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창원 쇠창살 자르고 2년 6개월 숨바꼭질… 결국 다시 철창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 플러스 네이버 북마크 싸이월드 공감 기사 구입 프린트 기사메일
입력시간 : 2012.09.27 10:50:29 | 수정시간 : 2012.09.28 16:29:47
    대구 동부경찰서 유치장의 배식구로 탈출했던 최갑복이 탈주 6일째인 지난 22일 경남 밀양에서 붙잡혔다. 최갑복은 가로 45㎝, 세로 15㎝ 크기에 불과한 배식구를 통해 달아나 화제가 된 인물. 그가 '미꾸라지 탈옥범'으로 불리는 이유다.

    최갑복은 도피행각 역시 미꾸라지 같았다. 경남 밀양의 한 가정집에 침입하려다 매복 중이던 형사들에게 덜미를 잡히기 전까지 경찰의 추적과 검문을 마치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며 애를 먹였다.

    그렇다면 이전에는 최갑복과 같은 탈주범이 없었을까? 우리가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는 인물로 신창원이 있다. 최와 신은 어떻게 달랐을까?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주요 탈주범들의 행적을 짚어보자.

    '탈주계 전설(?)' 신창원

    역대 탈주범 가운데 가장 악명을 떨친 인물은 신창원이다. 1999년 7월 16일 검거될 때까지 2년 6개월 동안 경찰의 수사망을 뚫고 전국 각지에 출몰하며 숱한 화제를 뿌리고 다녔다.

    신창원은 1989년 공범 3명과 함께 강도행각을 벌이다 공범 중 하나가 살인을 하는 바람에 강도치사죄로 수배를 받았다. 그리고 그 해 9월 검거돼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서울구치소와 청송교도소 등을 거쳐 1994년 11월 부산교도소로 이감된 후 신창원은 3년간 친밀한 탈주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드디어 1997년 1월 그는 부산교도소 화장실의 쇠창살을 절단하고 탈옥에 성공했다.

    신창원은 도피생활을 하는 중에도 전국 각지에서 144건의 강도와 절도를 저지르며 9억8,000여 만 원을 빼앗았다. 이 돈을 이용하여 다방 여종업원 등 유흥업소 종사자를 유혹, 동거하며 교묘하게 은신했다. 물론 동거할 여성이 없을 때엔 토굴 등에서 생활하며 쥐고기로 연명하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차 번호판을 바꿔 달거나 다른 사람의 신분증을 제시하는 등의 수법은 이미 고전. 그럼에도 신창원은 그런 방식으로 경찰의 추적을 따돌렸고, 도피기간에 사귄 동거녀의 오빠가 폭행 혐의로 입건되자 합의서를 제출하러 경찰서와 검찰청을 여러 차례 드나드는 대담함마저 보였다.

    또 담당형사인 원종열 경장이 쏜 총에 맞아 부상당한 상태에서도 경찰의 끈질긴 추격을 따돌리는 등 초인적인 체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다람쥐'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이 때문이다.

    경찰은 신창원의 검거를 위해 헬리콥터를 띄우고 전경 들을 무수히 동원했다. 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무려 열세 번을 눈앞에서 놓쳤다. 신창원의 도피기간 동안 경찰수사의 공조부재, 주민신고 무시 등 고질적인 허점이 드러났으며, 많은 경찰관이 체포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신창원의 도피행각은 그러나 1999년 7월 가스레인지 수리의뢰를 받고 전남 순천의 한 아파트에 들어갔던 수리공의 제보로 덜미를 잡히면서 막을 내렸다. 재검거 이후 그는 22년 6개월 형을 추가로 선고 받았다.

    '제2의 신창원' 이낙성

    그 뒤를 잊는 인물은 '제2의 신창원'으로 불리던 이낙성이다. 그는 1년 6개월 동안 도피생활을 하며 경찰의 속을 썩였다. 당초 행방이 묘연해 외국으로 도망갔다거나 숨졌다는 등 소문이 무성했지만 실제로는 서울 한복판에서 생활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이낙성은 강도 등 혐의로 2001년 말 체포돼 징역 3년에 보호감호 7년을 선고 받았다. 그는 청호감호소에서 보호감호를 받고 있던 2005년 치질수술을 위해 경북 안동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입원 다음날 새벽, 감시 소홀을 틈타 교도관이 벗어둔 점퍼를 걸친 채 그대로 도주했다.

    신창원과 달리 이낙성은 추가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착실히(?) 일을 해서 도피자금을 마련했다. 탈주 직후 이낙성은 택시를 잡아타고 곧장 서울로 올라와 북창동 인력시장을 통해 일자리를 수소문했다. 그리고 경기구리시의 한 중국음식점을 소개받아 설거지 일을 시작했다. 배달 일은 하지 않았다. 신분노출을 우려해서다.

    구리와 서울 마포의 중국음식점에서 5개월 간 일하다 그만 둔 이낙성은 이후 서울 시청, 신촌 등지의 음식점에서 일용직으로 일했다. 숙박은 음식점 인근 여인숙이나 여관에서 해결했다. 이낙성은 돈이 모이면 일을 쉬고, 돈이 떨어지면 다시 일을 하는 생활을 검거 직전까지 계속했다.

    그러나 그의 도피행각도 예기치 않은 사고로 덜미가 잡혔다. 2006년 술에 취한 이낙성이 건물 계단에서 구르는 바람에 위쪽 앞니 두 개가 부러지고 턱이 찢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아침에 서울 성수동 길가에서 눈을 뜬 그는 뒤늦게 통증이 느껴져 인근 병원을 찾았다.

    처음에는 무협지 소설 속 주인공인 '정종철'이라는 이름을 댔다. 그러나 병원 직원의 계속된 주민등록번호 요구에 결국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오랜 탈주 생활에 지친 데다, 치료를 받기 위해 자수를 결심한 것이었다. 그리고 병원 직원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 붙잡히면서 오랜 도피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딱한 사실은 그가 탈주한 지 4개월 뒤인 2005년 8월 사회보호법 폐지로 청송보호감호소 동기들이 가출소했다는 점이다. "보호감호 7년을 더 살아야 하는 게 견딜 수 없어 탈주했다"는 이낙성은 결국 도주죄와 교도관 점퍼를 훔친 절도죄 등으로 추가형을 살고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지강헌

    교도소 이감 도중 탈주해 서울 한복판에서 인질극을 벌인 지강헌도 주요 탈주범 가운데 하나다. 지강헌은 자살 직전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절규를 남겨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인물이기도 하다.

    지강헌과 일당 12명은 1988년 영등포 교도소에서 대전ㆍ공주교도소로 이감되던 중 미리 준비한 도구로 수갑을 풀고 호송버스를 탈취했다. 500만원 을 훔친 자신보다 600억원을 횡령한 전경환씨(전두환 대통령의 동생)의 형기가 더 짧다는 데에 불만을 갖고 탈출을 시도한 것이다.

    이들은 호송버스를 돌려 서울로 돌아왔고 버스를 버려둔 채로 흩어졌다. 그리고 지강헌과 강영일, 한의철, 안광술 등 4명은 서울 서대문구 김모씨의 집에 침입했다. 집에는 김모씨 부인과 1남3녀가 있었다. 지강헌은 탈취한 권총으로 이들을 위협하며 안방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지강헌 일당은 별다른 폭행이나 폭언은 하지 않았다. 대신 1명씩 교대로 불침번을 서며 김씨 가족을 감시했다. 그러던 중 불침번이 깜빡 잠든 틈을 타 김씨가 인근 파출소에 지강헌 일당을 신고했다.

    무장한 경찰 1,000여명이 김씨 집을 에워쌌다. 잠에서 깬 지강헌 일당은 경찰 경찰과 대치하며 실랑이를 벌였으나 강영일이 협상을 위해 밖으로 나온 사이 한의철과 안광술이 지강헌이 가지고 있던 총을 빼앗아 자살했다.

    지강헌은 경찰들에게 동료들의 자살을 알린 뒤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든 테이프를 요구했다. 그는 카세트에 '홀리데이'를 틀어놓고 유리조각으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목격한 김씨 딸의 비명에 특공대원이 진입, 지강헌을 사살하면서 인질 탈주극은 막을 내렸다. 이 사건을 바탕으로 '홀리데이' 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대부분 단기간에 덜미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탈주범은 짧게는 몇 시간, 길어야 몇 주 안에 덜미를 잡혔다. '뛰어봐야 벼룩'이라는 말이 무색한 지경이다.

    2009년 서울 남대문경찰서 유치장에서 달아난 이모씨와 홍모씨는 각각 탈주 당일과 열흘째 되는 날 붙잡혔다. 2008년 경기도 수원 소재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도중 달아났던 서울구치소 수감자 김모씨도 도주 50여일 만에 체포됐다.

    2008년 서울 송파경찰서 풍납지구대에서 절도 혐의로 조사를 받던 도중 달아난 윤모씨도 당일 검거됐고, 청송교도소 복역 중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요양 중이던 2007년 2월에 탈주한 강도강간범 이모씨도 두 달 만에 꼬리를 잡혔다.

    이외에도 2005년 수원지검 성남지청 구치감실에 대기하다 열려있는 유치장 문틈으로 도주한 여승무원 강도살인범 민모씨는 11시간 만에, 그 해 7월 전주교도소를 탈옥한 강ㆍ절도범 최모씨는 3일 만에 경찰에 붙잡혔다.

    문서 위조… 헬기 타고…
    ● 상상초월 '세기의 탈주범'
    '8차례 도주 시도' 러셀
    '탈옥의 천재' 영화제작



    시선을 해외로 돌려보면 영화를 방불케 하는 탈옥범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철창을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됐다.

    1980~90년대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탈옥의 천재' 스티븐 러셀이 대표적이다. 러셀은 모두 8차례 탈옥을 시도했으며 그때마다 그 방법이 기발했다.

    먼저 러셀은 교도소 미술시간에 녹색 잉크를 조금씩 훔쳐 자신의 여벌 죄수복을 염색한 뒤 의료스태프로 위장해 탈옥했다. 또 건강진료 문서를 에이즈에 걸린 것으로 위조, 요양원으로 이송된 뒤 탈주하기도 했다.

    도피 기간에 위조신분증이 발각되면서 위기를 맞았을 때는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연기로 일단 시간을 번 다음 병원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았다. 러셀은 병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FBI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FBI 고위관계자를 사칭해 철수를 명령했고, 다시 자유의 몸으로 유유히 병원을 나섰다.

    그러나 러셀은 마지막 탈주 몇 달 후에 끝내 체포됐다. 러셀은 성형수술과 신분세탁으로 완전히 딴 사람의 삶을 살려고 기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성형수술을 코앞에 두고 체포된 것. 자칫 영영 그를 못 잡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러셀은 현재 140년형을 선고를 받고 복역 중이며 철통 같은 감시를 받고 있다. 그의 기상천외한 이야기는 <필립모리스>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파스칼 파예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탈옥범이다. 살인 혐의로 30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이던 그는 2007년 프랑스의 남동부 그라스 교도소 지붕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탈출했다. 파예는 2001년, 2003년에도 수감 동료들과 헬기를 이용한 탈옥을 공모해 성공했다.

    그렇게 파예는 6년 사이에 무려 3번이나 헬기로 교도소 탈출에 성공했으나 마지막으로 스페인에서 체포된 뒤 아직까지 수감 생활을 하고 있다.

    탈옥율 '제로'를 자랑하던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알카트라스 섬의 알카트라스 교도소를 탈출한 일화도 유명하다.

    알카트라스 교도소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육지까지 3㎞, 배를 타고도 30여 분이 걸리는 지역이다. 해안은 절벽으로 이뤄져 있고 바다로 떨어져도 암벽에 부딪혀 살아남기 힘든 데다가 섬 주변에는 식인 상어도 서식하고 있다. 따라서 '살아서는 나갈 수 없는' 교도소로 악명을 떨쳤다.

    그러나 1962년 이곳에서 복역 중이던 프랭크 모리스, 존 앤그린ㆍ클래런스 앤그린 형제 등 3명의 죄수가 감쪽같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미 여러 차례 탈옥 경험이 있는 이들은 1년 간의 치밀한 계획과 준비 끝에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탈옥을 시도했다.

    이들은 먼저 침대 위에 석고와 종이를 빚어 만든 머리 모형을 놓아 야간 점호를 피했다. 그리고 습기로 약해진 벽을 뚫고 환풍구를 통해 지붕으로 올라가 미리 만들어 놓은 구명정과 구명조끼를 이용해 바다로 사라졌다.

    대부분 탈주범들과 달리 이들의 행방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오리무중인 상황이다. 알카트라스 교도소는 높은 경비 비용 때문에 압박을 받다 1963년 결국 폐쇄됐다. 그리고 1976년부터 국립 역사 유적지로 개장해 전세계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 <저작권자 ⓒ 한국미디어네트워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HOME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