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한국 : [DJ.YS 애증의 30년] 핍박받고 용서하고... 적이 따로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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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1970.01.01 09:00:00 | 수정시간 : 1999.05.26 18:06:00




  • 한국정치 30년을 DJ,YS를 축으로 해서 보려면 많은 분수령을 넘어야 한다. 두사람의 경쟁사에 박정희_전두환_노태우 세사람은 끼어있는 모습이다.

    YS와 DJ는 이들이 3대에 걸쳐 집권한 30년 동안 모진 탄압과 회유속에 질긴 인연과 악연을 거듭했다. 역경속에 손을 잡고 정치의 봄이 오면 잡은 손을 놓았다.

    10·26후 전두환 소장이 쿠데타를 일으킬 여지를 만들어준 것도, 6·10 민주화 이후에는 ‘단군 이래 가장 부패’했다는 노태우씨의 등장을 막지 못한 것도 이들의 분열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이니다. 그런 분열 속에 두 사람은 민주화의 공적을 차지하며 이들이 물러간 자리에 차례로 올라섰다.

    물러간 자리를 넘겨받았지만 두 사람은 지금 자신들을 이전투구하게 만든 세사람를 놓고 다시 싸움을 벌이고 있다. YS는 전두환-노태우씨를 ‘역사바로세우기’란 이름 아래 법의 심판대에 세웠지만 DJ는 이들을 풀어줬다. DJ가 박정희를 ‘역사 속의 존경받는 지도자’로 치켜세우며 기념관을 세우겠다고 하자 YS는 ‘독재의 상징’이라며 세우지 말라고 한다. 전두환-노태우씨도 말싸움에 뛰어들어 YS를 공격하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거슬러 올라간 양김의 첫 싸움터는 박정희씨 집권시절. 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은 대결의 서막이었다. 1라운드에서의 승리는 DJ. 그러나 이는 박정희의 정적 1호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두사람 경쟁사에 낀 박·전·노전대통령

    대가는 혹독했다. 72년 유신선포때 일본에 머물던 DJ는 그대로 남아 한통련을 만들어 반유신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일명 KT공작으로 DJ를 도쿄 그랜드파레스 호텔에서 납치, 현해탄에 수장하려 했다. 당시만 해도 YS는 미국의 도움으로 수장을 면한 DJ에게 진한 우정을 보였다. 박정권에 초산테러를 당하기도 했던 YS는 누구도 나서지 않던 DJ납치사건을 공개추궁했다.

    박정권은 이런 양김씨를 철저하게 차단, 격리정책을 폈다. 두 사람의 관계도 상반된 길을 걸었다. YS는 DJ가 납치사건후 출구가 보이지 않는 연금생활로 혹독한 탄압을 받고 있을 때 유신체제에서 9대의원에 출마, 정통야당의 당권을 거머쥐었다. 당시 두 사람이 ‘박정희’라는 주적을 놓고 동지관계가 형성됐지만 전선은 정치활동이 가능했던 YS쪽에 형성됐다. YH사건, 총재직 제명등 으로 10·26을 일으키는 데 기폭제가 된 사람도 YS였다.

    DJ에게 불공평한 정치판은 80년대 전두환 정권 내내 계속됐다. 특히 박정권이 씌워놓은 용공성 시비는 15대 대선까지 그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지금은 YS와 대리전을 치르듯 전두환씨마저 DJ를 원거리 지원하는 양상이지만 당시 전 정권하에서 DJ는 내란음모사건의 주범으로 또 한번 죽을 고비를 맞고 미국 망명길에 오른다.

    YS는 이런 DJ에 비하면 행운아였다. YS가 문민정부의 도덕적 우위를 내세우며 전씨를 가혹하게 징벌하고 박정희 통치를 전면부정하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상대적 특혜를 누렸던 셈이다.

    그러나 ‘서울의 봄’을 제대로 맞지도 못하고 역경이 다시 찾아오자 양김씨는 놓았던 손을 재차 잡았다. 84년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로 민추협을 결성, 이듬해 2·12총선에 신민당 붐을 만들어냈다. 당시 정국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일은 연금상태인 DJ가 아니라 YS의 몫이었지만 공조관계는 87년 6·29선언때까지 계속 유지됐다.





    80년이후 잡은 손, 90년 다시 갈라서

    그러나 거대한 군부집권세력이 물러가자 공조는 80년처럼 권력을 향한 동상이몽으로 끝났다. 6·29선언 한달이 지나면서 두 사람은 경쟁에 이어 대립관계로 나아갔고 민주화세력 마저 양분시켰다. 대통령 후보 단일화의 실패로 끝난 이같은 갈등의 결과는 노태우씨를 내세운 군부의 권력 연장이었다.

    6월항쟁으로 얻어낸 민주화의 과실로 치른 선거에서 국민 3분의 2의 반대에도 불구, 군 출신 세력이 다시 합법권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자신들의 집권욕이 빚어낸 결과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역사에 씻기지 않는 오점을 남겼지만 분열은 이후 더욱 극렬해져갔다. 이로 인해 이어 치러진 4·26총선에선 비록 여대야소를 만들어냈지만 망국적인 지역정당 구조가 더욱 고착되고 말았다.

    양김은 그때까지 민주화에 견인차 역할을 했지만 이후부터는 역사의 전진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90년 1월 21일 3당통합이란 충격적 발표는 DJ가 YS와 다시 손을 잡을 수 없게 만들었다.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통합은 양김이 서로 적이 된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당시 YS는 권력을 쫓아 야합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지만 DJ와의 경쟁관계를 단번에 유리한 국면으로 변화시켰다.





    전직들 가세, 물고 물리는 난타전 계속

    그러나 이후에도 YS,DJ는 원치는 않았지만 자신들의 존재를 상대방의 실수를 통해 국민에게 각인시키는 이상한 ‘적대적 상부상조’를 해왔다. YS가 악수를 둬 DJ를 살려내고, DJ가 악수를 둬 YS를 살려낸 일이 벌어진 것이다. 가령 성수대교 붕괴로 시작한 각종 사고로 인기하한가였던 YS는 지자체선거에서 패배했지만 DJ가 분당을 통해 정계에 복귀하면서 다시 살아났다. DJP에 대한 회의론에 시달리던 DJ를 YS는 97년 국회 날치기 파동이란 선물로 살려냈다.

    역전이 거듭되며 숱한 분수령을 넘어온 YS-DJ관계가 새삼 뜨거워진 것은 원인이 무엇이든 DJ집권후 YS의 행보에서 비롯되고 있다. 여기에 한때 두 사람의 공동의 적이던 전두환-노태우씨까지 가세, 물고 물리는 난타전은 언제라도 속편이 이어질 분위기다. 양상은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DJ에게 YS가 ‘독재자’라고 계속 비난하자 전-노씨가 ‘주막강아지’‘후계자로 세운 것 국민 앞에 죄송하다’고 DJ를 측면지원하는 꼴로 YS는 왕따가 된 모양새다.

    전직 대통령 문화가 만들어지려면 앞으로 수명의 대통령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서인지 이를 보는 각계의 관전평은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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