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문화로 세상읽기] 잘못된 칸영화제 지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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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1970.01.01 09:00:00 | 수정시간 : 1999.04.29 08:27:00




  • 올해도 어김없이 5월12일부터 프랑스 해변도시 칸에서는 영화제가 열린다.

    세계 3대영화제의 하나. 할리우드의 상업성에서 멀찍히 떨어져 영화가 예술임을 확인하는 자리. 이 때가 가까워오면 한국영화계는 설렌다. 아니 막말로 ‘쉬리’처럼 “영화는 산업이다”라며 작품성이야 어떻든, 독창성이 있건 말건 “돈을 벌겠다”고 나서지 않은 다음에야 권위있는 영화제에서 인정받는 것이 모든 영화인의 꿈일터.

    그래서 한국영화는 노래가 ‘칸영화제’다. “칸에서 그랑프리를 받고 멋지게 소감 한마디 해보는 것이 꿈”이라는 제작자. “칸에서 내 작품을 인정받는 것이 목표”라는 감독이 하나, 둘이 아니다. 막 영화에 입문한 신인들조차 얄팍한 상업영화를 만들어 흥행을 시켜야 그나마 감독노릇을 할 수 있는 현실에서 “언젠가는 칸으로”라고 말한다.

    그 꿈이, 목표가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우리영화의 살길이 해외유명영화제에서 인정받아 지명도와 관심을 높이고, 해외시장을 넓히는 것 밖에 없는 현실이고 보면 칸영화제 수상은 그야말로 최고이자 최선의 길이다. 그렇다고 모든 길이 칸으로 통한다는 획일주의는 위험하다. 또 그 때문에 예술지상주의에 빠지는 것도 한심하다. 사실 칸은 예술지상주의를 버린지 오랜데…. 영화는 다분히 국내 흥행을 노려 할리우드를 베끼고, 직품성보다는 스타에 의존한 유행상품을 만들어 놓고도 칸을 들먹인다. 국내에서 개봉은 고사하고, 만들었다고 얘기조차 쉬쉬하는 영화까지 칸이다. 웃기는 얘기다.

    세계에는 칸 못지 않은 영화제들이 수두룩하다. 유럽만 해도 베를린, 베니스, 로카르노등이 있고 도쿄, 몬트리올, 모스크바도 그에 못지않은 권위와 명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영화는 유독 칸 신봉자가 됐을까. 아마 그것은 유럽예술, 구체적으로 프랑스 예술주의에 대한 턱없는 신봉과 환상 때문이다.

    지금 열심히 영화를 만들고 비평하는 세대들. 대부분 영화는 예술, 그것도 유럽영화의 환상에 빠져 프랑스문화원에서 살다시피했다. 그것이 그들의 잠재의식속에 칸의 신화를 심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는 이 땅에는 ‘상업영화 경시론과 작가주의의 고상함’이란 풍조가 생겼다. 작가주의 감독을 자처하는 감독들은 국내소개에 앞서 칸으로 먼저 필름을 갖고간다. 모든 제작일정이 칸에 맞춰진다. 지난해 이광모 감독은 후반작업도 덜된 ‘아름다운 시절’을 갖고 부랴부랴 칸영화제 감독주간으로 달려갔고, 올해에도 박광수 감독이 제주도 기상악화로 촬영이 늦어‘이재수의 난’을 비디오 테이프로, 그것도 편집도 안된 것을 제출하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칸에 맞춰 후반작업을 서두르다 보니 작품성만 부실해진다.

    상업영화는 칸을 국내 흥행 홍보용으로 이용한다. 어느 비공식부문이라도 출품시켜 ‘칸 출품’이라고 떠벌리면 저절로 좋은 영화가 된다. 이미 칸중독증에 걸린 관객들은 그것에 동조한다. 올해에도 예외없이 한국영화는 칸에 매달렸다. 그러나 장편영화는 우리영화의 소원인 본선경쟁부문은 고사하고 공식비경쟁부문인 ‘주목할만한 시선’이나‘감독주간’에 조차 단 한편도 들어가지 못했다. 아시아 영화로는 93년 ‘패왕별희’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중국 첸 카이거 감독의 ‘황제와 암살자’와 ‘하나비’로 지난해 베니스영화제 대상을 받은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키쿠지로의 여름’과 홍콩 신예 류릭와이 감독의 데뷔작 ‘사랑은 우리를 떼어놓지 못해’가 올랐다.

    반면 겨우 지난해 ‘스케이트’로 처음 시작한 우리의 단편은 경쟁부문에 무려 4편이나 나가는 위력을 발휘했다. 단편 경쟁부문(총12개 작품)에 드라마 작가 출신 김대현(30)의 ‘영영’, 김성숙(36)의 ‘동시에’, 송일곤(29)의 ‘소풍’이 나란히 진출했다. 미국과 함께 최다. 영상원 출신 이인균(31)의 ‘집행’도 영화학교 졸업작품만을 대상으로 지난 해 신설된 ‘시네 파운데이션’부문에 진출했다. 칸 타령만하던 장편은 외면당하고, 자신의 개성과 색깔로 만든 작은 영화들이 주목을 받은 셈.

    타르코프스키나 키에스로프스키, 고다르와 베르히만도 칸에서 수상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들의 작품을 낮게 평가하거나, 그들을 세계적 거장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문화와 예술이 어디 한곳만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가. 그것은 스스로 자유혼을 묶는 또 하나의 자기속박이다.



    이대현·문화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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