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DJ.YS 애증의 30년] 평생동지이자 숙명의 라이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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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1970.01.01 09:00:00 | 수정시간 : 1999.05.26 18:04:00




  • DJ와 YS, YS와 DJ…. 누구의 이니셜을 앞세워도 삐질 이 두 사람은 한국 정치사에서 최근 30년 가까이 양대산맥을 이루어왔다.

    둘은 그만큼 강렬한 스타일리스트였다. 두 사람은 뚝심과 오기, 인고와 노력으로 독재에 항거했고 정권을 거머쥐기 위해 머나먼 길을 숨가쁘게 치달려왔다.

    저널리스틱하게 표현한다면 두 사람은 진검승부 한 판을 위해 끊임없이 갈고 닦아온 것이다. 물론 그러는 사이 둘은 시대마다 달라지는 중원의 영주들에게 평생 고난과 핍박을 당해왔다. 그러면서도 수련의 과정과 단계는 달랐다.

    스타일리스트로 말하면 단연 YS가 두드러진다.





    YS, 감의 정치에 탁월한 ‘승부사’

    흔히들 그를 ‘감(感)의 정치에 탁월한 승부사’라고 말한다. 적어도 정치를 이념과 상관없이 지면 야당, 이기면 여당이라는 승부의 논리로만 볼 때 적확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위기든 호기든 정치적으로 절묘한 시점에 누구도 생각 못한 수를 내 판세를 뒤집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깜짝쇼’라는 비난을 듣기까지 하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창출해간다. 그런 예는 숱하지만 동시대인들에게 선명하게 각인된 대표적인 사례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우선 1983년 5월 18일. ‘광주사태’(당시에는 이렇게 표현했다)가 정확히 3주년을 맞는 날 그는 연금중인 상도동 자택에서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당시 DJ는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직후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 혐의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국내외의 압력으로 겨우 감형돼 82년말 미국으로 망명한 시점이었다.

    YS는 당시 ‘국민에게 드리는 글’에 이렇게 적었다. “내 집은 창살이 없을 뿐 나를 가두고 있는 감방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가운데 나는 국민 여러분에게 전달되지 않을 지도 모르는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 단식이 한국의 민주회복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나의 생명을 바칠 것입니다.”80년 ‘서울의 봄’ 이후 2년 가까운 가택연금으로 정치활동이 박탈된 YS는 진정 비장한 각오로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당시 국내 언론에는 ‘주요인사’ ‘현안’등의 간접적인 표현으로 한참 뒤늦게 한 줄 정도씩 보도되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의 승부수는 큰 파장과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YS는 평생 교도소 생활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지만 이로 인해 민주투사로서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굳힌다.

    이처럼 결정적인 시기에 백척간두에서 몸을 던지는 그의 스타일은 7년후 다시 한 번 결정적인 시점에 연출된다.

    90년 1월. YS는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민정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합당을 선언한다. 이름하여 3당 합당. 세상이 깜짝 놀랐다. 이 소식을 처음 전하는 취재기자의 말을 신문사 편집국장조차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무시할 정도였다.

    사실 말이 안됐다. 5,6공화국 내내 국민과 야당을 억압해온, 본질상 신군부 세력인 민정당과 70년대 유신 시절 내내 같은 행태를 보여온 박정희 정권의 잔존세력과 민주화운동 지도자의 합당은 누가 봐도 야합이었다. 집권만을 위한. YS는 “구국의 결단”이라고 고뇌의 소회를 피력했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다. 어쨌든 다시 한번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합당의 역사적 명분에 대한 논란을 차치하면 집권을 위한 승부수로서는 절묘한 것이었다.

    결국 YS는 이 카드를 통해 92년 대선 후보로 나섰고 평생의 꿈을 이뤘다.





    DJ, 논리적이고 치밀한 ‘지략가’

    DJ는 스타일과 인생역정이 YS와 전혀 다르다.

    특히 특유의 강렬한 이미지가 있지만 YS에 비하면 한 두 가지 단순한 표현이나 몇 가지 극적인 사례를 들어 딱히 이렇다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는 개인적으로 투옥, 납치, 사형선고, 망명, 연금 등 역대 독재정권과 권

    위주의 체제 하에서 누구보다도 엄청난 시련과 고난을 겪어왔다. 그래서 인동초(忍冬草)란 말이 애칭처럼 그를 따라다닌다. 그 말에는 우리 현대사의 얼룩진 과거가 그을음처럼 켜켜이 묻어난다. 그는 나름의 승부수를 던져보기도 전에 중요한 고비마다 정권에 의해 국민들로부터 떼내지곤 하는 불행을 겪었다.

    DJ가 논리적이고 치밀하고 신중한 스타일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스타일은 장점이지만 때로는 마이너스 효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지나치게 논리를 중시하다가 자기 논리에 매몰되거나 독단에 빠지기도 하고 한 번 주장한 논리가 공격을 받으면 툭툭 털고 ‘잘못이었다’고 고백하는 대신 끝까지 그 논리를 정당화시키려다가 ‘말 바꾸기의 명수’라는 혹평을 듣기도 한다.

    이러한 혹평의 극치는 정계은퇴 번복때였다. 92년 12월 대선에서 출마 3수 끝에 YS에 패하자 그는 눈물을 머금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그의 편에 서지 않은 이들조차 그때만큼은 도도한 역사의 한 장이 넘어가는 숙연함 속에서 그를 아쉬워했다. 그러나 ‘또 나올 걸…’하는 곱지 않은 시선도 전혀 없지 않았고 그런 예상은 2년여후 어쨌든 맞아들었다.

    주도면밀하게 준비하는 그의 스타일이 처음 나타난 것은 70년 9월 야당인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때였다. YS, 이철승과 맞붙은 DJ는 1차 투표에서 YS에 패했으나 2차 투표에서 이철승의 도움으로 승리했다. 전날까지 지방대의원들의 숙소를 일일이 돌아다니며 협조를 당부한 것도 YS를 누른 승인이었다. 조직에서 앞선다고 느긋해 하던 YS 진영은 뒤통수를 된통 얻어맞은 셈이었다.

    이후 DJ는 YS와 30년 가까이 스타일과 스타일을 맞부딪혀가며 때로 경쟁하고 때로 협력한다.

    DJ는 “원칙은 타협하지 않는다”고 늘 말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노태우 대통령의 3당 합당 제의때였다. 어쨌든 YS는 이를 받은 반면 DJ는 거부했다. 민주화 세력과 독재 세력의 결합은 국민과 하늘을 배신하는 야합이라는 것이었다. YS에 비하면 그는 이 때문에 대통령이 되기 위해 7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DJ는 기다림의 세월을 공부로 보냈다. 옥중에서도, 외국에서도, 가택연금 중에도 그는 끊임없이 독서하고 연구했다. 대한민국 정치인 중에 그만큼 정치 경제 사회 국제 통일 문화 등 각 분야에 식견이 높은 이는 없다.

    두 사람은 나름의 개성으로 혹독한 시대의 역사를 성실히 치열하게 살아냈고 그것은 많은 이들에게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국민들의 기억 속에, 역사의 기록 속에 어떻게 남을까를 생각해야 할 시각이 온 것 같다.





    이광일 주간한국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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