽의 기자들이 몽양 여운형의 셋째 딸 여원구 씨를 만났다. 여원구 씨는 1946년 월북, 인터뷰 당시는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이었다. 그녀가 “옛날 화신백화점 뒤 평양냉면집이 아직도 있느냐?”고 물어봤다는 것이다.

    ‘종로평양냉면옥지점’의 현수막에 보면 개업일이 1944년 3월이다. 여원구 씨는 1946년 월북했다. 그녀의 나이 스무 살 언저리였다. 불과 2년의 시간. 10대 후반 소녀의 기억 속에 깊이 새겨질 정도로 ‘종로평양냉면옥지점’은 유명한 가게였을 터이다. 하여 ‘그 음식점’의 근황을 물어봤을 것이다. ‘종로평양냉면옥지점’에서 ‘경인식당’ ‘경인면옥’으로 바뀌며 70여년의 업력을 쌓은 ‘경인면옥’으로서는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을 훈장 같은 이야기다.

    본점은 사라지고 분점만 남다

    서울 ‘종로의 평양냉면 집’이 성공하자 맏형이 막내 함용복 씨에게 ‘인천 지점 개설’을 제의한다. ‘경인면옥’의 시작이다.

    왜 인천인가, 에 대한 의문이 있겠다. 간단하다. “인천에는 냉면에 대한 수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도시에는 이런 음식에 대한 수요가 있었고 그중 냉면은 설렁탕과 더불어 보기 드문 ‘배달음식’이었다. 전문적으로 냉면, 설렁탕 등을 자전거로 배달하는 이들도 많았다.

    인천은 상당한 규모의 도시였고 특히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많았다. 서해안을 따라 평안도, 황해도 일대에서 이주한 이들이다. 인천에 첫 지점을 낸 까닭이다. 지금은 사라진 ‘인천-서울 냉면 배달’도 있었다. 인천냉면이 유명하니 서울에서도 인천냉면을 배달시킨 것이다.

    1946년(1947년이라는 이도 있다), 당시로서는 번화가인 인천 신포동에 ‘경인식당’의 문을 열었다. ‘경인면옥’의 테이블 시트에는 그 무렵의 사진이 남아있다. 인천 번화가인 신포동 일대를 찍은 사진 중간에 ‘경인식당’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늘 순탄하지는 않았다. 1970년 언저리, 서울의 평양냉면집이 문을 닫았다. 큰형이 다른 사업에 투자하였다가 실패를 보자 결국 잘 운영되던 식당까지 접은 것이다.

    “사업이 잘 되자 큰 할아버님께서 면(麵), 식초 사업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 사업이 실패한 거죠.”

    1930년대 평양의 주요 사업 중 하나가 건면(乾麵면) 제조였다. 북에서 온 이들 형제는 남쪽에서 건면, 식초 사업을 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가게운영을 잘 하셨으니까 아버님은 다른 일을 하셨죠. 아버님도 젊은 시절에는 보석, 장신구 쪽 일을 하시다가 결국 ‘경인면옥’을 물려받았습니다.”

    서울 종로의 ‘평양냉면 집’이 문을 닫자, 집안에서는 인천 ‘경인면옥’만은 지키자는 분위기. 결국 인천 ‘경인면옥’은 2대 사장 함원봉 씨가 물려받아 잘 지켜나가는 걸로 결론이 났다.

    3대에 걸친 70년 이상 업력

    보석, 장신구 일을 하던 2대 함원봉 씨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식당 일을 시작했다. 3대인 지금의 함종욱 대표도 마찬가지. 경영학을 공부하고 중국에서 보석, 장신구를 제작, 유럽으로 수출하던 그도 결국 ‘경인면옥’을 물려받았다. 3대 가업 승계이다.

    “아버님 형제분들이 대부분 미국에 계십니다. 아버님이 연세가 많아지니 백부, 숙부님들이 저에게 압력을 넣은 거죠. 제가 물려받지 않으면 가게 대가 끊긴다고(웃음). 중국에서 같이 사업을 하던 아내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지금은 같이 가게 운영을 하고 있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식당 일에 조금씩 참가했고 2012년 아버님으로부터 완전히 식당 일을 물려받았습니다. 음식 내용은 손댈 게 없습니다. 저는 할아버지, 아버님이 하시던 걸 지키면서 나름대로 조금씩 개선하려고 합니다.”

    조미료와 소다 사용량도 줄였다. 면의 메밀함량도 조정해본다.

    필자가 가장 놀랐던 음식은 녹두전이었다. 새색시 같은 모양과 맛이었다. 겉은 파삭하고 속은 촉촉했다. 부드러우면서도 파삭했다. 걸쭉한 맛도, 강렬한 기름 냄새도 없었다. 마치 팬케이크 같은 부드러움이 특이했다. 빵가루나 부침가루도 쓰지 않는다. 맛있었다.

    “할머님이 만드신 대로 지금도 만들고 있습니다. 묵은 김치에서 냄새난다는 지적이 있자 묵은 지 대신 시래기를 사용하고 돼지고기는 갈아서 넣습니다. 그 외는 녹두 100%입니다. 할머님이 완성한 레시피입니다.”

    바뀌면서도 바뀌지 않는다. 3대 전승, 70여년의 역사는 그렇게 흘러간다. “갈비탕은 메뉴에서 빼지 마라”는 말씀을 여전히 지킨다. 좋은 갈비로만 갈비탕을 끓이고 국물용 고기를 육우에서 한우 1등급 이상으로 바꿨다.

    갈비탕과 냉면 육수에서 깊은 맛을 느낀다는 손님의 칭찬이 기쁘다.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dasani87@naver.com

    *사진 설명

    -‘경인면옥’의 3대 대표 함종욱 씨. 온전한 주인이 된 지 ‘겨우’ 5년이 됐다. 변하지 말아야 할 것과 변할 것을 구분해서 ‘경인면옥’ 100년의 역사를 만들 것이다.

    - 평양냉면과 녹두전의 모습. 기본 메뉴이다.

    - 냉면의 고명은 오이, 배, 무 등을 사용한다. 메밀 65%, 전분과 밀가루 35%를 혼합해 만든 면은 탄력이 있으면서도 부드럽다.

    -‘한국인의 밥상’에 소개된 2대 사장 함원봉 씨와 ‘경인면옥’ 역사.

    - 녹두전을 부치는 아내를 바라보는 함종욱 대표.

    [냉면 노포맛집 4곳]

    우래옥

    1940년대 후반 문을 열었다. 창업주는 평양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다가 서울로 와서 냉면집을 열었다. 불고기와 몇몇 메뉴가 있다. 시작부터 냉면전문점은 아니었다는 뜻.

    장충동 평양면옥/논현동 평양면옥

    1980년대 문을 연 냉면집이다. 업력이 그리 길지는 않다. 장충동 평양냉면은 창업주의 맏아들이, 논현동은 창업주가 운영 중. 분당 등에도 가족이 경영하는 가게가 있다.

    을지면옥/필동면옥/의정부 평양면옥

    고춧가루가 올라가 있는 특이한 냉면. ‘을지면옥’ ‘의정부 평양면옥’ ‘필동 필동면옥’이 모두 가족들이 운영하는 곳이다. 면발이 비교적 가는 편이다.

    서부냉면

    지방에서는, 이른바 ‘평양냉면 노포’ 중 하나다. 경북 영주시 풍기. 실향민이 창업했다. 국물이 검은 색이고, 면발에는 녹쌀의 흔적인 겉껍질이 가뭇가뭇 박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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