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기업 잘 나가면 야구단 성적도 훨~ 훨 날았죠
  • ● 야구단과 모기업 '닮은꼴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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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준기자 realpeace@hankooki.com
입력시간 : 2014.04.14 10:50:04 | 수정시간 : 2014.04.14 10:50:04
    출근길에 인터넷을 검색하던 김모(34)씨는 삼성라이온즈가 지난 3년간 1위를 독식했다는 뉴스를 보고 흥미가 생겼다. 매년 역대 최대 실적을 경신하던 재계 1위 삼성과 너무도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지난해 2, 3위 구단 역시 모기업 실적이 좋았던 두산베어스, LG트윈스였고 총수가 어려움을 겪은 SK와 한화의 경우 소속 구단들도 하위권에 머물렀던 사실까지 알게 된 김씨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이쯤 되면 모기업의 상황과 소속 구단 성적 간에 연관성이 전혀 없지는 않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을 정도다.

    야구팬들에게 가장 궁금한 것은 역시 구단의 최종 성적일 것이다. 전문가별로 저마다 다른 결과를 전망하지만 결국 뚜껑은 열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타선의 강력함과 투수진의 안정감, 감독의 전술, 부상여부 등 너무나도 다양한 요인들이 혼재해 있는 까닭이다.

    이와 관련, 일각에서는 "구단의 성적을 전망하기 위해서는 모기업의 상황도 염두해봐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모기업의 지원금 액수가 구단의 성적을 좌우한다는 단순한 얘기가 아니다. 총수의 상황, 매출ㆍ영업이익 등의 실적 등 모기업의 다양한 상황이 구단 성적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이 같은 의견을 단순히 미신이라 치부하기엔 모기업-소속 구단이 그동안 밟아온 행보가 심상치 않다.

    꼴찌에서 우승까지 30여년 '생사고락' 함께해

    프로야구 출범 이후 현재까지 구단명과 연고지가 한 번도 바뀌지 않은 곳은 삼성라이온즈와 롯데자이언츠 뿐이다.

    삼성라이온즈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궤를 함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회장은 삼성라이온즈의 초기 구단주를 맞아 선진 야구기술의 접목과 아마야구의 저변 확대를 직접 지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삼성라이온즈는 창단 초기부터 꾸준히 상위권에 랭크된 바 있다. 이 시기 이 회장은 고 이병철 선대회장으로부터 후계자로 지목, 그룹의 주요 사업들을 맡고 있었다. 삼성라이온즈가 몇 년째 2위 자리를 차지하며 1위를 넘보던 1987년 이 회장은 그룹 회장으로 취임했다.

    이후에도 가을야구를 꾸준히 해왔지만 유독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던 삼성라이온즈는 2000년대 들어 세 번(2002년, 2005년, 2006년)이나 우승하며 마침내 프로야구 강자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 흥미롭게도 삼성라이온즈가 처음으로 우승한 2002년은 삼성이 재계 라이벌인 현대를 제치고 재계1위로 올라섰던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또한 삼성라이온즈는 삼성이 역대 최대 실적을 매년 경신하고 있는 2011년부터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려 눈길을 끌었다.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내던 삼성라이온즈가 이외의 부진을 겪었던 시기도 모기업인 삼성의 상황과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1~4위만을 오가던 삼성라이온즈가 처음으로 5위로 떨어졌던 1994년에는 제일제당(현 CJ)이 삼성과의 계열분리를 본격적으로 진행하던 때다. 삼성라이온즈는 이후 3년간 5~6위를 오가는 수모를 겪었다. 다시 상위권으로 올라 꾸준한 성적을 내던 삼성라이온즈가 또다시 5위로 떨어진 2009년에는 삼성특검으로부터 조사를 받던 이 회장이 경영권 불법승계와 조세포탈로 사법판결을 받았던 때와 일치한다.

    한일 양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은 1980년대 일본의 선진 야구문화를 국내에 접목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다. 롯데자이언츠의 초대 구단주로 재일교포 선수들을 꾸준히 영입하며 성과를 내왔다.

    롯데는 재계 5위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지난 30년간 부침이 없었던 그룹으로 평가된다. 마찬가지로 롯데자이언츠도 최고의 관중 동원력이 무색하게 상위권에 올라갔던 적이 별로 없는 구단으로 꼽힌다. 짠물경영을 하는 모기업의 영향 때문인지 선수에 대한 투자를 한동안 하지 않았던 롯데자이언츠는 한때 '꼴데'라는 치욕적인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97~1998년과 2001~2004년 등 8년 동안 5번이나 최하위에 머물렀던 까닭이다.

    총수와 희비 함께 겪어… 한화·두산 하위권 추락

    두산베어스와 한화이글스도 창단 이후 모기업이 바뀌지 않은 구단으로 꼽힌다. 다만 이름은 중간에 바뀌었다. 각자 자사의 대표 소비재 계열사이던 OB와 빙그레를 구단명으로 내세우다 추후 그룹명을 내걸게 된 것이다.

    두산가 형제 대부분이 야구를 즐기지만 그 중에서도 박용곤 두산 명예회장의 야구사랑이 뜨겁다고 알려져 있다. 박 명예회장은 OB베어스(현 두산베어스)의 창단을 주도한 인물이다.

    창단 첫해 1위에 올랐던 OB베어스는 이후 10여 년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OB베어스가 다시금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때는 공교롭게도 두산이 100주년을 맞았던 1995년이었다. 그룹의 얼굴격인 야구단이 재계 최초 100주년 행사의 축포를 쏘아 올린 셈이다. OB맥주를 외국계 회사로 매각하고 1999년 두산베어스로 이름을 바꾼 구단은 2001년에 또다시 1위를 차지했다. 2001년은 두산이 소비재 기업에서 중공업 기업으로 도약하는 첫 발걸음으로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을 인수한 해다. 모기업의 중요한 순간마다 우승으로 보답한 셈이다.

    물론 두산과 두산베어스에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5년 '형제의 난'을 겪은 두산은 2006년 고 박용오 전 두산 회장, 박용성 전 두산 회장, 박용만 두산 회장 등이 사법처리됐다. 모기업이 역대 최대의 위기를 겪었던 2006년 두산베어스도 2위에서 5위로 미끄러졌다.

    한화이글스도 모기업 총수의 리스크가 그대로 구단의 부진과 이어져 눈길을 끈다. 김승연 한화 회장이 검찰과 악연을 맺을 때마다 구단의 성적이 떨어진 것이다.

    빙그레이글스(현 한화이글스)는 OB베어스로부터 충청 연고지를 넘겨받고 1986년에 프로야구리그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김영덕 감독을 중심으로 빠른 속도를 팀을 정비한 빙그레이글스는 1988~1989년과 1991~1992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할 정도로 성세를 유지했다. 빙그레이글스의 기세를 꺾은 것은 김 회장의 구속 소식이었다. 1988년 이후 꾸준히 상위권에 랭크되던 빙그레이글스는 김 회장이 외화 밀반출 혐의로 구속된 1993년 5위로 삐끗했다.

    수천억원대의 배임ㆍ횡령 혐의로 2012년 구속, 2년 가까이 철창신세를 진 김 회장은 올해 초 열린 파기환송심에서 집행유예 선고를 받으며 자유의 몸이 됐다. 김 회장이 감옥에 있던 지난 2년간 한화이글스도 역대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2012년 꼴찌를 한 한화이글스는 지난해 처음으로 리그에 참가한 NC다이노스에도 뒤지며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9위팀이라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쌍방울 '만년 꼴찌'서 SK '명문 구단' 재탄생

    전주시를 연고로 1991년 창단한 쌍방울레이더스는 야구팬들 사이에서 만년 꼴찌팀으로 각인돼있다. 모기업 재정이 부실했던 까닭에 경쟁 대기업만큼 구단에 지원하지 못했던 것이 최대 요인으로 꼽힌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쌍방울레이더스의 바통은 SK와이번스가 2000년 넘겨받았다. 창단 초기에 하위권을 맴돌던 SK와이번스가 도약한 것은 창립 50주년을 맞은 2003년의 일이다. 순위를 6위에서 2위로 끌어올리며 50주년을 기념한 것이다. SK와이번스는 2007년부터 6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고 그중 3번(2007년, 2008년, 2010년) 정상을 밟으며 신흥 명문 구단으로 우뚝 섰다. SK와이번스가 우승의 주역인 김성근 감독에게 사령탑을 맡긴 2007년은 SK가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며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한 때라 더욱 주목된다.

    SK와이번스도 한화이글스와 마찬가지로 총수리스크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올해 초 김승연 회장과 비슷한 시기에 재판을 받으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최태원 SK 회장은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여전히 감옥에 있다. 2007년부터 꾸준히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며 고공행진을 거듭하던 SK와이번스도 지난해 6위로 떨어지는 등 극심한 부진을 겪었다.

    프로야구 역대 최강팀을 꼽으라면 누구나 첫손가락으로 꼽는 해태타이거즈(현 기아타이거즈)는 창단 이후 우승 트로피를 10회나 들어올린 강팀이다. 특히, 1986~1989년의 4년 연속 우승 시절의 해태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었던 최고의 팀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해태타이거즈의 위기는 모기업인 해태의 부도와 함께 왔다. 사세확장에 나섰던 해태는 1997년을 기점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주요 선수를 트레이드하며 운영비를 충당했던 해태타이거즈는 1998년에는 5위로, 이듬해에는 7위로 추락을 거듭하다 결국 기아자동차에 인수됐다.

    '대기업=상위권' '중견기업=하위권'서 맴돌아

    프로야구 출범 당시 모기업의 조건으로 정부가 제시했던 기준은 재무구조가 건실한 상시 노동자 3만명 이상의 대기업이었다. 구단운영에 적지 않은 자금이 들어간다는 점을 감안하면 규모가 큰 기업이 참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중견기업 중에서도 모기업에 참여한 곳들은 있다. 그러나 이들의 끝이 대부분 그리 좋지 않아 '프로야구=대기업의 전유물'이라는 공식이 자리잡고 있다.

    인천은 가장 많은 구단이 만들어졌다가 사라진 연고지로 손꼽힌다. 삼미슈퍼스타즈를 필두로 청보핀토스(1985년), 태평양돌핀스(1988년), 현대유니콘스(1996년) 등 많은 기업들이 등을 돌렸다. 삼미, 청보, 태평양의 경우 본래 야구단을 감당할 규모의 기업은 아니었다. 이들이 모기업으로 있을 당시 구단도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삼성과 재계 1, 2위를 다투던 현대의 경우 상황은 조금 달랐다. 태평양돌핀스의 뒤를 이은 현대유니콘스는 모기업의 강력한 지원 아래 창단 2년 만에 우승을 하는 등 단숨에 명문구단으로 뛰어올랐다. 이후에도 3차례나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현대유니콘스는 모기업인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의 몰락과 함께 종말을 고했다. 그룹을 승계한 현정은 현대 회장의 지원이 끊기고 기아타이거즈를 소유하고 있던 정몽구 현대차 회장마저 손을 뗀 현대유니콘스는 결국 해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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